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란 감독이 무의식의 세계에서 보여주는 상처와 치유의 미학
사이토의 제안에 대한 코브의 답변을 밝히는데 꽤나 멀리 돌아와버렸다. 결국, 코브는 사이토의 제안을 받아들 인다. 이 지점부터 영화는 급격하게 하이스트 무비(범죄자들이 모여 크게 한 탕 벌이는 과정을 다룬 영화)의 모습을 띤다. 코브는 인셉션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모으기 시작한다. 자칫 밋밋해질 수도 있는 구간이었음에도 놀란 감독은 코브와 아리아드네(꿈 설계자)가 물리 법칙을 무시하고 꿈을 조종하는 씬같이 감각적인 연출을 보여줌으로써 관객들에게 지루할 틈을 내주지 않았다. 어디 그뿐인가. 영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 필요한 주요 개념들을 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다시 한 번 짚고 넘어가 주는 섬세함까지 보여준다.
이제 영화의 초점은 인셉션의 표적인 피셔에게 맞춰지고 놀란 감독의 시선은 피셔의 무의식에서 멈춘다. 놀란 감독은 코브 일행이 피셔의 꿈속에 침투해 그의 무의식을 관철하는 욕망이 무엇인지 철저하게 파헤치도록 판을 짠다. 영화는 이제 시작이다. 피셔의 욕망은 그의 아버지로부터 비롯된다. 피셔의 아버지는 강압적이고 냉정한 성격으로 자신의 기대(회사의 성공적인 경영)에 미치지 못하는 피셔에게 항상 매정하게 굴어왔다. 피셔는 유약하고 정이 많은 성격으로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번번이 실패하며 상처와 좌절을 경험한다. 제시된 정보를 '욕망'이라는 틀에 맞춰 삼단논법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피셔는 아버지로부터 인정과 사랑을 받기를 욕망한다.
2) 아버지는 피셔가 회사를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기를 욕망한다.
3) 따라서, 피셔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회사를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기를 욕망한다.
피셔의 욕망은 라캉에 의해 명확하게 검증된다. 라캉에 따르면 인간은 삶으로부터 '욕망'과 '불행'을 동시에 선고받은 존재다. 욕망은 기본적으로 타자를 전제로 발생한다. 유아기에 우리는 어머니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과정에서 어머니의 욕망이 곧 자신의 욕망이라고 착각하게 됨으로써 본능적으로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게 된다. 또한, 뒤늦게 인지하게 되는 아버지라는 존재는 사회의 질서와 관습의 표상으로서 우리는 아버지와의 관계를 통해 타자와의 관계를 수긍하는 것을 넘어서 타자로 구성된 사회에 자신을 일체화시키는 법을 학습한다. 이처럼 우리는 욕망을 본능을 통해 터득하고, 교육을 통해 학습한다. 그 욕망의 끝에는 항상 타자가 있다.
피셔의 비극은 이와 같은 타자에 대한 욕망의 의존성에 기인한다. 피셔의 무의식은 '제로섬 게임'처럼 작동하는데 '타자로서의 아버지'가 갖는 지분이 증가하면 '주체로서의 피셔'가 갖는 지분은 그만큼 감소하는 꼴이다. 이에 의거해 피셔의 욕망은 절대적으로 아버지의 욕망을 모방하게 된다. 이처럼 주체가 자격을 잃고 타자의 명령에 복종하게 되는 현상을 라캉은 '주체의 소외'라고 명명했다. 주체의 소외가 갖는 문제점은 주체가 주체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괴리감 내지 공허함으로 인해 심리적 불안감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욕망과의 관계에 있어 가장 중요한 건, 주체가 갖는 위상이다.
