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타르>는 클래식 음악계의 천재이자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첫 여성 수석 지휘자 겸 작곡자인 ‘리디아 타르’에 관한 이야기이다. 감독 코드 필드와 배우 케이트 블란쳇에 의해 탄생한 ‘리디아 타르’라는 인물은 예술을 향한 인간의 열정 권력 오만함 명성과 몰락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준다.
158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에도 조금도 긴장감이 흩어지지 않는 이유는 ‘케이트 블란쳇’의 압도적인 연기와 아우라가 주는 효과였다. 이 영화는 ‘케이트 블란쳇’의 ‘케이트 블란쳇’에 의한 ‘케이트 블란쳇’을 위한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인적으로 ‘우디 앨런’의 <블루 재스민>을 보고 그녀를 사랑하게 될 거라 예감했다. 그녀의 뛰어난 연기는 이번 영화 <타르>를 통해 배우로서의 존재감이 이미 절정에 올랐음을 확신케 했다. 그녀의 압도적 연기는 ‘리디아 타르’가 어쩌면 실존한 인물이 아니었을까, 라는 상상력마저 낳게 한다.
어쨌든 영화는 소위 말하는 예술과 예술 세계에 횡횡하는 권력에 관한 이야기이다. 또 예술에 대한 열정과 인간의 다양한 욕망이 결합된 한 예술가의 삶이 그 세계 속에서 어떻게 몰락하는지를 생생히 보여준다.
첫 장면은 자서전 출간을 앞두고 대중 앞에서 인터뷰하는 장면으로 ‘리디아 타르’가 예술에 대한 자신만의 신념을 피력하며 롱테이크로 이어진다. 그녀는 지휘자란 ‘시간을 통제하는 사람’이라고 거듭 강조한다. 현대인에게 시간이란 매우 높은 가치이다. 자신의 손짓 하나에 음악이 시작되고 끝나는 무대 위에서 타인과 음악의 시간을 모두 통제하는 자신이야말로 최고의 권력자임을 시사한다.
또 자신의 필모그라피를 장식할 말러의 교향곡 5번을 완성하기 위한 녹음을 시작한다. 왜 말러 교향곡 5번이었을까? 감독은 말러의 교향곡 5번을 통해 앞으로 펼쳐질 타르의 추락을 암시한다. 말러는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아내 알마를 위해 이 교향곡을 썼으며 이것이 그의 음악 인생에 정점이었다. 그 후 여성 편력을 전전하다 추락한다.
영화는 예술가로서 무대에 선 ‘리디아 타르’의 모습과 생활인으로서의 ‘리디아 타르’의 모습이 교차 반복된다. 타르는 자신이 가진 남성성을 강하게 어필한다. 그 남성성은 무대 위는 물론이거니와 무대 밖의 생활 곳곳에서도 잘 보여진다.
동성애자임을 당당히 밝히고 포지션 역시 남성(아빠)의 위치를 자처하며 파트너의 약을 챙기고 딸의 학교에 가 딸아이를 괴롭히는 아이에게 자신을 그 애의 아빠라고 소개한다. 강의할 때도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만날 때도 언제나 셔츠와 정장 차림의 흐트러짐 없이 당당하고 권위 있는 모습을 줄곧 보여준다.
이 영화에는 세 명의 여성이 등장하는데 한 명은 그녀의 오랜 파트너로 리디아를 사랑한 ‘샤론(니나 호스)’, 두 번째는 리디아의 손과 발이 되어 곁에서 충성을 다한 ‘프란체스카(노에미 메랑)’, 마지막으로 리디아의 호기심과 애정을 이용한 ‘첼리스트 올가’이다.
그리고 한 사람 더. 영화 초반에 잠깐 언급되다가 마지막에 자살했다고 알려지는 옛 단원 ‘크리스타’.(타르와 내연관계였음을 추측하게 한다) 많은 사회적 영역이 그러하듯 권력의 상위층은 남성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 주변을 포위하는 이들은 여성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리디아 타르’가 남성이 아닌 여성이라는 설정은 인간의 권력욕과 명예욕은 남녀를 불문한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이는 더 나아가 인간을 떠나 예술이 순수하게 예술만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예술을 하는 주체인 예술가의 도덕적 인성과 선택이 예술을 더 나은 예술로 이끌어 갈 수 있는 것일까?
감독은 우리에게 질문한다.
예술과 예술가는 분리될 수 있는가?
강의 중 한 남학생은 바흐가 여성 혐오자였고 그 사실이 불편해 바흐의 음악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자 타르는 그 남학생의 시선이 틀렸다는 것을 강조하며 예술과 예술인을 분리해 바라보라고 요구하자 마음이 불쾌해진 남학생은 강의실을 떠난다. 그 강의 영상은 결국 타르를 공격하는 데 사용되고 그녀가 가진 권력은 서서히 몰락해간다.
불면증이 있으며 소리에 예민하고 늘 신경이 곤두서 있는 약을 먹는 예술가.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자신의 권력으로 사람들의 자리와 위치를 마음대로 바꾸어 가며 통제했던 권력자. ‘리디아 타르’의 세계는 음악 안에서는 견고했으나(그마저도 몰락하지만) 일상생활에서 그녀의 음악은 누군가에겐 소음에 불과했다. 옆집 사람은 집을 내놓고 새 주인을 기다리며 음악 소리로 이렇게 시끄러우면 집이 나가지 않는다고 말한다.
예술은 때로는 이런 취급을 받는다.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이 그게 무엇이든 -글이든 그림이든 음악이든- 그것이 때론 누군가에겐 소음이며 쓰레기 취급을 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꺼이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예술가처럼 리디아 타르는 이 사실을 결코 받아들이지 못한다. 더 큰소리로 그들을 조롱한다. 이는 예술가가 가진 마지막 자존심 같은 것이겠지만, 이 힘이 또한 예술을 지속시키는 힘이기도 하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세상은 예술가들에게 친절하지 않다.
영화를 보는 내내 생각했다. 리디아 타르와 같았던 수많은 예술가들의 삶과 그들의 명예와 몰락의 교차를. 리디아 타르가 몰락하게 된 결정적 변곡점의 순간들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오래 잠들어있던 내 안의 질문들을 다시 떠올려본다.
예술가와 예술을 따로 놓고 볼 수 있는가. 예술을 견고하게 완성시키는 것은 예술 자체인가 더불어 겸양 되어야 할 그 예술가의 인성인가. 예술과 오래 동행해온 인류의 수 세기 동안의 이 질문에 이제는 우리 스스로 답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