세르게이 드보르체보이 감독의 <아이카> (Ayka, 2018)
1 관찰자적 다큐멘터리(observational documentary) 양식과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의 시스템
카자흐스탄 출신 감독 세르게이 드보르체보이는 첫 번째 극 영화 <툴판>(2008)을 연출하기 전까지 <행복>(1995), <빵 먹는 날>(1998)을 포함해 다큐멘터리만 작업했었다. 다큐멘터리 감독으로서의 경력은 제71회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되었던 <아이카>(2018)에도 스며들었다. <아이카>는 더 나은 삶을 꿈꾸며 1년 전에 모스크바로 이주했지만 비자가 만료되어 불법 체류자가 된 20대 여성 아이카(사말 예슬라모바)를 관찰자적 다큐멘터리적인 카메라로 담아내는 영화다. <아이카>의 핸드헬드 카메라는 관찰자적 다큐멘터리 양식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위기에 빠진 아이카를 찍기로 결정한 순간부터 어떤 인물이 등장하든 말든 그녀와 밀착한다. 아울러 카메라는 어떤 사건을 시간으로 삼으며 그 조건에서 흐르는 아이카의 물리적인 시간을 점프 컷으로 이어 붙인다. 이로 인해 <아이카>만의 고유한 두 가지 특성이 생성된다. 첫째, <아이카>에서 아이카의 시점 숏이 부재한다. 시점 숏이 없다는 사실은 비록 아이카가 계속 비좁은 공간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일하지만, 대화를 나누거나 상대방에게 관심을 둘 겨를이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둘째, 아이카에게는 휴가라는 개념이 정립될 수 없다. 극 중에서 모스크바는 100년 만의 폭설로 난장판이 되었다. 그러나 부유한 자는 이 귀찮은 상황을 감내하며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감상할 수 있다. 반면 끊임없이 거리로 밀려나는 아이카에게는 하늘을 바라볼 여유가 없을뿐더러, 눈은 그녀의 삶의 무게를 가중하는 잔인한 현실이다. 이렇게 관객은 감독의 해석 없이 관찰자적 다큐멘터리 양식에서 기인한 두 가지 특점만으로 아이카가 처한 상황을 직시한다.
이에 덧붙여 세르게이 드보르체보이 감독은 관찰자적 다큐멘터리 양식을 뼈대로 한 연출법에 적합한 연기를 펼칠 수 있는 배우로 <툴판>에서 한번 호흡을 맞춘 적이 있는 사말 예슬라모바를 캐스팅한다. 사말 예슬라모바는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의 시스템이 강조하는 연기를 전문적으로 훈련을 받았던 배우다.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의 시스템은 연극 무대 위에서의 관습적이고 과장된 연기를 거부하고, 어떤 상황에서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신체적 반응을 정서로 표현하는 사실주의적 연기를 역설한다. 즉, 사말 예슬라모바는 본인이 맡는 캐릭터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반드시 발생해야 하는 신체적 행동을 연구하고, 이를 찾아냈을 때 비로소 진정한 감정을 이끌어내는 연기를 전문적으로 한 배우다. 그러므로 <아이카>에서 관객이 보는 아이카는 라디오 뉴스, TV 뉴스, 버스 안내 방송 등 다채로운 수단으로 새로운 상황적 조건이 지속해서 제시되고, 그 안에서 사말 예슬라모바가 신체적 반응을 보이고 자연스럽게 감정을 끄집어내며 완성한 사실적인 캐릭터다. 아울러 사말 예슬라모바는 아이카라는 캐릭터에 스타니슬랍스키적인 접근을 하므로 시종일관 본인에게 단단히 붙는 카메라를 일절 신경 쓰지 않는다.
