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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문보 May 07. 2019

존재와 헛간, <버닝>

존재와 '헛간을 태우다'의 관계에 대하여


제71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국제영화비평가연맹상을 받은 <버닝>은 <시> (2010) 이후 8년 만에 이창동 감독이 내놓은 신작이다. 그의 필모그래피 자체가 이창동 감독이 영화라는 매체의 본질적인 특성을 활용하여 관객에게 엄청난 기쁨과 감탄을 자아내는 스토리텔러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근데, <버닝>은 그가 묘사하고 싶은 현대 사회 속 청춘의 분노를 어느 영화보다 철저히 영화적으로 다루고 싶은 의도에 따라 인물들의 대사와 설명이 굉장히 많이 생략되었다. 그래서, 이 영화의 묘연한 이야기를 통해 관객에게 근래 한국에서 느껴 볼 수 없었던 숨 막히는 듯한 충격을 선사함으로써 저절로 경외감을 표하게 만든다.



이창동 감독의 신작 소식이 들렸을 때부터 관심을 가진 관객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겠지만, <버닝>의 원작 소설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헛간을 태우다』이다. 그러나, 극 중에서 계속 언급되는 작가이자 현대 미국 문학사를 대표하는 윌리엄 포크너의 단편소설『헛간 방화』까지 영화와 연결되면서 '헛간을 태우다'라는 의미를 생각하게 될 뿐만 아니라 방향성을 잃은 현재 청춘들의 분노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게 된다. 다만, 깊은 고민을 하더라도 수학 문제를 풀듯이 명확한 답을 내놓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영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메타포를 특정 하나의 의미로 정의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영화 초반 해미(전종서)가 '귤껍질 까기' 팬터마임을 하면서 종수(유아인)에게 한 말이 이 영화의 시작점이자 영화 전체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증거가 하나둘씩 눈앞에 등장한다고 해서 이를 굳게 믿고 답이 떨어지는 해석을 하기보다 모호함을 즐기고 나름의 해석을 내놓으며 <버닝>을 감상하면 좋을 것이다.


"어머, 간단한 거예요, 재능이고 뭐고 할 것도 없어요. 그러니까요, 거기에 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거기에 귤이 없다는 걸 잊어버리면 되는 거예요. 그뿐이에요."

- 무라카미 하루키, 단편소설 『헛간을 태우다』중에서



삶 자체가 고픈 청춘, 삶의 의미를 찾고 싶은 청춘, 그리고 권태로움을 느끼는 청춘


대학 졸업 후 소설가를 목표로 하는 종수는 유통회사 아르바이트 일을 하며 무기력하게 살아간다. 그가 느끼는 무기력의 기원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포크너의 『헛간 방화』에서 Abner의 작은아들 Sarty가 아버지의 사회를 향한 분노의 영향을 받는다는 점과 분노하고 있지만 어쩔 수 없이 삭히는 아버지와 재판장에 있는 종수의 모습을 번갈아 보여주는 장면들을 고려해 볼 때 종수도 분노를 조절 못하는 아버지의 삶에 정착한 무기력에 전염된 게 아닐까 싶다. 기운 없이 살아가는 종수는 배달일을 하던 어느 날 어릴 적 동네 친구 해미를 만났고, 두 사람은 술 한 잔을 기울인다. 종수 앞에서 자신이 배우고 있는 팬터마임을 보여주던 해미는 그에게 갑자기 아프리카로 여행 간다고 말하면서 단순히 굶주린 자를 의미하는 '리틀 헝거'와 삶의 믜미를 파악하는 데 굶주린 '그레이트 헝거'에 대해 이야기한다. '리틀 헝거'는 종수를, '그레이트 헝거'는 해미로 연결 지어 볼 수 있다. 그런데, 두 사람 사이에 정체불명의 남자 벤(스티븐 연)이 등장한다. 해미가 아프리카 여행 중에 만난 벤은 종수와 해미와 달리 재산이 많은 부모를 만나 모든 것을 누리는 청춘이다. 하지만, 그의 모습에서는 권태로움이 느껴진다. 종수처럼 자신의 삶을 잊게 만드는 고된 노동을 하지도 않고, 해미처럼 삶의 의미를 찾고 있는 자신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는 비닐하우스를 태운다고 종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하면서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가끔씩 헛간을 태운답니다.······  이걸 피우고 있으면 이상하게도 여러 일들이 떠오릅니다. 빛이라든가 냄새라든가, 그런 것들이요. 기억의 질이"

