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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vie Street Aug 10. 2018

왕가위 다시보기 #3: 화양연화

완성될 수 없기에 완성될 수 있었던 그들 인생의 화양연화

화양연화 포스터 [사진 출처: 다음 영화]

제목: 화양연화(In The Mood For Love), 2000作

감독: 왕가위

출연: 양조위(차우 役), 장만옥(수리첸 役)

#1시간 37분 #이형기 #낙화 #미련 #갈망 #포기 #결별  #앙코르와트 


 왕가위 감독의 작품은 '성취될 수 없는 무언가에 대한 강렬한 갈망의 서사'라고 표현할 수 있다. <중경삼림>에서는 통제될 수 없는 인연에 대한 갈망이, <해피 투게더>에서는 함께할 수 없는 연인에 대한 갈망이 필름 위에 서술되지 않았나. 그렇다면 왕가위의 작품 세계에서 갈망은 왜 항상 좌절로 마침표를 찍는가. 어떤 갈망은 마땅히 포기돼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완의 갈망에 대한 포기는 결코 패배자의 표상이 아니다. 떠나야 할 때를 알고 떠나는 이들의 포기에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고 그렇기에 더 아름답다. <화양연화> 속, 차우와 수리첸의 이야기처럼.



 

 <화양연화>는 배우자가 있는 사람을 사랑한 남녀의 이야기다. 뻔하디 뻔한 소재임에도 <화양연화>가 흔한 불륜극으로 분류되지 않는 이유는 이들의 서사가 상투성의 늪에 빠지지 않도록 격정과 도덕 사이에서 능숙하게 완급을 조절한 왕가위 감독의 역량 때문이리라. 한편으로 <화양연화>는 왕가위 감독의 작품 중 가장 섹시한 작품이기도 하다. 요동치는 감정을 억누르고 상대방을 대하는 인물들의 연기는 세련됐고 진한 사운드트랙을 배경으로 정형화되지 않은 시각에서 이들의 감정을 정적으로 담아내는 카메라의 시선은 고혹적이다. 무엇보다 일부가 생략된 슬라이드 쇼처럼 툭툭 끊기는 편집 기법은 이들의 서사를 마치 기억의 파편처럼 느끼게 한다.

 기억의 파편은 1962년 홍콩의 한 아파트에서 시작된다. 차우 부부와 수리첸 부부는 공교롭게도 같은 날 서로의 옆집에 이사를 온다. 두 부부의 이삿짐은 복잡한 인연의 서사를 암시하듯 이사 중 끊임없이 뒤섞인다. 이들 부부는 각자의 배우자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거의 없다. 차우의 부인은 직장일로 항상 밤늦게 집에 돌아오고, 수리첸의 남편은 작은 해외 출장으로 집에 있는 날이 드물다. 왕가위 감독은 두 사람의 배우자를 뒷모습으로만 보여준다. 그들을 바라보는 카메라의 시선은 각자의 배우자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시선을 대변한다. 함께를 약속한 그들이 결혼 생활을 하며 마주한 것은 다름 아닌 소외였다.  

 배우자의 공백을 어쩔 수 없다며 외로움으로 견디는 차우와 수리첸의 모습은 데칼코마니처럼 겹쳐진다. 그러나 그들 사이의 교집합은 지독한 소외감만이 아니었다. 일련의 사건들을 거치며 차우는 아내의 핸드백이 수리첸의 핸드백과 같음을, 수리첸은 남편의 넥타이가 차우의 넥타이와 같음을 알게 된다. 그저 우연이라고 믿고 싶었던 차우는 수리첸을 찾는다. 서로의 증언으로 말미암아 두 사람의 의심은 확신이 된다. 그들이 느낀 외로움의 내막에는 사랑해 마지 않는 배우자의 불륜이 있었다.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냉혹한 사실 앞에 두 사람은 아프기 이전에 혼란스럽다. 그이가 왜 자신에게 마음을 두지 못했는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왕가위 감독은 두 사람의 배우자가 왜 불륜을 저질렀는지, 언제부터 시작됐는지에 대해 함구한다. 그날 함께 아파트로 돌아오며 차우와 수리첸은 상대방의 배우자를 연기하며 자신의 배우자가 어떤 마음으로 이 관계를 시작하게 됐을지 헤아리려 노력한다. 그러나 자신의 처지만 더 비참하게 만들 뿐이었다. 이날을 기점으로 두 사람은 계속해서 만남을 갖기 시작한다. 상대방의 배우자를 연기하며 함께 식사를 하고 통화를 한다. 각자의 배우자가 몇 주일간 집을 비우고 있는 상황에서 일상의 무료함을 달래고, 다친 마음에 심심한 위로라도 받기 위함이었다. 사랑의 감정은 아니었다. 아니, 처음부터 사랑의 감정은 아니었다. 


