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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vingyouth Sep 29. 2019

술래잡기, 숨바꼭질, <마의 계단>에 관한 리뷰

<마의 계단> (1964)

* 한국영상자료원 <마의 계단> 블루레이 출시를 반기며.


사실상(사전상) 같은 놀이인 술래잡기와 숨바꼭질이 각기 다르게 호명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자신의 모습을 들키지 않도록 몸을 숨기는 놀이가 숨바꼭질이라면, 술래잡기란 술래가 숨어있던 아이들을 찾아내는 놀이다. 숨느냐 잡느냐. 어떤 행위에 방점을 두느냐, 그 행위의 주체가 누구냐. 같은 놀이를 두고 이름이 달라지는 이유다. 놀이의 연행자인 술래와 아이들 사이의 팽팽한 대립이 각기 다른 이름으로 놀이를 부르도록 만든다.


이런 맥락에서 이만희 감독의 <마의 계단>(1964)은 술래잡기 영화처럼 또는/그리고 숨바꼭질 영화처럼 보인다. 계획에 방해물이 되는 남진숙을 죽인 현광호는 술래가 된다. 반면, 현광호에 의해 연못에 빠지게 된 남진숙은 결말부에 다시 등장하기 전까지 존재를 숨기고 있는 숨바꼭질 놀이의 연행자다. 현광호는 살인 사건 뒤에도 자신 앞에 환영으로 나타나는 남진숙의 존재를 찾기 위한 술래잡기 놀이를 한다. 단순히 술래잡기/숨박꼭질 놀이처럼 보이던 <마의 계단>은 놀이의 공수가 뒤바뀌게 되는 역전을 거치며 보다 흥미로워진다. 현광호가 술래가 되는 놀이 구도는 자신이 살인자라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범죄 사실을 감춰야 하는 상황과 맞물리면서 새로운 구도로 재편된다. 살인을 실행한 현광호는 범죄 사실로부터 자신을 숨겨야 하고, 우연찮게 살아남은 남진숙은 사실상 살인자인 현광호를 잡기 위해 술래가 된다. 현광호와 남진숙이 숨바꼭질 놀이와 술래잡기 놀이를 동시에 수행하는 기이한 놀이판이 <마의 계단>에서 펼쳐진다.


술래잡기와 숨바꼭질이 교대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공교롭게도 진숙이 연못에 빠졌을 때 죽지 않고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정말 우연인지는 잠깐 유보해두고, 이후 <마의 계단>의 이야기는 미스터리하게 진행된다. 연못으로부터 진작에 떠올라야 할 진숙의 시체가 좀처럼 떠오르지 않다가 얼마 있다 훼손된 시체 하나가 떠오른다. 이 시체가 진숙의 시체로 여겨지고 얼마간 사건이 마무리되듯 보이는데 도중에 병원 시체 창고에 있어야 할 시체 하나가 실종됐다는 이야기가 끼어든다. 살인과 연관된 연못을 불길하게 여기는 현광호는 연못을 매워 병동을 짓자는 계획을 짜고, 연못의 물이 다 빠지고 난 뒤보다 훨씬 뒤인 영화의 막바지에 경찰서에 늙은 남자 한 명이 등장해 자신이 연못에 몰래 버렸던 시체가 물이 빠진 뒤에 가보니 보이지 않았다고 말한다.    


복잡하긴 해도 영화의 클라이막스에 다다르면 이 모든 것의 아다리가 맞아 들어간다. 그러니까 현광호가 죽인 줄로만 알았던 진숙은 연못으로부터 빠져나왔고, 그 연못에는 늙은 남자가 창고로부터 빼낸 시체가 진숙을 대신한 시체로 오인됐고, 그로 인해 물이 빠진 연못의 바닥에는 어떤 시체도 남지 않게 되는 것. <마의 계단>은 엉성하지만(혹은 엉성하기에) 미스터리한 이야기의 비밀을 영화 막바지에 이르러 늙은 남성을 등장시키며 친절하게 폭로한다. 모든 것을 설명해주기에 김이 빠지지만 말이 안 될 정도는 아니다. 다만, 진숙이 연못으로부터 빠져나왔다는 결정적인 설정만큼은 예외다. 이 살아남으로 인해 술래잡기와 숨바꼭질의 공수가 교대되고, 연못과 시체를 둘러싼 미스터리가 진행되고, 흡사 부활과 같은 진숙의 재등장으로 결국 현광호는 계단에서 추락한다. 이를 우연으로 퉁치고 넘어가기에는 너무 결정적이어서 "서사의 흠결"로까지 이야기된다.


