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만국 박람회 - 이들의 유산과 의미

by M plus Paris

파리의 에펠탑은 우리에게 너무나 당연한 풍경이지만, 사실 이 거대한 철탑은 20년 뒤 철거될 시한부 운명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랑하는 파리의 명소들은 대부분 사라질 뻔한 위기를 실용적 선택과 국가적 전략으로 정면 돌파하며 살아남은 만국 박람회의 유산들입니다.


저는 오늘 파리의 골격을 만든 박람회(Expositions Universelles)의 흔적을 따라가며, 화려한 풍경 뒤에 숨겨진 사실들과 인문학적 명암을 저의 시각으로 풀어내 보겠습니다.


960px-Vue_panoramique_de_l%27exposition_universelle_de_1900.jpg?type=w3840 Source: Panoramic view of the Exposition Universelle of 1900 via Wikimedia Commons


파리를 바꾼 거대한 축제: 만국 박람회란 무엇인가?


파리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무려 7차례나 박람회를 개최하며 도시의 지도를 새로 그렸습니다. 이는 단순한 전시를 넘어, 전쟁과 정치적 혼란으로 상처 입은 프랑스의 자존심을 '기술과 문명'이라는 도구로 치유하려 했던 국가적 프로젝트였지요.


흥미로운 점은 이 축제가 도시의 외형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흔들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1867년 박람회 당시, 일본이 들고 온 도자기와 판화는 유럽 예술계에 가히 핵폭탄급 충격을 던졌습니다. 특히 상품의 파손을 막기 위해 둘러싸여 있던 포장지, 우키요에(Ukiyo-e) 판화는 마네와 고흐 같은 거장들을 단숨에 매료시켰습니다. 이것이 바로 서구 미술사의 흐름을 완전히 바꿔놓은 자포니즘(Japonisme)의 서막입니다.


Grande-Vague-de-Kanagawa.jpg?type=w3840 Former Collection of Claude Monet (© Fondation Claude Monet, Giverny)


I. 1889년 - 에펠의 집념이 구한 '철의 여인'


이야기는 1889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에펠탑은 계약상 20년 뒤에는 반드시 철거되어야 할 임시 구조물이었습니다. 지성인들의 반발도 거셌지요. 소설가 기 드 모파상은 이 탑을 "파리의 수치"라 비난하며, 역설적이게도 탑이 보이지 않는 유일한 장소인 탑 안의 레스토랑에서 자주 식사를 했다는 일화는 너무나 유명합니다.


하지만 귀스타브 에펠은 탁월한 비즈니스맨이었습니다. 그는 공사비의 80%를 사비로 충당하는 대신 20년간의 운영권(Concession)을 따내는 승부수를 던졌습니다. 단 1년 만에 입장료로 공사비를 회수하며 자신의 능력을 입증했고, 이후 무선 전신 안테나라는 '기술적 가치'를 덧입혀 탑을 영구 보존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RV-188-7.jpg?type=w3840 Source: Construction of the Eiffel Tower (July 1888) by Henri Roger / Roger-Viollet


에펠탑에는 역사적인 자부심도 서려 있습니다. 1940년 나치 점령 당시, 프랑스 저항군은 히틀러가 도착하기 직전 엘리베이터 케이블을 끊어버렸습니다. 60층 높이의 계단을 오를 엄두를 내지 못한 히틀러는 지상에서 탑을 바라보는 것에 만족해야 했죠. "히틀러는 파리를 정복했을지 모르나, 에펠탑은 끝내 정복하지 못했다"라는 문장은 그렇게 파리의 전설이 되었습니다.


Source: Federal Archives of Germany (Bundesarchiv) Adolf Hitler in Paris with Albert Speer and Arno


II. 1900년 - 기차역에서 예술의 전당으로, 오르세 미술관(Musée d'Orsay)


오늘날 우리가 고흐와 모네의 작품을 만나기 위해 찾는 오르세 미술관은 사실 1900년 만국 박람회를 위해 지어진 오르세 역(Gare d'Orsay)이었습니다. 건축가 빅토르 랄루(Victor Laloux)는 박람회 방문객들을 파리의 중심부로 직접 실어 나르기 위해 이 화려한 역사(驛舎)를 설계했습니다.


당시 오르세 역은 세계 최초의 전철화된 역사 중 하나로, 매연으로부터 승객을 보호하기 위해 외관을 고급스러운 석재로 감싸 루브르 궁전과 조화를 이루게 했습니다. 하지만 기차의 길이가 길어지자 짧은 플랫폼을 가진 오르세 역은 쓸모를 잃었고, 1970년대에는 철거 위기에 처해 호텔로 바뀔 뻔하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역사적 가치를 알아본 파리 시민들의 노력으로 1986년 미술관으로 개관하며, '기차역'이라는 산업 유산이 '미술관'이라는 문화적 자산으로 탈바꿈한 가장 성공적인 사례가 되었습니다.


1car_ors_cpa55.jpg?type=w3840 Vintage postcard of Gare d’Orsay via Paris 1900 / L'Art Nouveau


III. 1900년 - 메트로 1호선, 지상의 혼란을 잠재운 지하의 신세계


에펠탑이 도시의 수직적 위상을 세웠다면, 메트로(Métropolitain)는 파리의 이동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꾼 '지하의 혁명'이었습니다. 1900년 박람회를 위해 계획된 메트로 1호선은 단 20개월 만에 완공되어야 하는, 그야말로 불가능에 가까운 도전이었습니다.