차우와 리첸, 그들 역시 그들 배우자와 같은 잘못을 범하게 될까? [사진 출처: 다음 영화]


 우리가 겪는 우연은 누군가의 정성과 진심의 결과이기도 하다. 어느 날, 차우의 친구에게 차우가 몸살에 걸렸고 참깨죽을 먹고 싶어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수리첸은 평소 하지 않던 요리를 해 차우에게 죽을 전해준다. 고맙다는 차우에게 수리첸은 자신도 마침 참깨죽이 먹고 싶었을 뿐이었다며 "우연히 통했다"라고 대답한다. 그로부터 며칠 후, 신문사에서 근무하던 차우는 무협 소설을 연재하게 됐다며 평소 무협 소설에 관심이 많았던 수리첸에게 구상에 대한 도움을 청한다. 그는 그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함이라고 말했지만 갑자기 무협 소설을 쓰겠다고 결심한 이유가 비단 그뿐이었을까. 그에게는, 그녀에게는 우연을 가장한 만남이 필요했던 것 아닐까. 


"괜히 무슨 죄라도 지은 사람 같아요"
"우리야 결백해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하죠"   


 차우와 리첸은 스스로가 떳떳하다고 믿는다. 두 사람은 그들의 계속되는 만남은 우연의 결과였고 그로부터 파생되는 친밀한 감정은 우정과 동질감의 언저리에 위치할 뿐이라고 단정 짓는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은 유약하다. 차우의 연락을 받고 수리첸은 그가 소설을 집필하는 작업실이 있는 모텔을 찾아가지만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하기를 반복하며 그의 방에 들어가기를 한참 동안 고민한다. 어쩌면 선을 넘을지도 모른다는 아니, 아주 오래 전부터 선을 넘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계단을 오가는 수리첸의 구두 소리를 통해 고조된다. 차우는 담배를 피며 그런 수리첸을 초조한 표정으로 기다린다. 우연으로 가리기에 두 사람의 마음은 이미 너무 커져버렸다.

 돌아가기를 결심한 표정으로 수리첸이 계단을 내려가는 씬은 중간 과정이 생략된 채, 느닷없이 차우가 "안 올 줄 알았어요"라며 수리첸을 배웅하는 씬으로 전환된다. 두 사람은 죄책감의 영역으로 서로를 끌어들인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자신의 결백을 믿고 있다. 배웅하는 차우에게 수리첸은 "우리는 그들과 다르니까요"라고 대답한다. 수리첸은 무엇이 다르다고 생각하고 싶었던 것일까. 연약한 믿음에 기초한 그들의 확신은 위태롭다. 두 사람은 이제 습관처럼 작업실에서 함께 시간을 보낸다. 소설을 구상하고, 함께 밥을 먹고,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며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한다. 두 사람의 시간은 이제 같이 흐른다. 그들의 마음도. 

 서로에 대한 무의식적인 끌림은 점차 진해졌지만 그것이 배우자에 대한 애정의 소멸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수리첸은 그랬다. 그녀에게는 남편의 불륜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여전히 벅찬 일로 다가왔다. 애초에 절대로 익숙해질 수 없는 일이었다. 이처럼 두 사람의 관계는 상대방에 대한 끌림이라는 인력과 배우자에 대한 애정이라는 척력이 같은 밀도로 유지됨으로써 위태롭게나마 적정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인력과 척력의 균형이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는 순간, 그들의 관계도 끝이다. 그리고 그건 너무도 쉽게 벌어질 수 있는 일이었다. 주어지는 상황과 느껴지는 감정은 항상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기 마련이다. 

  떳떳했지만 은밀하게 이뤄지기를 바랐던 두 사람의 만남은 주변 사람들에게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 된다. 차우의 작업실에서 돌아오는 수리첸은 현관문 앞에서 주인집 부인에게 훈계를 듣는다. 현관문을 닫고 수리첸이 소리 없이 울음을 삼키는 이유는 모멸감 때문이 아니라 자신도 어쩔 수 없는 감정의 진퇴양난 때문이리라. 사랑이라 명명하지 않았을 뿐, 그들이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은 이미 그에 준하는 감정이었다. 변수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타인의 시선에서 봤을 때, 그들 역시 서로의 배우자들처럼 불륜 관계로 보일 수밖에 없음을 비로소 체감한다.  


미뤄온 감정을 인정해야 하는 것은 미뤄왔던 시간에 비례해 자신을 힘들게 한다 [사진 출처: 다음 영화]

"팽에게 연락이 왔는데 싱가폴에 직원이 모자란대요. (돌아오는 날은) 그쪽 상황에 따라서 … "

"왜 갑자기 떠나려 하죠?"

"주위에서 우리 소문이 무성해요"

"우리만 결백하면 되는 것 아녜요?"

"나도 처음엔 당신처럼 생각했죠. 우린 그들과 다르다고. 근데 틀렸소. 당신을 위해서라도 내가 떠나야 해요"

"날 사랑했다는 말인가요?"

