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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비선비 Oct 11. 2021

범죄를 위한 노인은 없다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7)>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결말 및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영화를 보기 전에 사전 정보를 최대한 접하지 않는 편이다. 특히 줄거리나 배경을 미리 알고 보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다.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처음 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타이틀과 포스터 정도만 보고 영화를 틀었고 노인 복지의 현실을 다루는 다큐멘터리 장르 정도로 예상했다. 사냥을 하던 주인공 ‘르웰린’이 범죄 현장에서 200만 달러를 줍기 전까지 말이다.


 사람들이 극찬하는 만큼 영화는 대단한 장점을 갖고 있었다. 특히 스릴러 장르에 어울리지 않는 느리고 정적인 진행과 음악을 배제하고도 (이게 가장 신기하다) 지루할 틈 없이 이야기에 집중시켜 끌고 가는 힘은 경이로울 정도였다. 다소 어렵고 이해가 잘 가질 않는다는 평도 많은 작품이지만, 반복해서 볼수록 이 영화만이 가진 특별함이 눈에 띄었다. 



 

 경이로운 완급 조절 능력

 앞서 영화가 느리고 정적인 연출을 잘 활용했다고 언급했다. 첫 오프닝 사냥 씬이나 모텔에서 돈가방을 숨기는 장면, 총상을 당한 안톤 시거가 스스로를 치료하는 장면 등, 여러 장면들이 긴 호흡으로 등장한다. 

 다소 정적인 분위기로 장면이 흐르지만 관객으로서 느끼는 감정을 결코 고요하지 않다. 오히려 리얼함에서 전해지는 긴장감과 분위기에 압도당한다. 흔히 이런 장면에는 감정 이입을 돕는 음악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감독은 오히려 음악을 제거했다. 이게 얼마나 무모한지 가늠이 안 된다면 유튜브에 음악이 빠진 영화 장면들을 검색해 보자. 스릴 넘치는 액션 씬이 코미디로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감독은 음악 없이 만들어낸 날것 그대로의 리얼함으로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긴장감을 조성해냈다.


 느리고 디테일하게 장면들을 보여주지만, 영화의 전개는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된다. 안톤 시거가 르웰린을 찾아내는 과정이라던가, 갱들 사이에 얽힌 이해관계를 설명하는 장면은 많은 부분이 생략되어 시간을 절약하면서도 영화의 전체 스토리에는 전혀 지장을 주지 않는다. 중요한 건 우연히 돈가방을 손에 넣은 르웰린 가족의 운명이니까.


 저마다의 룰을 따르는 사람들

 영화의 모든 캐릭터가 인상적이지만,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하비에르 바르뎀의 안톤 시거는 그중에서도 단연 돋보인다. 사람을 죽이는 그의 눈동자엔 공포도, 불안도 없다. 심지어 희열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는 자신만의 룰을 따라 사람들의 생사를 결정하는데, 그 명확한 기준은 누구도 알 수 없다. 죽일지 말지 애매한 경우에 그는 동전 던지기를 마지막 자비로 제안한다. 그리고 그는 이 모든 게 ‘공정’하다고 말한다.

 멕시코와 미국 국경에서 궁지에 몰린 르웰린을 찾은 사설탐정 ‘칼슨’은 그에게 제안을 한다. 돈을 자신과 나누면 안톤으로부터 지켜준다는 내용이다. 경찰도 모르는 르웰린의 행방을 단번에 알아버린 실력자인 칼슨은 그의 호텔 방에서 샷건을 들고 기다리는 안톤과 조우한다. 철저하고 똑똑한 칼슨이지만, 안톤은 그의 머리 위에 있었다.


 다 잡은 토끼를 바라보며, 안톤은 칼슨에게 ‘지켜온 그 룰 때문에 이 꼴이 됐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라며 조롱한다. 자신의 룰이 더 상위에 존재한다는 우월감을 내비친 것이다. 칼슨은 목숨을 구걸하며 ‘이렇게 까지 할 필요 없잖아?’라고 말한다. 개인적인 원한이 있는 것도, 돈을 위해서도 아니다. 안톤은 그저 자신만의 ‘룰’을 따르고 있다. 사회적 통념과 약속 따위와는 별개로 존재하는, 어떤 특수한 자연법칙처럼 존재하는 것이다.


 어째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는가

 안톤이 현대 사회의 별종이라면, 보안관 ‘에드’는 선대부터 보안관 일을 했을 정도로 법을 수호하며 전통적인 방식으로 살아온 사람이다. 르웰린은 이 둘 중간에서 갈등하는 존재다. 그는 인간의 죽음을 묵인할 정도로 악하지 않지만, 돈을 포기하거나 법을 잘 지킬 만큼 선하지도 않다. 애매한 경계에 있던 그는 끝까지 에드에게 전화를 하지 않았고, 결국 비참한 결말을 맞이한다. 


 사건에서 에드는 언제나 한 발짝 물러선, 관망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의 육신은 노쇄했지만 현장에서의 날카로운 감각만큼은 여전했다. 젊은 부관이 미처 보지 못하는 것들을 예리하게 캐치했고, 안톤이 보던 시선을 공유하면서 분명 핵심에 다가갔다. 하지만 그는 이미 열정을 잃었고, 변해가는 세상에 짙은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그는 너무 지쳤던 것이다.

 이는 안톤과 에드의 타이밍이 절묘하게 비껴 나는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둘은 결코 만나는 법이 없는데, 에드로 대표되는 구세대와 안톤이라는 신인류의 양립 불가성을 나타낸다. 인간은 점점 잔인해지고 알량한 양심마저 잃어가고 있다. 더 이상 이 거칠고 미쳐버린 세상에 노인이 설 자리가 없다는 뜻이다.

그도 내가 본 것을 봤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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