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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vie Street May 24. 2018

<버닝> 무엇을 태울지는 당신의 몫

이창동 감독이 담으려고 했던 것은 …

제목: 버닝

감독: 이창동

출연: 유아인(종수 役), 스티븐 연(벤 役), 전종서(해미 役)

#2시간 28분 #원작 무리카미 하루키 <헛간을 태우다> #팬터 마임


*해당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다분합니다.


 <버닝>은 출구 없는 미로 같은 영화다. 영화가 시작하는 순간, 관객은 영화 속에 갇힌다. 영화의 주제의식에 다다랐다고 생각하는 순간, 벽에 맞닥뜨리게 된다. 이와 같은 과정을 몇 차례 겪고 나서야 관객들은 비로소 깨닫는다. <버닝>은 흩뿌려놓은 주제의식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것을. 작품 속에서 주제의식을 골라내고 그에 대한 답을 내리는 것은 결국 관객의 몫으로 남겨진다. 관객을 능동적인 해석자의 위치로 격상시키려는 시도는 좋았으나 한편으로, 범람하는 메타포는 주의를 산만하게 해 깊은 해석을 방해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창동스러운 작품임에는 변함이 없다. 이창동 감독의 작품들은 대체로 러닝타임이 2시간을 상회할 정도로 호흡이 길다. <버닝>의 러닝타임 역시 2시간 28분.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다. 인물의 사소한 모습까지 담아내는 세세한 연출과 길게 뻗어나가는 롱테이크 씬은 그래서 가능하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이창동 감독은 관객에게 몰입과 관조라는 상충되는 경험을 제공한다. 또한, <버닝> 특별한 점은 이창동 감독의 전작들에는 없던 스릴러적 긴장감이 가미됐다는 것이다. 관객들을 긴장하게 하는 무언가가 끊임없이 꿈틀거린다.



 

 이창동 감독은 그만의 방식으로 자본주의의 부조리/ 삶에 대한 근원적 욕망/ 심장을 뛰게 하는 광기/ 현실과 교차하는 허상에 불을 지른다. 이 모든 요소들은 '결핍'을 발화점으로 갖는다. 가장 빨리 타오른 건 자본주의의 부조리였다. 종수는 멀리서 벤을 보며 "어떻게 하면 젊은 나이에 저렇게 살 수 있지? … 한국에는 개츠비가 너무 많아"라고 읊조린다. 극복될 수 없는 자본의 한계 앞에서 선망의 시선을 보내는 해미와 달리, 종수는 박탈감을 느끼고 움츠러든다.

 영화는 자본주의로부터 파생된 부의 불평등을 보여주고 사람들이 격차를 받아들이는 방식을 극단적으로 일반화해서 보여주고 있다. 벤에게 해미와 종수의 삶은 언제든 자신이 짓밟아버릴 수 있는 한낱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벤의 사교모임에서 해미는 자신이 조롱받는 것도 모른 채 순진하게 이야기를 꺼내고, 춤을 춘다. 민망함과 수치심은 보는 이의 몫이다. 해미를 지켜보는 종수와 관객의 표정은 일치한다. 주목할 점은 벤, 해미, 종수가 전부 등장하는 씬에서 종수는 제삼자의 역할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종수는 자신의 무력함을 인지하고 있다.

    

종수에게 부여된 '제삼자'의 역할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종수가 제삼자의 범주에서 벗어나 상황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순간은 해미가 실종되고 난 후부터다. 빠르게 휘발되기는 했지만 해미는 <버닝>을 이해하는 필수적인 온갖 메타포로 압축된 캐릭터다. 해미는 종수와 벤의 광기에 불을 붙이며 두 사람의 갈등 구조에 대한 원인을 제공한다. 종수에게 해미는 갈망의 대상이고, 찰나의 순간이고, 창작의 열정이다. 반면, 벤에게 해미는 지루한 일상에 일시적으로 활력과 생기를 불어넣어주는 놀잇감이다. 종수와 벤의 갈등은 해미가 실종된 순간부터 본격화된다. 영화의 초반, 해미는 종수에게 말한다.