- 무라카미 하루키, 단편소설 『헛간을 태우다』중에서



'존재'와 '헛간을 태우다'의 관계


<버닝>의 원작 소설 『헛간을 태우다』는 헛간을 태우는 행위를 그저 도덕성과 우위라는 관점에서 생각하도록 이끄는 반면, <버닝>은 헛간을 농촌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비닐하우스로 바꾸고 포크너의 소설을 영화 안으로 끌고 옴으로써 무언가를 태우는 행위를 존재와 연결한다. 영화에서 세 사람은 자신의 존재를 느끼기 위한 혹은 증명하기 위한 행동을 한다. 우선, 해미를 먼저 언급하자면 해미는 물론 두 사람과 달리 방화를 저지르지 않지만 ''존재'와 '헛간을 태우다' 사이의 관계의 측면에서 고려해 볼 때 해미도 비슷한 맥락을 관통하고 있는 인물이다. 해미는 벤과 그의 친구들 앞에서, 그리고 노을이 지는 저녁 종수의 집에서 부시맨의 춤을 춘다. 종수의 엄마와 본인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이 기억 못 하는 우물 이야기와 카드빚 때문에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사연을 미루어 볼 때 해미가 얼마나 세상을 외롭게 살아갔는지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러나, 해미는 사회와 경제적인 이유로 자신의 존재가 세상에 잠몰되는 것을 절대 허용하지 않고, 이는 노을이 지는 저녁에 몸을 웅크리다가 점점 동작이 커지면서 팔을 벌리는 해미의 부시맨 춤으로 표현된다.



벤은 두 사람과 달리 자신이 원하는 것을 누리는 삶을 살지만 권태로움을 느끼던 중 다른 차원의 행동을 통해 희열을 느낌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인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벤이 말한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행위는 포크너의 『헛간 방화』에 등장하는 Abner와 비슷하지만 차이점이 있다. Abner와 벤은 자신만의 정체성을 증명하고 정의하기 위해 방화를 수단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비슷한 점을 공유한다. 하지만, Abner는 자기뿐만 아니라 가족을 억압하는 사회 이데올로기에 저항하기 위함과 하찮은 존재를 세상에 보여주기 위한 목적을 가진 반면. 벤은 물질적 풍요로움이 가져다주는 만족감에 익숙한 나머지 지루함을 느끼게 되었고 타인을 자신의 기준으로 평가하는 욕구를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려는 마음과 연결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게다가, 파주에서 종수에게 했던 말을 고려한다면, 사회경제적인 면에서 다른 청춘에 비해 높은 위치에 있는 벤은 이를 도덕성 측면에서도 높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만약, 벤의 집에서 발견되는 해미의 시계와 고양이가 실재하는 것이라면, 벤은 두 달에 한 번 만나는 여성을 법이 아닌 자신이 세운 도덕 기준을 바탕으로 판단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처벌을 내린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벤은 자신이 사회경제적인 측면과 아울러 도덕적인 측면에서도 우월하다는 생각에 잠기게 되고, 거기서 파생되는 희열을 느끼며 자신의 존재를 자신만의 페이스로 느낀다고 볼 수 있다.


