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란 감독이 무의식의 세계에서 보여주는 상처와 치유의 미학
제목: 인셉션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
출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코브 役), 마리옹 꼬띠아르(맬 役), 킬리언 머피(피셔 役), 엘렌 페이지(아리아드네 役)
#2시간 27분 #무의식 #프로이트 #라캉 #트라우마 #죄책감 #욕망 #욕구 #타자 #주체 #애도
놀란 감독의 작품은 '천재가 집념에 고집까지 부려가며 기어코 완성시킨 예술 작품'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연출과 서사, 어느 하나도 놓치지 않는다. 엔터테이먼트적인 쾌감을 동기로 갖는 관객과 심층적인 해석을 동기로 갖는 관객 모두를 만족시킨다는 의미다. 놀란 감독만큼 차기작을 기대하게 만드는 감독이 있을까. 영화에는 정답이 없지만 매번 관객을 만족시키는 정답 같은 영화를 선사하는 놀란 감독의 천재성은 관객들로 하여금 작품이 개봉할 때마다 '이번 작품이 그의 작품 중 가장 역작'이라는 생각을 들게 한다. 놀란 감독의 역작은 항상 최신작인 셈이다. <인셉션> 역시, 전작 <다크나이트>의 흥행으로 관객들의 기대치가 수직상승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굴욕 따위 없는 성공을 보여줬다. <다크나이트>가 선과 악의 경계 속에서 정의를 해석하는 과정이었다면, <인셉션>은 현실과 꿈의 경계 속에서 무의식을 철저하게 분해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연출과 서사에 대한 꽉 찬 욕심은 그대로다.
<인셉션>이 영화적 배경으로 차용한 세계에서는 '드림머신'이라는 기계의 힘을 빌려 타인의 꿈속에 침투해 특정 정보를 추출하는 것이 가능하다. 추출은 통상적으로 기업들이 경쟁사의 기밀을 훔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며 주인공 코브는 이 분야에서 최고의 전문가로 통한다. 추출한 정보의 가치가 막대해 그에 따른 보수도 꽤 높은 편이지만 코브의 삶은 비참하기 그지없다. 몇 년 전, 코브는 그의 아내 맬이 그가 자신을 협박했다는 거짓 유서를 남기고 자살해 졸지에 아내 살해 용의자가 됐다. 그는 사랑하는 자식들 필리파와 제임스에게 돌아가지도 못한 채 세계를 방랑 중이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한 기업의 회장 사이토가 찾아와 거절 못할 제안을 한다.
경쟁사의 회장이 임종 직전이므로 경영권을 물려받을 그의 아들인 피셔의 꿈에 침투해 '회사를 여러 개로 쪼개야 한다'는 생각을 심는 것. 이른바 '인셉션'이다. 사이토는 성공한다면 막대한 금액뿐만 아니라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용의자 신세를 벗어나게 해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아무리 타인의 꿈속으로 침투가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하나의 생각(seed)을 심어 현실에서의 행동으로 이끄는 일은 가능성 여부도 장담할 수 없거니와 지금까지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일이기도 하다. 사이토의 제안에 답을 내리지 못하는 코브를 제쳐두고 코브의 동료 아서는 사이토에게 인셉션이 성공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한다.
"코끼리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하면 뭘 생각하게 되죠?"
"코끼리"
"그렇죠 바로 내가 심은 생각이죠. 마음은 생각의 기원을 쫓기 때문에 조작은 불가능해요"
<인셉션>은 한 편의 잘 만들어진 심리학 서적이기도 하다. 욕망, 무의식, 트라우마, 자가 치유 등 다양한 층위의 심리학적 개념들이 영화 전반에 위화감 없이 녹아있다. 위의 대화 역시 마찬가지다. 정신분석학자 맹정현에 따르면 말(기억)은 하나의 장막이어서 충격적인 현실을 감추려고 하면 그 현실의 흔적이 남도록 한다. 잊기 위해 장막을 치는 순간, 쳐진 장막이 되려 잊고자 했던 것을 연상시키는 매개체로 작용될 수 있다는 의미다. 이에 대해 코브가 제시한 해결책은 꿈을 최대한 정교하게 설계하고 가능한 긍정적인 감정을 유도하는 것이었다. 부정적이고 의심스러운 것은 항상 반발 심리를 갖게 하기 때문이다.