2 <아이카>의 카메라가 찍는 것
영화는 아기를 출산하고 이틀이 지난 시점에서 출발한다. 무기력하게 누워있던 아이카는 아기에게 젖을 물리라는 간호사의 말에 정신이 번뜩 든다. 아이카는 아기에게 눈길을 줬을 뿐이지 안을 생각이 없다. 후반부에서 밝혀지는 사실을 상기하면 원래 아이카는 임신 중절 수술을 받고 싶었으나 그럴 돈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출산을 선택했고, 그렇기에 그녀는 아이에게 정을 붙이지 않는다. 게다가, 태어날 생명의 태명이나 이름을 준비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애초에 아이카의 계획이 아기를 병원에 두고 홀로 떠나는 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몰래 병원을 떠난 아이카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눈이 내리는 거리를 지나서 불법으로 닭을 손질하는 창고에 도착한다. 이때 카메라가 무엇을 찍었는지를 파악하고, 이를 토대로 앞으로 무엇을 찍을 것인지 이해해야 한다. 세르게이 드보르체보이는 눈이 내리는 풍경을 찍은 게 아니라,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계속 이동하는 아이카가 겪는 고통의 물리적인 거리다. 그러므로 앞으로 <아이카>의 카메라는 촬영의 기조를 유지하며 아이카의 육체를 찍을 테다. 창고에서 아이카는 고통과 싸우며 닭의 털을 뽑는 일에 매진한다. 카메라는 이 노동 현장을 객관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익스트림 롱 숏 대신에 익스트림 클로즈업 숏을 고집하며 아이카의 손과 땀을 포착한다. 그녀의 육체에 집중하면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않는 털이 막 뽑힌 앙상한 닭이 보인다. 이런 닭의 모습은 몸이 망가진 아이카의 현재 상태를 연상시키고, 더 나아가 아이카에게 안부를 묻지 않고 바쁘게 손을 움직이는 동료 노동자들은 아이카가 직면 중인 무자비한 사회를 은유한다.
그곳에서 아이카는 여태껏 몰랐던 한 가지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 바로 모유다. 아이카의 주변에는 임신 전후에 생기는 신체의 변화를 알려줄 사람이 없다. 따라서 아이카는 모유가 갑자기 흘러나올 수 있다는 점과 모유를 짜지 않으면 가슴에 극심한 통증을 야기할 수 있다는 점을 아예 모른다. 무엇보다 모유는 아이카에게 이걸 마셔야 할 아기가 어디에 있냐고 불현듯 질문을 던지며 그녀의 죄의식을 자극할 예정이다. 아이카는 닭 공장에서 열심히 일했지만 임금을 떼였고 다시 길거리를 나선다. 그녀는 예전에 일했던 공연장에 가서 거짓말로 일자리를 빼앗은 동료에게 따지지만, 그녀는 바깥으로 쫓겨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세차장으로 향한다. <아이카>의 구조가 그녀가 계속 밖으로 쫓겨나며 생기는 사건을 시간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지만, 세르게이 드보르체보이 감독은 단순히 그녀가 거리로 밀려나는 걸 보여주지 않는다. 이전 일터인 공연장에서 세차장으로 이동하는 아이카를 따라감으로써, 즉 현재를 보여줌으로써 홑몸이 아니었던 상태에서 어떤 일을 했고, 어떻게 살았는지 등 그녀의 과거를 가늠하게 만든다. 정리해서 말하자면, 세르게이 드보르체보이 감독은 관객이 직접 그녀가 살아온 삶의 궤적을 파악하도록 현재 사건과 시간만을 기록한다.
3 행복을 허용하지 않는 현실
세차장에서 한 여성이 아이카에게 2시간 내로 본인이 일하는 곳에 도착하면 일자리를 주겠다고 약속한다. 분명 아이카에게 중요한 제안이므로 그녀는 다시 추운 거리를 걷는다. 하지만 폭설은 아이카의 간절함을 무자비하게 짓밟는다. 아이카는 시간을 맞추려고 시내버스를 타지만, ‘이례적인 기상 악화로 인한 정체 현상’이라는 버스 안내 방송이 흘러나오면서 그녀는 점점 초조해한다. 그리고 그 다음 컷에 아이카가 지하도에서 걸어 나오는데, 그녀의 점퍼가 굉장히 축축하다. 점프 컷 때문에 시간의 흐름이 끊기는 했지만, 아이카의 점퍼를 통해 그녀가 버스에서 내려 전철로 환승한 게 아니라 눈을 맞으며 걸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아이카는 다시 하혈하자 약속 장소에 도착하지 못하고 급히 화장실을 잦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아이카는 우연히 한 동물병원에 들어가는데, 입장하자마자 또다시 잔인한 현실을 마주한다. 정작 치료를 받아야 하는 대상인 아이카는 돈과 여유가 없어서 병원에 가지 못하고 계속 몸이 망가지는 반면, 이구아나, 개, 고양이를 포함한 반려동물들은 수의사의 환대와 진료를 받는다. 반려동물과 대조되는 아이카의 처지를 드러내는 동물병원은 가난한 자가 배척된 모순적인 휴머니즘의 알레고리다. 특히 이 알레고리는 하혈하는 개는 진료를 받고 바닥에 묻은 피를 닦는 아이카의 장면에서 또 나타난다.