당시 파리 시내 곳곳이 파헤쳐 지자 시민들의 항의가 빗발쳤고, 국가와 파리 시 정부 사이의 주도권 싸움으로 공사가 중단될 위기도 여러 번 겪었습니다. 하지만 개통 직후 7개월 동안 무려 1,700만 명을 실어 나르며 메트로는 파리의 필수 혈관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엑토르 기마르(Hector Guimard)가 설계한 아르누보 양식의 입구는 당시 보수 언론으로부터 "벌레(insecte) 같다"라는 혹평을 들으며 파격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식물의 곡선을 닮은 이 철제 구조물은 결국 파리가 하나의 거대한 아르누보 예술 작품임을 선포하는 브랜드 아이덴티티가 되었습니다.


METRO-CHANTIER.jpeg?type=w3840 Construction of the Paris Metro, Rue de Rivoli (c. 1899-1900)


Source: Hector Guimard's Art Nouveau Metro Entrance via lartnouveau.com


IV. 1896-1900 - 외교적 연출의 정점: 알렉상드르 3세 다리와 그랑 팔레


센 강에서 가장 화려한 알렉상드르 3세 다리는 1892년 체결된 '프랑스-러시아 동맹'을 기념하기 위해 지어진 '거대한 외교 광고판'이었습니다. 1896년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가 파리를 방문해 다리의 초석을 직접 놓는 장면은 당시 언론에서 "하루 중 가장 매혹적인 의식"이라 불릴 만큼 압도적이었습니다.


다리 기초석에는 "러시아 황제와 프랑스 대통령이 1900년 박람회를 위한 초석을 함께 놓았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다리가 '동맹의 상징'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다리 양 끝기둥에는 프랑스와 제정 러시아의 문장이 나란히 새겨져 있고, 조각 군에는 슬라브풍과 고전주의 요소가 혼합되어 군사 동맹과 해군 협력을 전 세계에 과시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pont-alexandre-III-1-e1657183957127.jpg?type=w3840 Pont Alexandre III
Pont-Alexandre-III-Exposition-Universelle-e1533754550545.jpg?type=w3840 Pont Alexandre III


이 다리와 연결된 그랑 팔레(Grand Palais) 역시 최근 큰 화두였습니다. 지반이 약해져 최대 15cm 침하가 발생했던 이 건물은 2021년부터 약 4년간의 대규모 리모델링 프로젝트를 거쳤습니다. 4억 6,600만 유로(한화 약 7,000억 원)**라는 천문학적인 비용을 투입해 지반을 보강한 끝에, 2024년 파리 올림픽 펜싱과 태권도 경기장으로 성공적으로 복귀했습니다.


grand-palais-telerama.jpg?type=w3840 Grand Palais Nef verrière rénovation 2024


V. 1878년 - 화려한 전시 이면에 가려진 제국주의의 상흔


우리가 이 눈부신 유산들을 마주할 때 잊지 말아야 할 불편한 진실도 있습니다. 1878년 박람회 당시, 프랑스는 식민지 사람들을 데려와 '빌라주 느그르(Village nègre, 흑인 마을)'라는 이름으로 전시했습니다. 이른바 '인간 동물원'입니다.


당시 프랑스 수상 줄 페리는 "우등한 인종은 열등한 인종을 문명화할 의무가 있다"라는 논리로 제국주의 침탈을 정당화했습니다. 문명화의 사명(Mission civilisatrice)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 아래, 수백만 명의 관람객이 타자의 삶을 구경거리로 소비했습니다.


우등한 인종은 열등한 인종에 대해 권리가 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열등한 인종을 문명 화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ymago_pp0021545_02_rec_72dpi.jpg?type=w3840 Source: Historical depiction of a 'Village Nègre' via Imago Archive & CNRS


나아가 이 사건은 프랑스가 가진 철학적 역설을 극명하게 드러냅니다. 프랑스는 1789년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통해 자유(Liberté), 평등(Égalité), 박애(Fraternité)의 가치를 전 세계에 선포한 나라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의 프랑스는 이런 보편적 가치에서 '타자'를 배제했습니다.


전시된 이들은 추운 파리의 날씨에 적응하지 못해 병들어 죽어가기도 했으며, 죽어서도 인종학적 연구라는 명목 아래 해부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당시의 신문과 잡지는 이들을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존재로 묘사하며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했습니다. 지적인 세련미를 자랑하던 파리지앵들이 이러한 비인도적인 광경 앞에서 어떻게 그토록 무감각할 수 있었는지, 그 역사적 아이러니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무거운 질문을 던집니다.



파리지앵의 시선


오늘 살펴본 파리의 유산들은 단순한 낭만을 넘어 에펠의 비즈니스 감각과 제국주의적 욕망이 촘촘히 얽혀 탄생한 결과물입니다. 특히 만국박람회는 인류 문명의 찬란한 정점인 동시에, 타자의 희생을 발판 삼은 ‘세련된 야만(Barbarie)’을 동시에 보여준 역설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우리가 에펠탑의 우아한 곡선에 감탄하면서도 그 그림자에 가려진 고통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진정한 번영이란 누군가의 희생 위에 세운 위태로운 모래성(Château de sable)이 아니라, 시대의 아픔을 직시하며 인간의 존엄을 향해 나아가는 단단한 걸음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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