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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비선비 Aug 16. 2021

무심코 던진 돌에

영화 <바벨(2006)>

*영화 <바벨>의 결말 및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좋은 영화를 판단하는 기준이 다르다. 누군가는 시각적 요소를 중요하게 볼 것이고, 누군가는 거기에 더해 사운드의 완성도가 떨어지는 것을 용납하지 못할 것이다. 물론, 그 두 가지가 총족되더라도 영화가 내포한 메시지나 교훈이 미약하거나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도 분명 있다. '바벨'은 그래서 많은 이들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 어려운 영화가 아닐까 싶다.

 

 바벨은 기본적으로 4가지 이야기를 하나로 엮어 진행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두 이야기는 모로코에서, 한 이야기는 멕시코와 미국 국경 사이, 나머지 한 이야기는 완전히 동 떨어진 일본에서 일어난다. 이는 많은 관객들에게 이미 난해한 조건이 돼버린다. 왜냐하면 이야기가 전환될 때마다 화면의 톤, 흐르는 음악, 중요 화제 자체가 완전히 바뀌어 자칫 집중력을 잃기가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히 바벨은 마치 퍼즐을 맞추듯 모든 이야기에 완전히 몰입하여 좁쌀 같은 단서를 찾아 맞추길 요구하는 영화는 아니다. 오히려 각 사건에 감정을 이입하여 흐르다 보면 차분한 마음가짐으로 결말에 이를 수 있는 직관적인 구조로 되어있다.

 이는 이냐리투 감독의 다른 작품들에서도 느낄 수 있는데, '버드맨'이나 '비우티풀'같은 영화도 최대한 군더더기를 빼고 그저 사건과 주인공의 감정선 만으로 심오한 내면을 표현하려는 감독의 의도가 상당히 와닿았다. 사실 이야기는 무언갈 더하기보단 빼는 작업에서 완성된다고 생각하는데, 바벨은 지나친 상징성과 디테일을 배제함으로써 이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결말부에 이르기 까지, 감독은 여러 갈래의 해석 여지를 주지 않는다. 영화에서 표면상 드러나는 사건의 매개체는 바로 '총'이다. 아내의 자살 도구가 되었던 총을 야스지로가 모로코에서 가이드에게 선물하게 되고, 가이드가 팔아넘긴 그 총이 미국 관광객 리처드의 아내를 사고로 발사되어 미국에 있는 리처드의 가정부가 아들의 결혼식에 참가하지 못할 상황으로 흐르고, 결국 가정부는 아이들을 데리고 멕시코 국경을 넘는 모험을 강행하게 만든다.


 흔히 '나비효과'라 부르는 사건의 발단은 야스지로가 총을 모로코에 두고 온 것으로 시작하는 듯 하지만, 만약 그의 아내가 총으로 자살하지 않았다면 그런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영화의 결말은 어머니가 자살한 충격과 결핍적 트라우마에 휩쓸려 자기 파괴적 행동을 하는 자신의 딸을 야스지로가 포근히 안아주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카메라는 점점 멀어지며 아름다운 도시의 야경과 두 부녀의 모습을 섞어버리고, 시작과 끝의 경계가 느껴지지 않는 류이치 사케모토의 음악이 지속적으로 연주된다.

 



 앞서 사건의 표면적 매개체는 총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총은 스스로 아무런 의도를 갖지 않는다. 그저 인간의 손에 의해 발사되고 해를 가할 뿐, 그 자체로는 한낱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사건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존재는 과연 누구인가? 필자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각 나라의 공권력 즉, '경찰'을 꼽았다.


 리처드의 아내가 모로코에서 총을 맞고, 매우 난처한 입장에 처한 모로코 정부는 경찰들을 보내 사건을 수사한다. 그 과정에서 경찰은 용의자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가하고, 비무장한 아이까지 쏴버리는 만행을 벌인다.

 하지만 그 무시무시한 모로코 경찰도 상대에 따라 태도가 달라지는데, 구급차가 올 수 없는 상황이라는 사실을 안 리처드가 고함을 치며 욕설을 내뱉어도 미국인인 그에게는 찍소리도 못하는 경찰의 이중성이 드러난다. 단지 인종이라는 껍데기 만으로 태도과 극과 극으로 갈리는 것이다.


 이는 미국 국경을 넘는 아멜리에 일행의 사건에서도 잘 드러나는데, 라틴계라는 이유로 그녀와 산티아고는 수비대에게 매우 고압적이고 무례한 수색을 당한다. 만약 둘의 외형이 전형적인 백인이었다면 여권을 보여줄 일 조차 있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무리한 도주로는 결코 이어지지 않았을 거라 확신한다.

 

 영화의 결말부에 이르러, 야스지로의 딸 치에코는 그녀의 아버지를 찾던 경찰에게 전화를 걸어 집으로 부른다. 알몸으로 자신에게 안기려는 치에코를 경찰은 필사적으로 거부하고, 그런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연민의 감정을 느낀다.

 영화에 나오는 경찰들 중 유일하게 인간과 인간의 관계로 접근한 케이스다. 다른 경찰들은 마치 도구처럼 자신의 역할을 수행할 뿐, 그들 중 누구도 감정이나 동정심 따위를 느끼지 않았다. 야스지로의 아내와 리처드의 아내의 가슴을 뚫었던 총과 같은 객체인 것이다.




 바벨이라는 영화가 전하는 교훈이 있을까? 필자는 아무런 교훈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아니, 교훈이 존재해서는 안 되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벌거벗은 치에코를 끌어안고 있는 야스지로의 모습이 도쿄의 야경 속에 점점 멀어지는 장면에서, 필자는 큰 감명을 받았다. 완전한 해소감을 주는 대신 감독이 택한 열린 결말에서, 심각한 상황과 조금만 거리를 두자 이입했던 감정이 희미해지고 사건이 매우 평범한 일로 느껴졌다.


 바벨의 네 가지 사건들이 말도 안 되게 사소한 공통점으로 이어졌던 것처럼, 사람의 일들은 크건 작건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중 일부는 우리가 인지할 수 있고, 일부는 결코 그 원인을 찾지 못할 것이다.

 바벨에서 구체적으로 치에코의 어머니가 자살한 이유를 찾을 수 있을까? 야스지로가 모로코에서 가이드에게 총을 선물할 때, 과연 비극을 예상할 수 있었을까?

 

 점점 작아지는 치에코와 야스지로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심드렁하면서도 아름다운 야경은 필자에게 이런 말을 건네는 기분이었다.


 '모든 건 그저 일상이야. 네게도 일어날 수 있는.'


야스지로의 딸 치에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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