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스왈로우(2019)>
*영화 <스왈로우>의 결말 및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오래간만에 여운이 오래 남는 영화를 찾았다. 휘발성이 강한 시간 죽이기용 영화들보단, 굳이 시간 내서 영화를 봐야 한다면 강렬한 이미지나 영감을 주는 영화들을 선호한다. 그런 면에서 <스왈로우>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도 계속 생각이 나게 만들었으니까.
필자는 여성주의 영화들이 갖고 있는 긍정적 에너지를 좋아한다. 주로 약자로 등장하여 불평등과 억압을 당하며 분한 감정이 들게 만들지만, 끝내는 멋지게 극복해내는 장면에서 느껴지는 카타르시스가 특히 좋다. 틸다 스윈튼이 주연한 2009년작 <아이 엠 러브>에서도 이를 잘 표현했다. 아이 엠 러브와 스왈로우는 공통점이 많은데, 부자 남자 집에 시집을 가서 고통을 받다가 끝내는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찾는 과정이 특히 그렇다.
예전에는 가난하지만 당돌한 여주인공이 부잣집 남자와 다투다 결국 사랑이 싹트는 내용이 많았는데, 요즘에는 잘 먹히지 않는 듯하다. 마찬가지로 여성 캐릭터를 너무 먼치킨으로 만들어 공감을 얻지 못하는 작품들도 있는데, 가녀린 여주인공이 건장한 남자를 단숨에 제압하는 등, 현실성 없는 내용으로 '여자는 남자보다 우월해.' 하는 역차별적 메시지를 갖고 있는 영화들이 그렇다.
이미 문제들을 다 극복했다면 모를까, 여전히 차별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과정은 생략하고 이긴 결과만 보여주는 내용은 오히려 기만이 아닐까?
본격적으로 영화 이야기를 해보자. 주인공 '헌터'는 겉으로는 좋은 집안에 자상한 남편과 시부모를 만난 듯 하지만, 은근히 무시하는 그들의 태도에서 헌터를 매우 얕잡아 보고 있음이 드러난다. 영화의 시작은 양 도축 장면으로부터 시작하는데, 털과 가죽은 고급 카펫이 되어 리처드의 저택으로 오고, 고기는 램 스테이크가 되어 헌터와 리처드의 결혼을 축하하는 식탁에 오른다.
양은 주인공 헌터와 동일시되는 중요한 대상이다. 겉으로는 부부라는 동등한 위치인 것 같지만 고된 가사를 홀로 하고, 넥타이 하나 잘못 다렸다고 구박받는 장면에선 마치 시녀처럼 느껴진다. 자상하던 남편은 헌터가 이식증을 겪는 사실을 알자마자 하자 있는 제품이라도 받은 피해자처럼 왜 결혼 전에 말하지 않았느냐고 극대노를 하고, 시부모는 헌터의 안위 따윈 안중에 없이 그녀의 뱃속에 있는 아이만 어떻게 빼앗을지 궁리한다. 하나의 생명이 아닌 재산으로 분류되는 '가축'처럼 무조건적인 희생만을 강요받은 것이다.
이는 헌터를 상징하는 컬러와도 연관성이 있다. 그녀가 방을 꾸미는 장면에서 파랑, 하양, 빨강으로 코팅지를 붙여 프랑스 국기를 형상화한 장면이 나오는데, 각각 자유, 평등, 우애(박애)를 뜻하는 상징들 앞에서 헌터는 오직 빨간 시트지 앞에서 양 모빌을 들고 서 있다(영화의 포스터처럼).
즉, 그녀에게 허락된 가치는 자유나 평등과 같은 권리가 아닌 '사회 공동체에 대한 의무와 봉사를 의미하는' 우애뿐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빨간 피를 쏟는 양의 죽음과 더불어, 위기에 빠진 그녀의 상황을 나타낸다.
점점 소름 돋는 남편과 그 가족들의 태도와 더러운 속내가 드러나고, 이식증이 탄로 나 입지를 아예 잃어버린 주인공에게 이쯤 되면 조력자가 등장해야 할 시기다.
시아버지의 권유로 찾아간 병원에서 상담을 받는 헌터는 처음에는 무척 방어적이었지만 나긋나긋한 의사의 태도에 점차 마음을 풀고 자신의 기구한 과거를 이야기한다. 영화 '굿 윌 헌팅' 처럼 환자와 상담사 간에 극적인 교류가 탄생할 것 같은 이 장면에서, 성폭행으로 임신하게 된 헌터의 출생 비화를 알아낸 의사는 의사의 도리를 돈에 팔아버리고 정보를 리처드에게 곧장 알린다. 그녀의 목적은 치료가 아니었던 거다.
