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계를 소개합니다
한 소년이 있었다.
그 소년의 아버지는 무진에서 공부를 했고, 어머니는 큰집에서 일을 도왔다.
소년은 아버지가 보고 싶었지만 그에게 아버지는 없는 사람과 마찬가지였다.
어머니도 아주 없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없는 사람이었다.
소년은 금단의 장소에 들어갔다.
그것은 큰집 뒤란에 있는 감나무가 있는 장소.
‘감나무가 있는 곳에는 가지도 마라.‘는 큰아버지의 금령을 무시하고 갈 만큼 소년에게 감나무는 매력적인 것이었다.
달고 단 감은 창세기에 나오는 선악과만큼이나 매력적이었다.
소년은 그곳에서 차꼬를 찬 한 남자를 만난다.
그 남자는 큰댁의 머슴이었다.
열병을 심하게 앓은 후, 머슴은 마을에 불을 지르거나 흉기로 사람들을 위협했다.
그는 큰댁의 배려로 버려지지 않고 뒤란 작은 방에서 차꼬를 차고 생활했다.
그를 처음 만난 소년은 알 수 없는 이끌림에 금단의 장소에 계속해서 발을 들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남자는 소년에게 손톱깎이를 달라고 청했다.
소년은 큰아버지 서랍에서 손톱깎이를 꺼내 그 남자에게 전했다.
뒤란의 남자는 마침내 죽었다.
그날도 소년은 감을 주울 생각으로 금단의 장소에 갔고 그의 죽음을 맞이했다.
주위는 피로 흥건했고 피는 그 남자의 오른쪽 손목에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죽은 남자의 손에는 손톱깎이가 있었다.
소년은 손톱깎이를 죽은 남자의 손에서 손톱깎이를 빼앗았다.
소년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큰아버지에게 사실을 고했다.
소년의 고백을 들은 큰아버지는 이상스럽게 관대했고 소년은 혼나지 않았다.
상여가 나가던 날, 큰아버지는 그를 앞장 세웠다.
30대에 접어들고 20대를 바쳐 준비한 것이 꽃을 피웠다.
화려하게 피었다가 봄비에 쓸려 초라하게 바닥에 흩어지는 벚꽃처럼, 20대를 바쳤던 그 꽃은 3년 만에 저물었다.
타고난 기질 때문인지, 환경에 따라 드리 된 것인지.
가장 화려할 때 마음의 병을 얻었다.
우울증을 겪고 이겨내기까지 4년이 걸렸다.
우울증을 겪으며 나를 가장 괴롭힌 것이 있었다.
무기력과 반추.
불면증으로 인해 겨우 잠에 들고 눈을 뜨면 침대에 그대로 누워 있었다.
누운 채로 많은 것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과거의 잘못이 나를 찌르기도 했고 도륙내기도 했다.
나는 침대에서 서서히 자신을 죽이고 있었다.
좋아하던 책마저 그 시절에는 전혀 읽지 못했다.
그 시절이 지나가고 다시 독서를 시작했을 때,
이승우 작가님의 <생의 이면>을 만났다.
우연한 계기로 운명처럼 이 책을 만나게 됐다.
새로운 이야기를 찾는 과정 중에 이승우라는 작가님을 알게 되었다.
유럽 출판계에서는 노벨문학상 후보로 언급되었다고 해서 글을 읽어보고 싶었다.(2008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프랑스 현대문학의 거장 르 클레지오는 이승우 작가님의 열렬한 팬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괴랄한 저 표지가 내 눈에 들어왔다.
생의 이면.
우리가 달의 이면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타인의 생의 이면을 보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다.
작가 이승우와 생의 이면 주인공 박부길의 삶이 교차하며 읽는 독자에게 혼동을 준다.
소설 속 여러 장치를 통해 의도적인 혼동을 줌으로써 이야기에 몰입도를 더한다.
모든 소설은 허구이다. 그러나 진실을 드러내기 위한 허구이다. … 그러나 모든 소설은 결국 자신의 이야기라는 명제를 우리는 또한 기억하고 있다.
작가의 말 중에서
허구와 진실의 경계에서 우리는 흥미를 느끼며 타인의 ‘생의 이면’을 관찰하게 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타인의 생의 이면을 통해 자신의 ‘생의 이면’에 도달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내가 그랬듯, 이 책을 읽은 많은 독자들이 그랬을 것이고, 앞으로 읽을 독자들도 그러할 것이다.
어쩌면 이승우 작가의 깊고 내밀한 철학적 사유와 이를 풀어내는 디테일하고 유려한 문체가 독자를 무장해제시킨 것이 아닌가 싶다.
인간 내면에 대한 성찰.
잔잔한 호수 위에 돌멩이 하나 던져 불러일으키는 큰 파장.
책을 읽다 보면 어딘가 불쾌함을 느끼는 것은 내면을 마주 보게 만드는 힘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내가 바라본 생의 이면은 사랑, 부재, 종교, 미숙성과 성숙, 심연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물론 더 많은 주제들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은 생의 이면에는
이불킥을 할 만큼의 부족하고 찌질한 모습의 나,
수다스럽지만 근엄하고, 사색을 즐기지만 한없이 가벼운 모습의 나.
등등
다양한 모습이 존재할 것이다.
성찰,
우리는 성찰함으로써
부끄럽거나 창피할 수도 있지만 오롯이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좀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다.
남에 의해서 강요받지 않고 진실되고 순수하게 자신을 바라본다면 그 얼마나 멋진 일인가!
현재 이승우 작가는 조선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는 열일곱 권의 장편 소설을 썼고 열다섯 권의 중단편 소설을 썼다.
모든 책을 다 읽어보고 싶다.(생의 이면과 모르는 사람들을 읽고 지상의 노래를 읽고 있는 중이다.)
<이국에서>를 펴냈을 때 한 인터뷰에서 이승우 작가님은
“불만족을 만회하기 위해 다음 작품을 쓴다.”라고 했다.
그의 작품을 재미있게 읽은 나로서는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승우 작가님, 계속 소설에 만족하지 마시고 다음 작품 써주세요!)
힘든 시기를 지나 조금의 여유를 생겼을 때, 다시금 돌아보고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준 이승우 작가님을 처음으로 소개하고 싶었다.
내가 운명같이 이승우 작가님의 초대장을 받은 것처럼,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도 초대장을 건넬 뿐이다.
많은 이들이 함께 이승우 작가의 작품 세계를 즐기고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오길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만난 것도 운명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