그런데 진숙이 연못으로부터 빠져나온 것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인지는 다시 생각해볼 만하다. 이를 재고케 하는 단서는 무표정으로 일관된 진숙의 얼굴만큼이나 존재감 있는 간호장 언니의 의미심장한 얼굴이다. 의미심장한 간호장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된 것은 전적으로 <마의 계단>을 블루레이 화질로 볼 수 있게 된 덕분인데, 그전까지 조악한 화질 때문에 심증 있었던 간호장과 진숙의 공모 관계 선명히 드러나는 간호장의 얼굴, 곧 물증 통해 확인할 수 있게 됐다. 진숙의 유산 사실을 현광호에게 전달하는 간호장의 얼굴에 어린 경멸과, 사고당한 진숙을 간호하면서 그를 향한 연민과 동정을 숨기지 않는 얼굴 등. 간호장의 얼굴과 태도는 진숙과 그가 긴밀하게 연결돼있음을 드러낸다.


간호장과 진숙 간호사가 연결되고 이로써 둘의 연대가 가능해진다면, 진숙이 연못으로부터 빠져나오는 설정은 단지 우연에 불과한 것이 아닐 수 있다. 자신에게 마취제 주사를 놓은 것이 현광호라는 것을 진숙이 알게 된 순간부터 잠에 들기 전까지의 영화가 보여주지 않는 시간 동안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진숙이 위기를 감지하고 간호장에게 이를 알린 것은 아닐까. 그래서 연못에 빠진 진숙을 구조한 것은 간호장이 아닐까. 문제의 수술 시퀀스에 이르는 진숙의 숨바꼭질과 현광호를 잡으려는 복수의 술래잡기 놀이에 간호장 역시 가담하고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숨바꼭질과 술래잡기 놀이에서 존재감을 발하는 주인공인 외과과장 현광호는 사랑보다 자신의 출세를 더 중히 여기는 남성 캐릭터다. 현광호는 병원에서 몰래 사귀어온 간호사 진숙을 버리고, 병원장의 딸 정자와 결혼해 병원장의 집, 그러니까 처갓집으로 입성한다. 병원장의 데릴사위가 됨으로써 현광호는 차기 병원장의 자리를 차지하고자 한다. 남성이 자신의 계급적 욕망을 성취해내기 위해 여자를 버리는 <마의 계단>의 설정은 상투적이다. 이에 더하여 60년대 영화에서 늘 남자 주인공 역할을 맡는 것 같은 김진규라는 마스크 역시도 상투적이다.           


그런데, 이 상투적인 설정과 전형적인 연기자의 출연으로 인해 <마의 계단>은 자못 흥미로운 비교 지점을 만들어내게 된다. 현광호를 연기한 김진규에 주목해보자. 그는 <마의 계단>보다 4년 앞서 만들어진 김기영의 <하녀>(1960)에서 '하녀'가 들어가게 되는 집의 주인이 아니었던가. 성적 욕망과 계급적 욕망으로 착종된 하녀와 얽혀 중산층의 위선을 스스로 드러내던 캐릭터. <마의 계단>에서 김진규는 <하녀>에서 하녀가 지니던 섹슈얼한 욕망과 신분상승의 욕망을 그대로 이어받아 이제 그가 직접 누군가의 집으로 침투하게 된다.          


하녀(女)가 집에 입성했으나 종국에는 그의 욕망 중 무엇도 성취하지 못한 채 죽음으로 영화 <하녀>가 귀결되는 것과 달리 <마의 계단>에서 남성 현광호의 집으로의 입성은 결혼-제도를 통해 손쉽게 이뤄질뿐더러 입성과 동시에 그의 욕망은 단박에 성취된다. 이 지점에서 수상하고 기이한 것은 여자를 버리는 비윤리적인 현광호의 야심이라기보다 현광호의 계급 상승을 돕는 결혼이라는 제도다. 물론 혼인이라는 제도가 사랑하는 연인과의 영원한 결약이라는 식의 낭만성을 띄게 된 것이 오히려 특이한 변화일지도 모른다. 오래도록 그리고 어디서나 혼인은 씨족과 가문의 권력 게임을 위한 계약으로 작용한 적이 더 빈번했으니 말이다.          