앞서 헌터를 상징하는 컬러가 레드라고 말했는데, 적색의 보색인 녹색은 반대로 헌터를 위협하고 불편하게 만드는 상징으로 해석할 수 있다. 리처드의 저택은 짙은 녹색을 중심으로 인테리어가 구성되어 있었고, 공교롭게도 상담실의 카우치나 소품들 대다수 또한 녹색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의사인 그녀 또한 헌터와 대비되는, 돈에 따라 양심을 얼마든지 팔아버리는 부정적인 인물로 그려진 것이다.
그린의 상징은 일반적으로 자연이나 평화를 의미하지만, 영화에서 주로 사용된 다크 그린은 이기적인 마음과 부에 대한 열망을 내포하고 있다. 우애의 덕목으로 희생을 강요당하는 헌터, 즉 레드 컬러와는 완전히 대비되는 상징으로써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헌터는 정말 의지할 곳 하나 없는 상황에 처한다. 입이 싸도 너무 싼 남편 리처드는 이미 주변이들에게 그녀가 이식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아 알고 지내던 회사 동료들도 그녀를 값싼 동정과 연민으로 대한다. 결국 그녀의 멘탈은 무너지고, 그럴수록 병세는 점점 더 심해져 간다.
헌터의 병이 도무지 진전을 보이지 않자, 시부모와 리처드는 결심한 듯 치료를 핑계로 헌터를 정신병원에 가두려 한다.
궁지에 몰린 헌터는 도망을 시도하는데, 절대로 자기편에 서지 않을 사이코들을 등지고 홀로 서기를 다짐한 것이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사람은 누가 있을까? 그녀를 낳고 길러준 어머니라면 헌터를 받아줄까. 하지만 여력이 없다는 이유로 유일했던 어머니마저 헌터를 거부한다. 이제 정말 막다른 곳에 다다른 헌터는 말 그대로 오갈 곳을 잃었다. 아이마저 임신한 그녀가 갈 수 있는 곳은 과연 어디일까? 헌터는 어느덧 한 낯선 남자의 집에 이르게 된다.
즐거운 파티가 진행되고 있는 한 가정. 자상해 보이는 남자가 극진히 자신의 아이와 아내를 챙기고 있고, 초대받지 않은 손님인 헌터가 막무가내로 집안에 들어와 그와 조우한다. 처음 보지만 어딘가 낯설지 않은 남자... '어윈'이라고 불리는 그는 곧 헌터가 자신의 딸임을 알게 된다.
자신의 죄악으로 태어난 아이를 처음 마주한 어윈은 자신이 부끄럽냐고 묻는 헌터의 질문에 '아니'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자신이 저지른 행동은 부끄럽다고 말하며, '굿 윌 헌팅'이었다면 로빈 윌리엄스가 했을 대사인, '넌 잘못한 것 없어.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라 말한다.
헌터는 왜 이제껏 그 많은 고통과 불평등, 억울함을 '삼킬' 수밖에 없었을까? 그녀는 자신이 사랑과 축복으로 잉태된 생명이 아니라는 생각에 스스로를 헤치며 살아왔을 헌터는 일이 잘못될 때마다 스스로를 책망하며 지내왔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는 거짓 환상에 사로잡혀 고통을 참으며 살아왔다. 위험한 물건을 삼키는 행위는, 그녀가 여태껏 삼켜온 고통에 비하면 작디작은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더욱 크고 위험한 물건들을 삼키면서, 그녀는 처음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자부심을 느꼈다. 커다란 저택도, 겉으로 자상한 남편도 채워주지 못한 만족감을 '삼키는 행위'를 통해 찾아낸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은 극적인 무언가를 보여주려 시도하지 않았다. 그저 홀로 밥을 먹고, 화장실을 들렀다가 볼일을 보고 나가는 장면을 끝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남편과의 문제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녀는 과연 병을 극복한 걸까?'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일일이 주지 않고, 감독은 그저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며, 언뜻 자신감이 비치는 헌터의 얼굴을 보여줌으로써 이야기의 마침표를 찍었다.
다만 헌터가 사라진 자리를 오랫동안 카메라로 잡으며, 화장실을 오고 가는 다른 여성들의 일상적인 모습들로 메시지를 전한다. 이건 단순히 개인의 이야기가 아님을, 그리고 헌터와 같은 처지를 겪는 여성들이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이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