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조오억 개 중에 딱 3개만 알려드리겠습니다.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오른 작품은 총 8편으로 <미나리>, <더 파더>, <노매드랜드>,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 <프라미싱 영 우먼>, <맹크>, <사운드 오브 메탈>이 있었다. 그중에서 나는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 <프라미싱 영 우먼>, <사운드 오브 메탈>을 제외한 5편을 보았으며, 역대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들을 두고 봤을 때에 올해는 <노매드랜드>가 가장 유력한 작품상 수상 후보라고 확신했다. 예상은 역시나 맞아떨어졌다. 물론 국내에서는 <미나리>의 윤여정 배우가 한국 영화 102년 역사상 최초로 여우조연상을 수상함으로써 어떤 작품이 작품상을 수상했는가가 더 이상 중요치 않아졌으나 플로리앙 젤레 감독의 <더 파더>를 꽤나 열렬히 응원하고 있던 영화팬으로서 나는 아주 오랜만에 브런치에 영화 리뷰이자 추천글을 올리기로 마음을 먹게 되었다.
<더 파더>로 말할 것 같으면 올해 극장 개봉한 영화 중에서는 단연 최고의 작품으로 꼽고 싶다. 나는 '치매'를 소재로 한 영화 중 지금껏 <더 파더>와 같이 전개되거나 비슷하게 표현한 영화를 본 적이 없다. 극의 초반부에 관객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아버지인 '안소니'가 아닌 딸 '앤'의 입장과 감정에 공감한다. 왜냐하면 비슷한 소재의 영화가 대게 그렇듯 우리는 치매를 앓고 있는 환자를 보살피는 가족들의 시선에서 이야기를 따라가는 데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소니가 가진 조각난 기억의 파편들이 장면으로 스크린에 스치는 순간 <더 파더>는 보란듯이 클리셰를 빗겨나간다. 시간이 지날수록 관객들 역시 어떤 기억이 맞는지 혼란스러워진다. 혼란을 틈타 관객들이 감정을 공유하는 대상은 '앤'에게서 '안소니'로 옮겨간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온몸에 전율이 흐른다. 감독은 동명의 연극이었던 <더 파더>를 영화로 각색함으로써 특정 매체가 가질 수 있는 장점을 최대한으로 이끌어 내어 관객들로 하여금 영화적 경험의 신세계를 선사한다.
두 번째 이유는 안소니 홉킨스의 연기력이다. 지난 아카데미 시상식의 남우주연상 수상 당시 <더 파더>의 '안소니' 역으로 후보에 오른 안소니 홉킨스는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는지도 모르고 집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고 한다. 어떻게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연기를 보여주고서는 기대를 전혀 하지 않을 수 있는지 1960년 데뷔해 올해로 연기 경력만 61년인 배우의 여유는 달라도 한참 다르다. 그는 1992년 <양들의 침묵> 이후 생애 두 번째 남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물론, <노매드랜드>의 프랜시스 맥도먼드는 올해가 벌써 세 번째이다.) <더 파더>에서 안소니 홉킨스는 자신만의 고집을 가진 까탈스러운 '노인', 남에게는 쌀쌀맞으면서도 딸들만큼은 끔찍이 생각하는 '아버지', 그리고 엄마 품을 찾아 헤매는 영락없는 '아이'이자 '리틀 대디'로 분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마음속에 어린아이를 하나씩 품고 있다고 한다. 안소니 홉킨스는 치매로 기억을 잃은 노인이 아니라 안소니의 마음속에 있던 어린아이를 연기했을 것이다.
<더 파더>를 내 마음속 오스카 작품상으로 선정한 마지막 이유, 컬러의 사용이다. 영화 속 거의 대부분의 씬들은 하나의 아파트에서 벌어진다. 안소니의 집이거나 앤의 집이거나. 두 집의 구조나 인테리어는 비슷한 듯 다르다. 극 초반부 이야기 전개가 안소니의 집에서 시작될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던 것은 파란색의 가구와 소품들이었다. 안소니 집에서는 많지는 않았지만 눈에 띄었고, 앤의 집으로 옮겨 갔을 때는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그 가짓수가 늘어났다고 느꼈다. 안소니의 집에서는 상당 수의 가구가 크림, 골드, 노랑의 빛을 띄었으나 앤의 집에서는 푸른빛으로 차가운 인상을 주었다. 그리고 안소니가 아파트가 아닌 다른 공간으로 옮겨졌을 때를 되짚어 보면 마침내 주변의 모든 것이 푸른빛을 띄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 않은 것은 속절없이 울창한 창밖의 나무 잎사귀뿐이다. 영어로 '블루(Blue)'는 컬러 자체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슬프거나 우울한 심리적 상태를 나타내기도 한다. 영화의 후반부가 되면 블루 컬러는 손 대기가 무섭게 진행되는 치매처럼 순식간에 공간의 곳곳에 서려있다. <더 파더>는 아카데미 미술상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기도 했으나 안타깝게도 데이빗 핀처 감독의 <맹크>에 밀려 수상하지는 못했다.
치매는 이 생에서 가꿔온 모든 관계와 사랑해온 모든 것들을 무용하게 만들기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슬픈 질환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내 주변의 이야기일 수도 있고 어쩌면 나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장르는 드라마지만 당사자에게는 스릴러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더 파더>는 관객들에게 부모가 자식을 위해, 자식이 부모를 위해 감내하는 희생을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안소니 홉킨스와 올리비아 콜먼을 통해 영화를 가장한 현실을 보여줄 뿐이다. 이동진 영화 평론가는 영화 <그래비티>를 두고 "어떤 영화는 관람이 아니라 체험이 된다."라는 감상평이자 어록을 남겼다. 나는 영화 <더 파더>를 두고 같은 감상평을 남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