피셔는 주체로서 실패했기에 만성적인 불안감에 시달린다. 임종에 직면한 아버지의 침상을 지키면서도 피셔는 불안하다. 아버지에게 인정받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의해 형성된 맹목적인 욕망. 피셔는 피셔로서 존재하지 않고 아버지의 욕망에 의해 지탱되는 꼭두각시로서 존재할 뿐이다. 어떤 점에서 욕망은 꿈과 닮았다. 기억을 더듬어보자. 꿈에는 시작과 끝이 없다. 항상 중간지점부터 시작하며 결정적인 지점에서 끊긴다. 욕망 역시 그렇다. 시작된 시점을 인지하지 못한 채 경험하며 끝날 시점으로부터 배제돼있다. 어느 순간부터 강한 확신으로 자리 잡았으나 진정한 자기 확신이 결여된 피셔의 욕망은 공허하다. 피셔의 불안은 자아의 공허를 먹고 자란다.
그러나 타자에 대한 욕망의 의존성은 비단, 주체의 소외만을 비극으로 갖지 않는다. 욕망은 확장성을 매커니즘으로 하는 일종의 자기모순이다. 해소될 수 없음에도 끊임없이 해소되기를 바라며 끊임없이 그 범위를 넓혀간다. 아버지의 사랑과 인정을 갈구하는 피셔의 욕망이 그렇다. 피셔의 욕망은 아버지 즉, 타자의 승인을 통해서만 해소를 경험할 수 있다. 그러나 철학자 레비나스가 전제하듯 타자는 항상 주체가 인식할 수 있는 영역 외부에 존재하기에 결코 이해될 수 없다. 우리는 결코 타자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 피셔가 바라는 사랑과 인정의 표상은 아버지가 생각하는 사랑과 인정의 표상과 다르기에 애당초 해소가 불가능하다는 의미다.
피셔의 욕망은 이처럼 주체와 타자 사이에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간극에 의해 번번이 좌절될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이다. 그리고 좌절은 항상 불행과 동행한다. 놀란 감독은 피셔와 아버지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정확하게 짚어낸다. 피셔의 욕망에 침투한 코브 일당은 피셔가 다음과 같은 트라우마를 갖고 있음을 발견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아버지가) 제게 뭐라고 하신지 알아요? "로버트 아무 말도 말거라"(라고 하셨어요) 그때 저는 겨우 11살이이었어요.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피셔가 욕망한 건 아버지의 따듯한 위로였을 테지만 아버지는 피셔의 욕망과는 다른 모습으로 피셔를 대했다. 동일한 사건을 경험했지만 피셔와 아버지의 감정 표출 방법은 상이했다. 놀란 감독은 주체와 타자 사이에는 감정의 간극 역시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감정의 간극은 결과적으로 소통의 부재로 이어진다. 라캉은 이와 같이 욕망이 좌절될 수밖에 없는 이유들을 통틀어 '구조적 불가능성'이라고 압축해서 표현했다. 욕망의 해소를 가로막는 구조적 불가능성은 피셔의 '아버지에 대한 욕망 해소'를 끊임없이 좌절시킴으로써 피셔의 삶을 불행하게 만들었다. 실망은 항상 욕심에 비례하는 법이니까.
라캉은 '욕망하지 않은 삶은 곧 죽음'이라고 말했다. 생애 주기에 걸쳐 우리는 끊임없이 타자로부터 욕망을 강요받으며 이를 삶의 목표로 치환시킨다. 그러나 어떤 욕망은 우리를 삶의 주체에서 타자로 격하시키고, 인식의 차이로 소통이 좌절됨으로써 우리를 불행하게 만든다. 놀란 감독은 인간이 최초로 마주하는 타자라고 할 수 있는 부모에 대한 욕망을 소재로 삼음으로써 가장 심플한 방식으로 욕망의 본질을 다룬다. 그리고 이토록 복잡하게 얽히고섥힌 피셔의 무의식은 관객들에게 코브 일당이 과연 어떻게 피셔의 욕망을 자극해 인셉션을 성공시킬 것인지 기대하게 한다.
