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심한 내적 갈등을 안은 채, 회사에 몇 명 없는 같은 고등학교 출신이자 인사팀의 민 과장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결심했다.
민 과장은 겉으로는 능글맞고 유머러스했지만, 사실은 회사의 냉혹한 시스템과 이직 시장의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인물이었다.
그는 직장 내에서 '정보의 창구' 역할을 하며, 사내 정치와 외부 동향을 파악하는 데 탁월했다.
나는 주저 끝에 사내 메신저를 켰다.
민 과장은 나에게 몇 없는 동문 선배였기에, 공식적인 상사에게 말 못 할 깊은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민 과장님, 점심시간에 잠시 드릴 말씀이 있는데, 1층 라운지에서 잠시 뵐 수 있을까요?' 메신저 창을 보낸 후, 나는 불안함에 휩싸였다.
그 불안감은 내가 품고 있는 가장 어둡고 은밀한 진실, 즉 '이 시스템은 잘못되었고, 나는 여기서 실패하고 있다'는 내면의 목소리를 나 아닌 타인에게 직접 털어놓는다는 사실 자체에서 오는 근원적인 공포였다.
잠시 후, 'ㅇㅋㅇㅋ 아아 마실거지?' 라는 짧고 쿨한 답장이 돌아왔다.
점심시간이 끝난 뒤, 나는 인적이 드문 본사 1층 라운지 구석 테이블로 향했다.
민 과장은 이미 그곳에 앉아 있었고, 그의 노트북 옆에는 초록색 로고가 선명한 투명한 일회용 컵에 담긴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과 그 자신의 텀블러가 놓여 있었다.
캐주얼한 차림의 그는 테이블에 기대 노트북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는 내가 도착하자마자 시선은 노트북에 둔 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내 쪽으로 미는 동작으로 자리를 안내했다.
나는 컵을 받아 들었지만,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시원함이 내 목에 걸린 무거운 응어리를 식혀주지는 못했다.
나는 자리에 앉아, 주말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던 '이대로는 죽을 것 같다'는 절박한 고민, 즉 '시스템이 나를 소멸시킨다'는 공포를 조심스럽게 털어놓았다.
그는 내 이야기가 끝나기를 기다려주었지만, 노트북을 만지작거리는 손길에서 일말의 지루함이 느껴졌다.
내 절박한 고통은 그에게 이미 수없이 들어본 '직장인의 성장통' 클리셰였을 뿐이었다.
그는 자기 텀블러에 담긴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그것을 내려놓고 냉정한 목소리로 조언을 쏟아냈다.
"현우야, 뭘 또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해. 감정에 휩쓸리지 마.
아직 급발진할 때가 아니야." 민 과장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네가 말하는 비합리성? 맞아. 대기업은 비합리적이야. 그런데 밖은 합리적일 것 같아? 밖은 '자본'이라는 더 냉정한 룰에 의해 움직여. 네가 지금 당장 명함 던지고 나가봤자, 외부 시장은 너를 '1~2년 차 대기업 맛본, 성급하고 참을성 없는 애'로밖에 안 봐. 냉정하게 말해서, 어떤 회사든 3년은 채워야 이직 시장에서 '최소 유효 경력'으로 쳐준다. 그 이하는 경력으로도 인정 안 해주는 경우가 태반이야. 네 몸값을 보존하는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해. 3년 채우고 나가."
나는 반박하려다 말을 삼켰다.
"하지만 과장님, 저는 매일 제가 썩어가는 걸 느낍니다. 혁신은 거부되고, 비효율적인 명령만 따르는 동안... 여기서 1년을 더 버티면, H사 간판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하는 바보가 될 것 같습니다."
민 과장은 내 말에 살짝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비웃음은 현우의 이상주의를 향한 경멸이라기보다,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후배에 대한 연민에 가까웠다.
"착각하지 마, 현우야. 나가서 실패하면 그게 진짜 바보가 되는 길이야. 그럼 묻자. 너 지금 통장에 얼마 모아놨어? 월세, 식비, 기타 잡비 떼고, 네가 밖에서 네가 원하는 일을 최소 1년은 아무 소득 없이 버틸 수 있는 비상금은 돼? 네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탈출은 '경제적 자유'가 아니라 '재정적 여유'를 필요로 하는 사치야. 네 이상을 실현하려면 돈이 필요해."
그의 질문은 내 목을 조르는 듯했다.
나는 차마 정확한 금액을 말할 수 없었다.
'월세와 생활비를 내고 나면, 생각보다 남은 돈은 없었다'는 현실이 머릿속을 강타했다.
나는 H사의 정직원이 되었지만, 여전히 '돈을 벌어야 하는 사람'이라는 족쇄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현우야, 명심해. 너처럼 똑똑하고 이상주의적인 애들이 밖에서 실패하는 이유가 뭔지 알아? '계산'이 없어서야.
이 비합리적인 시스템이 주는 안정적인 연봉이 바로 네가 밖에서 싸울 수 있는 '총알'이야.
시스템이 주는 보조금이지. 네 이상을 사수하기 위한 보조금."
민 과장은 냉혹한 현실의 근거를 덧붙였다.
"인사팀에 있으면 그런 케이스를 수없이 봐. 최근 퇴사해서 꿈을 쫓아 스타트업으로 간 차장급 선배도 1년 만에 다시 대기업 이직을 준비 중이야.
밖이 그렇게 이상적이지 않아. 현우야, 너는 그 간판이라도 3년 동안 달고 나가야 외부에서 '경력직'으로 인정받아 뭐라도 해볼 수 있어.
그리고 그 3년 동안 쌓이는 연봉이, 네가 밖에서 실패할 경우 '패자부활전'을 치를 수 있는 유일한 자산이 될 거다."
민 과장의 논리는 경력과 돈, 그리고 실패를 떼어놓지 않았다.
3년이라는 경력의 마지노선은, 곧 내게 '버틸 수 있는 경제적 여유'를 확보하라는 무언의 명령이자, '탈출을 유예하라'는 지극히 합리적인 경고였다.
결국 가장 확실하게 나를 붙잡은 건 이 경력과 연봉이라는 현실의 묶음이었다.
나는 대학 시절 궂은일 가리지 않고 몸 쓰고 머리 써서 벌었던 돈의 가치를 알기에, 이 앉아서 몇백씩 버는 자리를 박차고 나갈 수가 없었다.
매번 월급날, 통장에 찍힌 '세후 급여'를 확인하는 순간, 내 탈출의 욕구는 맥없이 무너졌다.
그 금액은 나를 짓누르는 정신적 압박에 대한 보상금이자, 탈출을 막는 뇌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