"두 달에 한 번쯤은 헛간을 태웁니다." 그가 말했다. 그리고 또 손가락을 꺾었다. "그 정도 페이스가 가장 좋은 것 같습니다. 물론 제게는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이상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는 얼굴 앞에서 양손을 펼쳤다가 다시 천천히 모았다. "세상에는 헛간이 얼마든지 있고, 그것들은 모두 내가 태워주기만 기다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해변에 우뚝 서 있는 헛간도 그렇고, 논밭 한가운데 서 있는 헛간도 그렇고 ······ 어쨌든 여러 헛간들이 말입니다. 십오 분이면 깨끗하게 태워버릴 수 있지요. 마치 처음부터 그런 건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요. 아무도 슬퍼하지 않습니다. 그저 사라질 뿐이죠. 깨끗이요."

"······ 전 저 나름대로 도덕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도덕은 인간 존재에 무척 중요한 힘이죠. 도덕 없이 인간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전 도덕이라는 것은 동시 존재의 균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무라카미 하루키, 단편소설『헛간을 태우다』 중에서



소설가로서 등단하고 싶은 종수는 처음에 벤의 이야기에 흥미를 갖게 되지만, 그날 이후로 실종된 해미와 아무리 뛰어다녀도 확인할 수 없었던 불에 타는 비닐하우스 때문에 초조함을 느낀다. 무기력한 종수지만 벤의 자신에게 들려준 이야기의 의미를 파악할뿐더러 실종된 해미를 찾기 위해 추적의 여정을 떠난다. 벤을 추적하던 중 종수는 벤이 다른 여자를 만나는 것을 목격하고, 벤으로부터 그의 집에 열리는 사교 모임에 갑자기 초대를 받는다. 벤이 의심스러운 종수는 벤의 화장실에서 해미가 차고 다니던 시계를 발견했을 뿐만 아니라 그동안 실체를 알 수 없었던 해미의 고양이 '보일'을 발견하게 된다. 더 나아가, 종수는 벤이 새로 만나는 여성이 중국에서 겪은 경험담을 이야기하던 중 지난번 해미가 친구들 앞에서 부시맨 이야기를 들려주고 춤을 보여줬을 때와 같이 무언가를 판단하는 제스처를 취하는 것을 목격하면서 무언가 깨달은 상태로 집을 나선다. 시간이 지나 눈발이 흩날리는 어느 날 종수는 벤을 불러 그를 죽이고 시신과 함께 자신이 입고 있던 옷 전부를 다 벗어던져 벤의 고급 외제 차에 일부러 불을 지른다. 이는 단순히 해미가 벤에 의해 사라졌다고 판단한 종수가 그에게 복수하는 것으로 바라볼 수 있지만, 그 이면에는 군인으로서 국가에 헌신했지만 결국 버려진 아버지를 버린 사회와 타인을 함부로 판단하는 사회를 향한 분노가 깔려있다. 그래서, 종수가 보여준 마지막 장면에서의 행위는 그동안 찾지 못한 사회를 향한 분노를 분출하는 대상을 찾았음을 의미하는 동시에 무기력하게 사는 하찮은 존재여도 실재하고 있음을 세상에 알리는 의미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도입부에서 말했듯이 <버닝>은 방향을 잃은 청춘들의 분노와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마음은 대사와 설명보다 이미지와 사운드로 묘사된다. 다만, 실재하는 것에 현혹되지 말라는 나홍진 감독의 <곡성> (2016)처럼 <버닝>이 대사 없이 보여주는 것들에 하나하나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고 집착하게 된다면 영화의 피상적인 부분만 눈에 보일 수도 있다. 이 리뷰도 영화를 보고 난 뒤 정리한 수십 개의 질문을 중심으로 원작과 포크너의 소설, 그리고 영화 장면과 장면의 연결성을 기반으로 한 주관적으로 대답한 결과물이기에, 이 영화를 본 관객들도 <버닝>이 지닌 모호한 특성을 즐기면서 떠오른 질문을 바탕으로 자기만의 해석 혹은 리뷰를 남기면 좋을 것 같다.



* 해당 글의 원문은 아트나인 카페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cafe.naver.com/minitheaterartnine/6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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