<인셉션>은 영화의 형식을 차용한 '심리 상담'과도 같다. 놀란 감독은 맬에 대한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코브와 아버지에 대한 욕망으로부터 저항하지 못한 피셔, 이 두 내담자의 이야기를 러닝타임 동안 충분히 경청한다. 두 내담자는 사랑했지만 이제는 곁에 없는 타자 때문에 아픔을 호소한다. 너무 아파 지워버리고 싶지만 그런 생각조차 미안하고 또 미안한 그들이다. 무의식까지 뿌리내린 죄책감, 그리움, 원망이 너무 깊은 탓이다. 경청이 끝난 놀란 상담사는 그들에게 '애도'를 제안한다. 그들이 이토록 아픈 이유는 사라져 버린 타자에 대한 정확한 애도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자 대리언 리더에 따르면 애도에는 네 가지 절차가 필요하다.
·대상의 죽음을 상징화함으로써 직접적 경험에서 추상적 관념으로 치환시키는 절차
·대상의 표면적 죽음과 더불어 상징화된 존재로서의 대상의 죽음을 인정해 대상을 두 번 죽이는 절차
·대상에 대한 부재를 내면화함으로써 상실한 애도를 재구성하는 절차
·대상이 생각했던 자신의 모습을 자신의 마음 속에 복원하고 애도함으로써 떠나보내는 절차
프로이트는 애도할 수 없을 때(= 애도가 정확하게 이뤄지지 않았을 때) 대상에 대한 불편한 기억이 반복되는 '반복 강박' 현상 즉, 유령이 찾아온다고 말했다. 코브에게 맬은 자신의 허상으로 덧씌워진 유령이었다. 인셉션 도중 림보에 빠진 피셔를 구출하기 위해 코브는 일행 아리아드네와 함께 과거 맬과 함께했던 림보로 침투한다. 그곳에는 유령의 존재인 맬이 코브를 기다리고 있다. 맬은 코브에게 림보에서 영원히 함께 하자며 그의 죄책감, 그리움을 자극한다. 무의식에서 코브는 여전히 맬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그녀를 상징화하려는 노력조차 할 수 없었다. 코브가 죽음을 인정함으로써 진즉에 사라졌어야 할 맬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이 그 증거다.
모든 감정은 인정함으로써 시작되고 인정함으로써 끝난다. 회피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가식 없이 바라볼 때 비로소 감정의 문제는 해소로 향하는 가시밭길을 열어준다. 코브는 맬이 자신의 무의식으로 빚어진 유령임을, 그래서 그녀를 애도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코브는 맬에게, 아니 자신의 무의식에게 "아내는 진짜가 아니야. 존재하질 않지. (…) 진심으로 당신이 진짜라고 믿고 싶지만 현실에서의 당신 성격과 장단점이 전혀 보이질 않아. 자신을 봐. 당신은 내 진짜 아내의 그림자일 뿐이야"라고 말한다. 코브는 맬이 죽었다는 사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녀가 자신이 느끼는 죄책감과 그리움의 상징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당신이 너무 그립지만 우리 시간은 이제 끝났어. 이젠 당신을 보낼거야. 영원히"
맬의 부재를 인정하고 상징화함으로써 코브는 맬을 두 번 죽였다. 최종적으로 남은 애도의 절차는 맬이 생각했던 자신의 모습들을 기억하고 떠나보내는 것이다. (영화에서 이따금씩 회상 씬으로 반복됐던) 림보에서 벗어나기 위해 맬과 함께 자살을 시도하는 모습, 현실로 돌아와서도 여전히 꿈이라 믿는 그녀를 설득하는 모습들을 코브는 스스로 끊어내야 한다. 이 절차를 감당하고 나면 코브는 더 이상 맬을 볼 수 없다. 그리고 이제는 그 절차들을 감당하는 코브. 자신의 일부이기도 한 맬이 기억하는 자신을 애도함으로써 코브는 이제 맬에 대한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를 용서한다.