코끼리 우화에 대한 우려가 코브의 답변으로 해소됐다면 최종적으로 '꿈에서의 변화가 현실에서의 변화로 이어질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남는다. 이와 관련해 심리학자 로잘린드 카트라이트가 진행한 흥미로운 실험이 있다. 카트라이트는 이혼 후 우울증을 겪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대략 1년에 걸쳐 '꿈에 대한 내용, 기분'과 '이혼 이후의 정서'를 지속적으로 기록하게 했다. 두 항목의 기록지를 종합한 결과, 우울증을 극복한 실험자들의 절반은 배우자들에 대한 부정적인 기억들이 긍정적으로 봉합된 꿈을 꿨으며 우울증을 극복하지 못한 실험자들은 실험이 끝날 때까지 여전히 배우자들에 대한 부정적인 기억이 점철된 꿈을 꾼 것으로 밝혀졌다.
카트라이트의 실험은 꿈의 정서와 현실의 행동이 톱니바퀴처럼 서로 맞물려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인간의 정신세계는 이와 같은 무수한 톱니바퀴로 작동하는 셈이다. 이때, 톱니바퀴가 돌아갈 수 있도록 에너지를 공급하는 연료가 '무의식'이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프로이트는 '꿈은 무의식으로 향하는 왕도'라고 말했다. <인셉션>에서 역시, 꿈의 세계는 놀란 감독이 무의식의 영역을 탐구하기 위해 소모하는 하나의 과정으로써만 존재한다. 무의식은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진정한 우리 자신이다. 현실 속에서 억압당한 경험들은 무의식에 숨었다가 의식이 느슨해지는 꿈 속에서 슬그머니 나타나 억제된 감정을 하소연한다.
인셉션은 이러한 무의식을 조작함으로써 성립된다. 대상의 무의식 일부를 변화시키면 그 변화가 마치 연쇄 작용처럼 꿈을 거쳐 현실에서의 행동 역시 바꿀 수 있다는 원리다. <인셉션>에는 크게 두 종류의 무의식이 등장한다. '죄책감에 시달리는 코브의 무의식'과 '인정 욕구에 시달리는 피셔의 무의식'이다. 놀란 감독은 이들의 무의식을 이제는 하나의 공식이 돼버린 저명한 정신분석학 이론들을 토대로 분석하고 해석한다. '무의식은 어떻게 형성되고 어떻게 우리를 조종하는가?'하는 의문에서 <인셉션>은 비로소 시작된다. <인셉션>은 결국, 이러한 질문에 대한 놀란 감독의 대답인 셈이다.
무의식은 들여달라고 보채고, 되풀이하고, 말 그대로 문을 두드려 부숴버린다 - 심리학자 애니 로저스
사이토가 거절하지 못할 제안을 했음에도 코브가 망설이는 이유는 인셉션이 그가 겪고 있는 모든 불행의 시초이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코브는 과거에 맬에게 인셉션을 한 경험이 있다. 당시 그들은 꿈의 가장 밑바닥인 무의식의 세계 '림보'에 갇혔다. 림보에 갇힌 것을 자각한 코브와 달리, 맬은 림보를 여전히 현실이라 믿고 있었다. 현실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자살과 같이 강력한 충격을 가해 꿈에서 깨는 방법밖에 없다. 그러나 맬이 림보를 현실이라 믿는 상황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맬과 함께 현실로 돌아가기 위해 코브는 맬에게 '이곳은 현실이 아니야'라는 생각을 심어 그녀가 자살을 해 꿈에서 깨도록 설득하고 함께 현실로 돌아온다.
