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을 막는 뇌물'을 받은 대가는 가혹했다.
나는 H사라는 시스템의 완벽한 부품으로 굳어져갔다.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흘렀고, 나는 어느덧 3년 차 직장인이 되었다.
내 명함에는 여전히 H사의 로고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이 명함 한 장은 사회생활의 만능열쇠와 같았다.
외부 미팅에서든, 명절에 친척들을 만날 때든, 심지어 모르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나는 'H사 현우'였다.
사람들은 내 명함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그 간판의 무게만큼이나 존중받았다.
나는 매달 통장에 찍히는 월급을 '총알'로, 대기업 경력을 '패자부활전 티켓'으로 여기며 합리화했다.
이 간판이 주는 안락함은 강력한 중독성을 지녔고, 나는 그 무게에 눌려 나 자신의 존재감을 서서히 잃어갔다.
하지만 그 안락함의 이면에는 끔찍한 진실이 숨어 있었다.
내 역할은 시스템의 완벽한 부품이었다.
나의 업무는 이미 잘게 쪼개지고 표준화되어, 창의성이나 깊은 사고를 요구하지 않았다.
상부에서 내려온 비합리적인 지시를 의문 없이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것이 내 능력이었다.
나는 더 이상 '문제 해결사 현우'가 아니라, 'H사 자료 복사기'가 되어 있었다.
어느 날, 대학 시절 가장 치열하게 함께 스터디를 했던 동기 지수가 불쑥 연락해 왔다.
지수는 작은 IT 스타트업을 공동 창업하여 제품 개발을 하고 있었다.
지수는 현우와 마찬가지로 지독한 합리주의자였다.
그녀는 비효율적인 프로세스를 보면 참지 못했고, 그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들어 가장 명쾌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을 즐겼다.
대학 시절, 우리는 학교 홈페이지의 복잡하고 비효율적인 수강 신청 시스템을 해킹에 가까운 논리로 분석해 가장 효율적인 '매크로 짜는 법'을 만들어내며 쾌감을 느꼈었다.
그 시절, 지수는 문제의 본질을 단순화시키는 능력이 탁월했다.
그녀는 최근 자신들이 개발한 신규 서비스의 핵심 알고리즘 문제로 고민이 깊다며, 퇴근 후 나에게 조언을 구했다.
우리는 대학 시절 단골이었던 낡은 카페에서 만났다.
지수는 노트북을 펼치고 복잡한 데이터를 보여주며, '비효율의 근원'에 대한 나의 예리한 통찰을 기대했다.
나는 그 데이터를 보는 순간, 한때 이 문제들을 해체하고 재조립하는 데 희열을 느꼈던 나 자신을 떠올렸다.
하지만 곧 깨달았다.
지수의 눈빛은 여전히 문제를 파고드는 열정과 생기가 가득했지만, 나의 눈빛은 H사의 형광등 빛 아래에서 3년간 삭은 무감각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생각과는 다르게 입을 여는 순간, 내 언어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나는 지수의 문제의 본질 대신, '외부 컨설팅을 받아라', '예산을 확보하는 것이 우선이다', '관련 법규를 검토해야 한다'는 회사 내부에서나 통용되는 '처리 절차'만 나열하고 있었다.
지수는 시원한 해결책 대신, 낡고 형식적인 조언만 얻은 채 씁쓸한 표정으로 노트북을 닫았다.
"현우야, 너... 예전에 우리가 밤새 논리 싸움 하던 그 현우가 아닌 것 같아. 네 안의 불꽃이 꺼진 것만 같아." 지수의 말은 비난이 아닌, 실망이 담긴 탄식이었다.
나는 끓어오르는 수치심을 숨기려 애썼다. 지수의 지적은 너무나 정확했기에 더욱 고통스러웠다.
나는 노트북을 덮는 지수를 향해 애써 냉정한 톤을 유지하며 반격했다.
"지수야, 너는 아직도 '불꽃' 같은 감정적인 언어를 쓰는구나. 우린 더 이상 대학생이 아니잖아.
나는 지금 가장 안정적인 논리를 따라가고 있을 뿐이야.
그리고 네가 말하는 '불꽃'도 큰 불꽃, 작은 불꽃이 있어.
대기업에서도 불꽃은 있어. 다만 네가 보는 작은 규모의 열정이 아닐 뿐이지.
나는 내 현실에서 가장 합리적인 길을 가고 있을 뿐이야."
나의 말은 지극히 논리적이었지만, 지수의 눈은 더 이상 나를 보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의 반격은 그녀를 설득하는 데 완전히 실패했지만, 최소한 나 자신에게만큼은 내 선택이 '합리적'이었음을 재차 선언해야 했다.
그날 밤, 나는 거울 속 내 모습을 봤다.
내 눈빛은 텅 비어 있었다.
나는 여전히 H사의 복잡한 내부 문서를 빠르게 처리할 수 있었지만, 정작 이 시스템 밖의 진짜 문제 앞에서는 무능력한 바보가 되어 있었다.
나는 공포를 느꼈다.
그동안 나는 경력을 쌓은 것이 아니라, H사라는 거대한 옷에 나 자신을 맞춰 깎아내고 있었다.
나의 독창적인 사고방식, 문제에 대한 근원적인 호기심, 혁신에 대한 열망 모두가 이 시스템의 규격에 맞게 마비되고 있었다.
주말의 시간마저 나를 옥죄었다.
예전에는 늘 새로운 지식을 탐구하거나 코딩 프로젝트에 매달렸던 나였지만, 지금은 그저 쉬는 것만이 목표였다.
나의 모든 에너지는 비합리적인 회사 시스템을 순응적으로 버텨내는 데 소진되었고, 퇴근 후에는 고작 텔레비전 앞에 앉아 멍하니 시간을 보내는 '무기력한 현우'만 남아 있었다.
나는 나 자신의 '합리주의'가 H사의 '비합리적 관습'에 완전히 포획되어, 바깥세상의 복잡하고 흥미로운 문제들로부터 철저히 격리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나를 짓누르는 것은 더 이상 외부의 억압이 아니라, 내 안에서 곪아가는 '자기 소멸'의 공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