"나도 모르게... 처음엔 그런 감정이 아니었소. 하지만 조금씩 바뀌어 갔소.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두 사람이 아파트로 돌아오는 길에 항상 잠시 멈춰서 대화를 하고는 했던 담벼락 앞에서 차우는 수리첸에게 억누르고 억누르다 끝내 비집고 나와 버린 자신의 진심을 이야기한다. 사랑한다는 차우의 고백은 결국, 이별을 고백하는 것이기에 두 사람은 슬프다. 그토록 결백하고 싶었던 그들은 끝내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결백하지 못했다. 차우가 끝까지 그 진심을 숨겼다면 두 사람의 이야기는 다르게 써졌을까. 왕가위 감독은 숱한 미장센을 통해 이미 그들의 결말을 예고했다. 영화에는 유독 시계와 계단이 자주 등장하는데 시계는 한정된 '시간'을 계단은 '시작과 끝'을 의미한다. 시작과 끝이 분명한 한정된 시간. 그날은 두 사람의 마지막 날이었다.

 차우는 수리첸에게 이별 연습을 하자고 제안한다. 서로의 배우자를 연기하던 그들은 이제 자기 자신을 연기한다. 그러나 잘 되지 않는다. 한 번도 소리내 울지 않던 수리첸은 차우의 품 안에서 오열한다. 할 수 있는 것은 서러움에 우는 것뿐이었고, 할 수 있는 것은 괜찮은 척 달래주는 것뿐이었다. 싱가폴으로 떠나기 전, 차우에게는 며칠의 시간이 남았지만 더 이상 수리첸과 만나지 않는다. 영화의 절정은 수리첸이 듣고 있는 라디오 방송에서 일본에 있는 그의 남편이 그녀의 생일을 기념해 신청한 '화양연화'가 나오는 가운데 차우와 수리첸이 자신의 집 벽에 기대 앉아 있는 씬이다. 한없이 가까웠던 그들이었지만 이제는 벽 하나를 두고 한없이 멀어졌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의미하는 화양연화(花樣年華). 함께여서 아름다울 수 있었던 차우와 수리첸의 순간이 이제 끝나려 한다. 떠나기 전, 차우는 수리첸에게 전화를 걸어 티켓이 한 장 더 있다면 자신과 함께 떠날 마음이 있냐고 물어본다. 미련이다. 지나가버린 순간에 대한 부질없는 욕망. 두 사람의 화양연화는 1962년 홍콩의 어느 담벼락 앞에서 이미 끝났다. 미련은 지난 감정에 비례하기에 어쩌면 진정성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은 언제까지나 마음 속에 묻어둘 때의 이야기다. 마음 밖으로 헤집어져 나온 미련은 안쓰러울 뿐이다. 수리첸은 그런 차우의 물음에 침묵으로 답을 한다. 그녀라고 미련이 없었을까.

 시간은 흘러 1966년 홍콩. 아파트를 떠났던 수리첸은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길이었다며 세를 내준 집주인에게 찾아간다. 실없는 대화를 하던 중, 그녀는 무심히 옆집에는 이제 누가 사냐고 물어본다. 그녀의 방문은 오래 전 차우에게 대답했던 것처럼 우연이었을까. 수리첸은 창문으로 차우가 살던 곳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린다. 이번에도 그녀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우는 것뿐이었다. 시간이 흘러 차우도 자신이 살던 곳에 찾아가 옆집에는 이제 누가 사냐고 물어본다. 아이와 엄마 두 명이 산다는 집 주인의 대답. 수리첸이다. 창문 너머로 수리첸이 사는 곳을 바라보는 차우, 미묘한 표정을 짓는다. 그는 수리첸을 본 것일까. 

  영화는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에서 엔딩 크레디트를 내린다. 차우는 앙코르와트를 찾아가 작은 구멍이 패여있는 돌기둥 앞에 서서 수리첸과의 비밀을 속삭인 후, 진흙으로 그 구멍을 메운다. 앙코르와트는 12세기 무렵 캄보디아 역사상 유례없는 전성기를 기록했던 크메르 왕조에 의해 세워졌으나 왕조가 급격하게 몰락의 길을 걸으면서 폐허로 방치된 과거가 있다. 앙코르와트는 크메르 왕조의 화양연화를 상징하는 기념비였던 셈이다. 그 장엄한 기념비 앞에 차우는 자신의 화양연화를 고백한다. 앙코르와트가 그랬듯 아름다웠던 두 사람의 순간 역시 굳건하게 남아있으되 조금씩 빛바래갈 것이다. 왕가위 감독은 그렇게 <화양연화>를 끝맺는다.

 

그는 지나간 날들을 기억한다. 먼지 낀 창틀을 통하여 과거를 볼 수 있겠지만 모든 것이 희미하게만 보였다.

  



 <화양연화>에서는 이형기 시인의 <낙화>라는 시의 정서가 짙게 느껴진다.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차우와 수리첸의 사랑은 성취될 수 없는 아니, 성취돼서는 안되는 감정이었다. 이를 알았던 두 사람은 자신들의 감정이 더 깊어지기 전에 서로의 곁을 떠난다. 그 숱한 미련의 유혹 역시 견뎌내면서. 이처럼 차우와 수리첸의 화양연화는 그토록 갈망하던 것을 놓아줬기에 완성될 수 있었다. 너무도 아팠기에 너무도 아름다웠던 그들 인생의 화양연화였다. 


정식 연재: http://www.lunarglobalstar.com/news/articleView.html?idxno=20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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