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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vie Street May 23. 2018

케이크는 거들뿐, <케이크 메이커>

이 영화는 크레페 케이크 같다

(좌)해외 포스터 · (우)국내 포스터

제목: 케이크 메이커(The Cakemaker. 2017 作)

감독: 오피르 라울 그라이저

출연: 사라 애들러(아나트 役), 팀 칼코프(토마스 役), 로이 밀러(오렌 役)

#1시간 48분 #이스라엘 - 독일 합작 #편견 #관습 #민족 #위로


*해당 리뷰는 [브런치 무비 패스]의 지원으로 시사회에 참석하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케이크 메이커>는 '크레페 케이크'같다. 낱개의 주제의식이 겹겹이 쌓여 영화가 된다. 화려한 맛은 아니지만 한층 한층 씹히는 식감과 아련하게 감기는 닷만이 인상적이다. 다만, 주의해야 할 점은 제목에서 풍기는 어감과 달리 시각과 미각을 자극하는 케이크의 향연으로 이뤄진 영화는 아니라는 것이다. 국내 포스터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케이크 메이커>의 배급사인 (주)알토미디어는 주된 영화 홍보 아이템을 '인스타그램에 어울릴법한 예쁜 케이크'로 설정함으로써 관객들이 착각할만한 여지를 남겼다고 할 수 있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케이크 메이커>는 민족, 관습, 편견이라는 포괄적인 주제를 다룬 작품이고 다소 어두침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케이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한 케이크 메이커에 대한 이야기다. 이를 다루는 방식이 다소 '막장드라마'스러워서 어이없고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독일인 제빵사 토마스'가 독일로 출장을 온 '이스라엘인 유부남 오렌'과 불륜을 저지르고 오렌이 사고로 죽자 그의 흔적을 느끼고자 이스라엘에 있는 그의 집 근처를 찾아가 배회하고, 오렌의 부인 '아나트'의 카페에 취직까지 한 것도 모자라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토마스에게 케이크를 만드는 행위는 '자기 치유'보다 '직업적인 습관'에 가깝다


 영화에 몰입할수록 도덕적으로 잘못된 일들이 벌어지고 있음을 직감하게 된다. 그라이저 감독은 이와 같은 설정과 스토리라인을 취함으로써 네 가지의 주제의식을 관객에게 전달한다. 토마스와 오렌이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담담하게 담아냄으로써 '동성애도 사랑의 한 범주'라는 것을 심플하게 표현했고, 독일인인 토마스가 아나트, 오렌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인들과 자연스럽게 동화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민족적 갈등에 함몰되지 말고 사람 그 자체를 바라볼 것'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사족을 달자면, 과거 독일 정부는 세계 2차 대전 당시, 나치스가 600만 명가량의 유대인을 학살하는 범죄를 저지른 바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과 독일은 민족적으로 민감한 관계에 있었으나 독일 정부의 진정성 있는 사죄로 조금씩 화해 국면에 접어들고 있는 상태다. 영화에서 민족적 갈등이 봉합된 채 표현되고,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나치스의 범죄 행위에 대한 독일 정부의 인정과 사과가 뒷받침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일본 정부의 경우, 반성과 사죄의 뜻을 표하지 않음으로써 민족 간 반목을 끊임없이 부추기는 형국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의 오프닝 씬에는 유대교 율법에 따라 만들어진 음식을 뜻하는 코셔와 금요일 해 질 녘부터 토요일 해 질 녘까지 이르는 안식일을 뜻하는 샤밧에 대한 개념이 등장한다. 이러한 전통은 이방인이라고 할 수 있는 토마스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에서 계속해서 살아왔던 아나트에게도 불편하게 느껴진다. 토마스는 제빵을 하는 것조차 수많은 제약을 받는다. 또한, 그라이저 감독은 전통의 신봉자인 아나트의 가족 '모티'의 극단적인 언행에 대해 관객들이 반감을 갖게 함으로써 '형식성에 갇혀 자유를 억압하는 관습에 대한 타당성 여부'를 고민하게 한다.


이스라엘에서 토마스가 보여주는 삶은 관객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그럼에도 영화가 가장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것은 '사랑과 위로'다.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다. 아나트의 카페에서 토마스는 오렌에게 그랬듯 아나트에게 케이크를 만들어주고, 아나트는 감상하고 또 음미한다. 그러나 오렌의 죽음으로 공백이 생긴 두 사람의 마음에 절실하게 필요했던 건 케이크가 아니라 '기댈 수 있는 누군가'였다. 두 사람이 오렌에 대한 그리움을 정사를 통해 사랑으로 메워버리는 순간, 도덕적으로 무언가 굉장히 잘못됐다는 생각과 감독이 이 난제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에 대한  의문점이 동시에 떠오른다.

 모든 사실을 모르고 사랑에 빠진 아나트와 달리, 토마스는 모든 사실을 알고도 아나트와 사랑에 빠진다. 같은 그리움을 공유하고 있다는 동질감 때문이었는지, 측은함이 들어서인지, 정말 우연하게 호감의 감정을 갖게 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확실한 건, 두 사람의 사랑이 아무리 평온해 보여도 보는 관객 입장에서는 불안하고 위태로워 보인다는 것이다. 언젠가 터지고 말 사건이라는 것은 분명하니까. 실제로 오렌과 토마스가 함께 했다는 증거를 아나트가 조금씩 발견하게 되면서 영화에는 긴장감이 점차 고조되기 시작한다.

 스토리에 대한 더 이상의 설명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므로 함구하겠지만 분명한 건, 아나트와 토마스는 서로를 통해 오렌에 대한 그리움을 조금이나마 털어냈다는 거다. 윤리적 측면을 차치하고 평을 해보자면 아나스와 토마스가 사랑에 빠지는 과정은 그라이저 감독이 표현하고 싶었던 '위로의 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리움은 결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무뎌지는 것이기에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리움에 사포질을 할 무언가를 필요로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무언가는 케이크일 수도 있고, 곁에 있는 사람일 수도 있다.


토마스에게 아나트는 무슨 의미였을까


 그라이저 감독은 인물의 얼굴을 찍을 때, 정면이 아닌 측면의 모습을 주로 담는다. 인물이 삶을 정면으로 쳐다보지 못하고 회피하고 있다는 뜻일 수도 있고, (인물을 바라보는 관객인) 우리가 누군가를 바라볼 때 일부분밖에 파악하지 못한다는 뜻일 수도 있다. 나 역시, 토마스를 이해하지 못한다. 관객으로서 토마스의 삶을 모두 지켜봤다고 생각하지만 영화에는 드러나지 않은 토마스의 다른 삶과 모습이 있을 수도 있다. 영화의 엔딩 씬에서 아나트 역시, 토마스의 측면을 바라본다. 이해하려고 해봤지만 결국은 이해하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마냥 어두운 영화는 아니다. 어울리지 않게 소소한 웃음을 짓게 하는 포인트도 존재한다. 또한, 베를린과 예루살렘의 다채로운 풍경은 고유의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케이크도 적은 분량이나마 등장하며 시각적 즐거움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그럼에도 스크린의 온도 자체는 여전히 차가운 편이다. 관객이 영화를 보면서 정말 주목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각하게 하려는 것처럼. 영화라는 매체인 것을 감안해도 스토리 자체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많이 갈릴 수밖에 없는 작품이나 그 주제의식에는 공감할 수밖에 없는 작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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