현광호의 계급 상승 욕망의 사다리가 되는 (달리 말하자면 '계단'이 되는) 결혼 제도의 수상한 본질을 일찍이 간파하는 이들은 병원 안의 여자 무리, 간호사들이다. 간호사들은 병원장 딸과 현 과장의 관계를 수군거리고, 현 과장이 병원장 딸과 결혼해 병원장의 데릴사위가 됨으로써 차기 병원장이 될 것이라는 현 과장의 시나리오(또는 영화의 시나리오)를 미리 감치 알아챈다. 이들 간호사들은 비단 결혼-제도라는 '계단'을 통해 현 과장이 차기 병원장의 자리를 차지하려 한다는 야심차고 위선적인 계획뿐만 아니라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마의 계단'의 그 마(魔)적인 원인 역시도 일찌감치 밝혀주고 있다.           


"고 꾀쟁이 목수를 갈아버려야 해. 손구락이 얼었는지 못질 하나 못한다니까"          


아무리 고쳐대도 다시금 사고가 반복되는 고장 난 계단은 다분히 미스터리하다. 영화 <마의 계단>의 서스펜스는 수상하게도 계속 고장 나고야 마는 '마의 계단'을 통해 유지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간호사들이 모여 계단이 고장 나는 이유를 자명하게 말해주고 있음에도 김성욱이 이 계단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아무런 설명이 없다"라고 말한 것은 놀랍기 그지없다. [KMDb, 2017.2.17] 그의 글에서, 간호사들의 말을 흘러 넘겨버림으로써, <마의 계단>의 계단은 "영화의 이야기를 미끄러트리는" 더욱 마적인 건축물로 자리매김한다. 비록 간호사들의 말을 짚어내기는 하지만 허문영 역시 간호사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생각은 없다. 오히려 허문영은 사고를 초래한 "목수"를 우연의 간계를 심어놓는 "신"의 모습으로 해석하고, 목수가 초래한 "사고"가 이야기의 진행상 필수적일 수밖에 없는 "잔인한 (오)작동"으로 바라봄으로써 계단을 둘러싼 것들을 더욱 마적인 나아가 초월적인 것으로 격상시키기까지 한다. [블루레이 부록 소책자, 2019.7.4] 간호사들의 말로부터 벗어나 있는 이 둘의 탈속적인 규명은 탈속됐기에 불가사의하게 신비롭고, 신비롭기에 맹목적이다.               


실상 “마의 계단”은 “꾀쟁이” 남성 목수가 제대로 고쳐놓지 않은 계단에 불과하다. 간호사들의 말을 따라 마의 계단을 기능 불구의 계단으로 탈각시킨다면, 마적인 계단에 기대고 있던 영화의 서스펜스는 금세 김 빠지게 되는 것이 사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고장 난 계단은 기능 불구의 목수를 족침으로써 반드시 고쳐져야 할 텐데, 이 당위성은 그럴듯하게 고쳐진 듯 보인 계단에서 추락이라는 사고가 반복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그럴듯하게 고쳐진 듯 보인 계단에서 추락하는 자들이 언제나 여자들이었다는 점 역시도 계단의 보수를 요한다. 영화의 결말에서 현광호 역시 계단에서 추락한다. 그러나 그가 추락하는 그 계단은 정자의 추락으로 이미 부서지고 만 계단이었다. 그런 점에서 현광호의 계단에서의 추락은 계단에서 이뤄졌지만 이전의 추락과는 다른 결을 지닌다.

         