맬의 애도에 성공한 코브는 피셔를 림보에서 탈출시킨다. 다시 꿈의 세계로 돌아온 피셔. 영화는 이제 클라이막스로 치닫는다. 코브 일행은 최종적으로 피셔에게 생각을 심는 과정만을 남겨두고 있다. 그들은 '아버지는 사실 나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내가 아버지의 뒤를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고 나의 길을 가기를 바란다'하는 생각을 피셔에게 심고자 한다. 이 작은 변화가 성공하기만 하다면, 피셔는 '자회사들을 통합시켜 시장을 독점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계획과 정반대인 '회사를 조각조각 분산해야 한다'는 계획을 실행하게 될 것이다. 코브 일당은 어떻게 피셔에게 이러한 생각을 삽입시킬까?
피셔의 아버지는 임종 직전, 피셔에게 힘겹게 단 한마디를 뱉고 세상을 떠났다. '실망했다'. 한 평생 아버지에게 애정과 인정을 갈구했으나 마지막 순간까지 피셔는 애정도, 인정도 받지 못했다. 피셔에게는 또 하나의 트라우마로 남을 기억이었다. 코브 일행은 이 기억을 놓치지 않고 기억을 재구성해 꿈속에서 코브가 변경된 당시의 상황을 다시 겪게 만든다(피셔는 자신이 꿈에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했기에 이를 처음 겪는 일이라 인식함). 꿈속에서의 아버지는 현실에서의 매정한 눈빛이 아닌 따스한 눈빛으로 피셔를 바라보며 여전히 실망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결론이 다르다. 자신의 길을 제대로 따라오지 못해서 실망한 것이 아니라 피셔가 스스로 자신의 길을 개척하지 못했기 때문에 실망했다는 것.
아버지는 못다 한 말이 많다는 듯 간절하게 피셔의 손을 그러잡는다. 그리고 힘겹게 바로 옆의 금고를 가리키고 숨을 거둔다. 금고 안에 들어있던 것은 어릴 적 피셔가 아버지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만들었던 바람개비가 있다. 피셔는 눈물을 흘린다. 불화가 클수록 카타르시스가 큰 법이다. 피셔는 아버지에 대한 트라우마를 털어내고 애도를 받아들인다. 피셔에게 아버지의 죽음은 이제 아버지의 욕망에 갇혀있었던 자신의 주체를 해방할 수 있는 시발점으로서 상징화된다. 또한 피셔에게 아버지 자체가 갖는 상징성(=억압) 역시,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소멸됐다.
"아버지는 내가 내 길을 가기를 바랐어요. 아버지 뒤를 따르는 것보다... 그렇게 할 거에요"
애도의 마지막 절차 역시, 순조롭게 이뤄진다. 피셔는 아버지가 바라본 자신의 모습(=무능력, 우유부단함)도 애도하고 극복한다. 자기파괴적인 피셔의 욕망은 이제 주체에게 자리를 내어준다. 앞서 설명했듯 욕망은 필연적으로 타자에 의해서만 형성될 수 있으며, 우리의 삶은 욕망을 매커니즘으로 작동한다. 지극히 타자 의존적이지만 모든 사람이 타자의 꼭두각시로 존재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욕망의 본질을 파악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함으로써 소외된 주체성을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 역시 산재한다. 욕망과 자신의 주종관계는 얼마든지 역전 가능하다. 물론, 피셔와 같이 극적인 역전은 불가능하겠지만.
놀란이 제시한 애도의 방법을 통해 코브와 피셔는 오랜 시간 자신을 억눌러 왔던 죄책감과 부담감으로부터 해방됐다. 놀란 감독이 연출한 한 편의 심리극은 이렇게 막을 내린다. 피셔는 무의식의 요구대로 회사를 분산시키기 위한 실질적인 계획을 구상하고, 코브는 사이토의 제안대로 자식들에게 돌아갈 수 있게 된다.
크리스토퍼 놀란 다시 보기 #1: 인셉션(Part 3)에서 계속됩니다.
정식 연재: http://www.lunarglobalstar.com/news/articleView.html?idxno=214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