문제는 맬에게 심은 생각이 그녀가 꿈에서 깨어난 후에도 여전히 그녀를 지배했다는 것이다. 무의식으로 다져진 맬의 신념은 확고하다. 그녀는 '자살을 해 빨리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코브의 애원과 간청에도 불구하고 맬은 그들의 결혼기념일에 코브의 앞에서 자살한다. 코브에게 인셉션은 성공했기에 실패했던 잔혹한 과거를 상징한다. 그가 사이토의 제안에 흠칫한 이유는 바로 이러한 트라우마로부터 기인한다. 프로이트는 트라우마를 '자아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에너지, 흥분, 긴장이 나타났을 때 발생하는 충격'이라고 설명했다. 자신의 실수로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을 눈 앞에서 지켜봐야 했던 코브는 죄책감과 공포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코브가 타인의 꿈에 침투할 때마다 어김없이 맬이 그를 찾아오는 것이 그 증거다. 흥미로운 사실은 정신분석학에서는 두려움의 유무를 떠나 이처럼 만남이 성취될 수 없는 존재를 맞닥뜨리는 것도 악몽의 한 측면으로 규정한다는 것이다. <자크 라캉 세미나>에는 이와 관련된 일화가 소개돼있다. 갓난아기가 아버지를 울면서 불렀지만 아버지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아이에게는 당시의 경험이 트라우마로 남아 아버지라는 존재는 '접근이 제한된, 그래서 꿈속에서나 볼 수 있는 대상'으로 각인된다. 이 일화는 이후에는 아버지가 아이에게 다가가도 아이는 곧장 잠이 들어버렸다는 내용으로 결론을 맺는다.
현실에서 극복되지 못하고 무의식의 세계로 유입된 경험이나 생각은 끊임없이 해결되기를 갈망하며 우리의 마음속에 불안을 조장한다. 고통이 신체의 생존 본능에서 비롯되듯, 불안은 정신의 생존 본능에서 비롯된다. 불안을 인지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정신은 머지않아 붕괴될 수밖에 없다. 코브의 무의식으로 만들어진 맬은 끊임없이 그를 찾아와 불안하게 만든다. 맬은 때로는 행복했던 과거의 모습으로 때로는 자살하기 직전의 모습으로 등장하며 코브가 극복하지 못한 그리움, 죄책감, 원망 따위의 감정을 환기시킨다. 맬과의 만남은 코브에게 일종의 악몽으로 작용하지만 동시에 그의 정신 붕괴를 막기 위한 무의식의 '방어 기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맬을 방어 기제로 작동하는 무의식으로만 단정 지어 해석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무의식의 다른 측면을 봐야 한다. 무의식은 타인에게는 드러내고 싶지 않고, 자신에게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욕망의 총체다. 본질적으로 부정적일 수밖에 없는 구성요건이다. 실제로 꿈에서 느껴지는 정서의 80%는 부정적이다. 무의식으로부터 파생된 맬의 존재 역시, 코브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자식들에게 돌아가는 것을 코브가 지향하는 긍정적인 이상향(의식의 세계)이라고 할 때, 맬은 계속해서 코브에게 자신이 속한 세계인 림보에서 그가 청혼할 때 했던 말처럼 영원히 함께하자고 유혹(무의식의 세계)함으로써 코브의 이상향과 대치되는 이상향을 제시한다.
무의식은 발화될 수 없는 우리의 욕망을 대변한다. 그렇기에 맬의 유혹은 결국, 무의식의 세계에서나마 맬과 함께함으로써 그리움과 죄책감을 해소하고자 하는 코브의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심리학자 애니 로저스는 "무의식은 들여보내 달라고 보채고, 되풀이하고, 말 그대로 문을 두드려 부숴버린다"라고 말했다. 무의식은 결코 친절하지 않다. 호시탐탐 우리의 의식을 장악할 기회만을 노린다. 트라우마는 끊임없이 우리를 마주하고 싶지 않은 불편한 진실과 대면하게 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무의식과의 접촉이 증가할 수밖에 없다. 극렬한 트라우마는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코브에게 의식에 영역에 남을지, 무의식의 영역에 남을지 선택을 강요한다.
당신이라면 어디에 머무르겠는가.
크리스토퍼 놀란 다시보기 #1: 인셉션(Part 2)에서 계속됩니다.
정식 연재: http://www.lunarglobalstar.com/news/articleView.html?idxno=214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