계속 고장 나고야 마는 계단이 풍기는 기이함에 기이함을 한껏 더 발라 계단을 아예 이야기 바깥의 마적인 것으로 만들기보다 이야기 안에서 무고한 폭력을 계속 만들어내는 '계단'의 마귀를 내쫓는 규명이 더 필요한 까닭은 비단 기능 불구인 것이 계단에만 국한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영화의 결말에서 현광호 술래잡기에 성공한 은 진숙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며 숨바꼭질을 멈춰낸다. 그러나 이어지는 그의 말은 그가 수행한 술래잡기와 숨바꼭질 모두가 실패했음을 얼마간 드러낸다. 현광호는 살인을 저질렀지만 진숙이 살아났기에 살인미수범에 그치고 만다. 법-제도 안에서 현광호는 살인범이 결코 될 수 없다. 진숙이 자신의 존재를 숨기는 숨바꼭질을 하면서 동시에 현광호를 향한 복수의 술래잡기를 진행했던 이유는 법-제도가 현광호를 제대로 처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간호사들이 계단의 기능 불구 원인을 자명하게 밝혀주듯, 진숙은 법-제도의 기능 불구적인 한계를 구구절절 읊는다. 이 숨바꼭질이 끝나게 될 때, 진숙은 자신 역시도 현광호를 죽이려던 살인미수범이기에 경찰서로 자진 출두하겠다고 말한다. 황당 무계한 결말이고, 김 빠지는 결말이 아닐 수 없는데 이 말도 안 되는 듯 보이는 결말은 도리어 법-제도의 기능 불구를 직접적으로 겨냥한다.


그나마 법-제도의 한계를 보완할 것처럼 보였던 수사 형사들의 범인잡기 역시도 사실상 간호장의 행위에 빚지고 있다. 연못 웅덩이의 물을 빼내는 작업이 시작되기 전, 연못의 수면 위로 간호장으로 짐작되는 실루엣이 비친다. 그는 연못에 물건 하나를 던지는데 이는 인부로 변장한 형사가 연못 바닥에서 발견하게 되는 진숙의 목걸이다. 현광호와 진숙의 은밀한 관계를 보여주는 이 목걸이는 현광호를 범인으로 몰고 가는 중요한 물증이 된다. 비단 형사들의 결정적인 물증으로 작용하는 것만이 아니라 목걸이는 진숙과 간호장이 연대하고 공모했음을 드러내는 결정적인 물증으로도 작용한다. 즉, 간호장이 진숙의 조력자가 아니라면 이 목걸이를 간호장이 갖고 있을 이유 역시 설명되지 않을뿐더러 이를 웅덩이에 던져 수사가 진행되도록 만들 이유 역시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지지부진한 기능 불구의 수사-제도 역시 현광호에게 복수하기 위한 술래잡기에 기대어 있는 것이다.             


영화 <마의 계단>은 지인의 말을 따라 생각보다 맹랑한 영화다. 분명 미스터리 스릴러 영화처럼 보이지만 막바지에 미스터리한 구석들을 모두 설명해줄뿐더러 진숙을 경찰서로 향하게 하는 황당한 결말로 당혹감을 안긴다. 이에 더하여 꾀쟁이 목수가 계단을 수리하는 것을 마지막 장면에 배치시킴으로써 당혹감에 기묘함을 얹어버린다. <마의 계단>이라는 제목에 충실한 장면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 높아 보이지도 않지만 그보다 더 큰 사고를 만들어 내고, 계속해서 사고가 반복되는 수상한 마의 계단은 매혹적인 건축물이다. 이 계단에 계급성이 아니라 영화 서사를 초월하는 상징성을 부여하는 <마의 계단>에 관한 글들 역시도 이 계단을 더욱 매혹적으로 만든다. 그러나 차라리 규명되어야 할 것은 영화가 정작 보여내지 않는 영역이 아닐까. 즉물적인 계단이 불구적인 것이라면 그것을 마적인 것으로 더욱 치장해내는 것은 계단의 불구적인 기능을 감춰내는 것은 아닌가.


불구적인 계단이 목수 탓이라는 간호사의 자명한 설명, 불구적인 법-제도가 범죄자를 처단할 수 없다는 진숙의 자명한 설명, 불구적인 결혼-제도가 차기 병원장이 되려는 현광호의 야심에 불과하다는 동료 의사들의 자명한 설명. 이만희의 <마의 계단>에서 불구적인 것은 모두 설명이 된다. 미스터리 영화처럼 보이지만 이 영화는 눈을 속이는 기능 불구의 것들을 김 빠지는 설명으로 영화 내에서 모두 축출해낸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보이지 않게 상상되는 영역은 어디에 있는가. 진숙과 간호장의 연대와 공모. <마의 계단>에서 결코 직접적으로 보여주지는 않지만 영화 밖에서 끊임없이 상상해내야 하는 영역은 바로 여기다. 진숙의 귀환을 오롯이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상상력은 영화가 설명해주지 않는다. 그 상상력은 오롯이 영화 밖 현실에 놓인 관객의 몫이기 때문이다. 구태여 <마의 계단>을 '여성영화'로 보고 싶은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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