화장실에서 지혈하던 아이카는 청소부 아줌마의 손길에 이끌려 작은 방으로 이동하고, 그곳에서 따뜻한 카모마일 차 한 잔을 대접받는다. 이뿐만 아니라 청소부 아줌마는 아이카의 형편을 고려해줄 수 있는 의사를 소개해준다. 근데 갑자기 휴식 공간 한쪽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나자 아이카는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는데, 청소부 아줌마의 아기가 침대에 누워 있다. 수두에 걸린 아기는 엄마의 보호를 받지만, 아이카는 며칠 전 자기 아기를 병원 침대에 버리고 도망쳤다. 결국 청소부 아줌마의 호의와 휴식 공간은 의도치 않게 아이카의 부채감을 건드린다. 다음날 청소부 아줌마의 긴급한 부탁으로 아이카는 동물병원에서 청소 업무를 잠깐 하게 되었다. 고된 노동이지만 아이카는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뻐할뿐더러, 휴식 시간에는 작은 공간에서 비스킷을 먹고 춤을 추며 처음으로 웃는 모습을 보인다. 이 장면은 그녀가 바라는 행복의 조건이 대단히 소박하다는 걸 관객에게 알린다. 그렇지만 그녀의 미소는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짜내지 않은 모유가 아이카의 가슴 고통을 재발시켰기 때문이다. 잊을 만하면 다시 통증을 일으키는 모유는 아이카에게 이걸 먹어야 하는 아기는 어디에 있냐고 끊임없이 묻는다. 수건을 짜듯이 모유를 쥐어 짜낸 아이카는 비어 있는 아기 침대에 누워 장난감을 어루만지고, 카메라는 이를 포착하며 그녀의 요동치는 심리 상태를 가늠케 한다. 이에 덧붙여 아픈 아기를 데리고 황급히 병원에 간 청소부 아줌마의 모습이 뇌리에 스쳐 지나가자 아이카가 현재 있어야 할 곳이 바로 자신의 아기가 있는 병원이라는 내적인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4 출산 6일째 되는 날
더는 현재 상황을 버텨낼 수 없는 아이카는 사채업자와 접촉해 본인의 출산 사실을 고백하며 빚을 갚는 대신 병원에 두고 온 아기를 넘기겠다고 약속한다. 중간에 활용된 점프 컷 때문에 시간의 흐름이 어색하므로 이와 같은 선택은 너무 터무니없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근데 그녀가 아기를 넘기기로 결심한 순간이 제시되긴 했다. 바로 한 닥스훈트가 옆구리가 찢어진 채 새끼들에 젖을 물리는 진료실 장면이다. 해당 장면에서 아이카의 시선이 열정적으로 젖을 빠는 닥스훈트 새끼들의 시선과 부딪친다. 아마도 모유를 먹는 강아지의 시선에서 병원에 홀로 남은 아기의 시선이 보였을 테다. 6일 만에 병원에 돌아간 아이카는 간호사의 도움으로 아기를 포대기에 싼 다음 다시 눈길을 걷는다. 거리에는 자동차 소리고 가득하다. 그런데 어디선가 아기 울음소리가 어렴풋이 들린다. 물론 포대기에 싸인 아기의 울음일 수도 있지만, 아기를 사채업자에게 넘기기로 한 아이카의 죄의식이 만들어 낸 양심의 소리일 수도 있다. 접선 장소로 향하던 아이카는 방향을 틀어 어느 한 건물에 들어가 몸을 숨긴다. 아이카는 눈물을 흘리며 아기에게 처음으로 젖을 물린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아기와 아이카가 단 한 번도 한 프레임에 공존하지 않는다. 카메라가 젖을 먹는 아기에게 밀착하면 아이카의 얼굴은 프레임 밖으로 밀려나고, 반대로 아이카의 얼굴로 카메라를 이동하면 아기가 프레임에서 사라진다. 관객이 지닌 연민의 감정은 출산 7일째 되는 날, 예수의 제7일인 안식일처럼 아이카에게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하지만 관찰자적 다큐멘터리의 기법을 따르는 ‘감정이 소거된 카메라’, 그리고 아이카와 아기를 철저히 분리하는 프레임은 관객의 염원에서 빗겨 나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