"부시맨들에게는 두 종류의 굶주린 자들이 있대.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

리틀 헝거는 그냥 배가 고픈 사람이고 그레이트 헝거는 삶의 의미에 굶주린 사람이래"


 <버닝>은 결국, 종수가 리틀 헝거에서 그레이트 헝거가 되는 과정이고 이미 그레이트 헝거인 벤이 파멸되는 과정이다. 반면, 그레이트 헝거를 꿈꿨던 해미는 아이러니하게도 벤의 굶주림에 희생당한다. 그러나 영화는 해미가 벤에 의해 죽었다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해미는 그냥 연기처럼 사라졌어요"라는 벤의 대사처럼 정황을 통해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벤은 자신보다 무력한 것들을 파괴할 때 느껴지는 쾌락에 굶주려있다. 그래서 해미처럼 열심히 살아도 풍족한 삶을 살 수 없는 젊은 여성들을 끊임없이 찾아내고 파괴한다.

 

당신을 긴장시키고 흥분시키는 베이스는 무엇인가?


 벤은 종수에게 '뼛속까지 울리는 베이스'를 찾으라고 말한다. 베이스에 옳고 그름은 없다. 자신의 본능을 움켜잡고 흥분시키는 원초적인 자연의 도덕만이 존재할 뿐이다. 종수의 뼛속을 울리는 베이스는 해미가 아니었을까 싶다. 종수는 무언가로부터 끊임없이 억눌려있는 존재다. 분노조절장애를 가진 아버지에 대한 트라우마와 책임감/ 자신을 떠란 어머니에 대한 환멸과 동정/ 고용인에 대한 분노가 끊임없이 종수의 심장을 짓누른다. 그런 종수에게 일말의 해방감을 경험하게 한 존재가 해미였다.

 북향이라 집안에 햇빛이 들지 않지만 하루에 딱 한 번, 아주 잠깐 동안 남산타워 유리창에 반사된 빛이 들어오는 것을 볼 수 있다는 해미의 대사처럼 종수의 삶에 해미는 그렇게 아주 잠시 동안만 강렬하게 비친다. 종수는 해미가 사라진 이후부터 미뤄왔던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해미의 마지막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벤을 추적한다. 이때부터 영화는 혼란스러워진다. 무엇이 종수의 현실이고 무엇이 종수의 꿈인지 분간하기가 쉽지 않다. 이전에 해미가 했던 말들조차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알 수 없다.


당신은 무엇에 굶주려 있는가?


 나직하게 떨리는 베이스음 역시 계속해서 울려 퍼진다. 이창동 감독은 거칠게 관객들을 절정으로 몰아붙인다. 마침내 도달한 결말에는 벤의 말처럼 옳고 그름도, 원인도 결과도 없는 종수의 광기만이 남았다. 그 광기는 너무나도 맹목적이고 당연해 보여서 아주 오래전부터 종수와 함께 했던 것처럼 느껴진다. 종수는 처음부터 그레이트 헝거였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광기를 눈치채지 못하고 리틀 헝거로 살았을 뿐이다. 그 간극에서 오는 공허함과 허무함이 지금까지 종수를 무력하게 만들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이러니한 것은 해미가 벤의 굶주림에 희생당한 것처럼 벤 역시, 종수의 굶주림에 희생당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를 지배하는 약육강식의 원리처럼 <버닝>에서 굶주림(=갈망)은 더 큰 굶주림에게 압도당한다. 굶주림이라는 공허함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다. 굶주림은 생존본능이다. 해소되지 않으면 죽는다. 중요한 건, 무엇으로 굶주림을 해소하느냐 하는 것이다. 종수는 해미라는 순간의 행복에 굶주렸으나 종래에는 모든 것을 뒤덮는 복수와 폭력의 광기에 굶주리게 된다. 갈망하는 것이 달라짐으로써 종수도 달라졌다.

 



 <버닝>에서는 이 시대의 절규가 느껴진다. 더 거대한 헝거가 되라고 끊임없이 강요받지만 실상은 눈 앞의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조차 벅찬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또한, 그레이트 헝거가 되고 싶지만 현실적인 조건에 떠밀려 리틀 헝거의 삶을 선택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종수가 그랬고 해미가 그랬다. 그들에게는 매일이 살기 위한 투쟁에 가깝다. 이처럼 <버닝>은 간절함과 절박함을 거쳐 끝내는 비틀려버린 이 시대의 초상을 메타포와 과장된 몸짓으로 표현해낸다.

 그러나 <버닝>은 궁극적으로 '삶에 대한 굶주림을 무엇으로 해소하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해 실체적인 이상향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 어떤 질문에도 뚜렷하게 답을 내리지 않는다. 해답을 찾는 것은 영화관을 나서는 관객의 몫으로 남겨진다. 영화 속에서, 당신의 삶 속에서 무엇을 불태울지는 결국 당신에게 달렸다.  


리뷰 원본: http://www.lunarglobalstar.com/news/articleView.html?idxno=18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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