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1년 파리 코뮌

근대 최초의 노동자 자치정부, 그 비극적 유산

by M plus Paris

파리의 지붕 위로 눈부시게 빛나는 성심(聖心) 대성당 (Basilique du Sacré-Cœur). 몽마르트르 언덕을 지키는 이 웅장한 성당은 역설적이게도 프랑스 역사상 가장 처절했던 골육상쟁의 기억이 층층이 쌓인 '역사의 상징물'입니다. 154년 전인 1871년 5월, 파리는 꽃향기 대신 피비린내와 연기가 진동하는 거대한 지옥과도 같았습니다. 보불전쟁(Guerre franco-allemande de 1870)의 참패와 나폴레옹 3세(Napoléon III)의 몰락이 불러온 근대 최초의 노동자 자치 정부, 파리 코뮌(La Commune de Paris)이 맞이한 서글픈 종말이었습니다.


General Margueritte fatally wounded at Floing (Battle of Sedan), September 1, 1870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한 지 정확히 82년이 흐른 1871년, 파리에서는 또 다른 혁명의 불꽃이 피어올랐습니다. 제3공화국 임시정부는 베르사유로 피신했고, 성벽 안에 남겨진 시민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무장했습니다. 단순히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넘어, 이들은 직접 민주주의라는 전대미문의 정치적 실험을 감행했습니다. 단 72일간의 짧은 섬광이었지만, 그 유산은 오늘날 파리의 영혼 깊숙이 새겨져 기억되고 있습니다.




I. 몽마르트르의 대포: 빼앗긴 자부심과 혁명의 도화선


이야기는 1871년 3월 18일 새벽, 몽마르트르의 차가운 정적을 깨는 군홧소리와 함께 시작됩니다. 당시 정부 수장 아돌프 티에르(Adolphe Thiers)는 비밀스러운 작전을 지시합니다. 바로 파리 시민군(국민방위군)이 관리하던 대포들을 강제로 회수하려 했던 것이죠.


이 대포들은 1870년 파리 포위전 기간 동안 시민들의 공모(Souscription)를 통해 제작비용의 일부를 충당했던 무기들로, 비록 국가 자산의 성격을 가졌으나 시민들에게는 자신들의 손으로 도시를 지켜내겠다는 자부심의 결정체와도 같았습니다. 정부가 이를 회수하려 한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파리 전역으로 퍼졌고, 잠에서 깬 여인들과 노동자들이 군대를 가로막았습니다. 상부의 발포 명령을 거부하고 오히려 시민과 어깨동무를 한 병사들의 외침. 그날의 함성은 국가 시스템이 마비되었을 때, 시민들이 어떻게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하려 했는지를 보여준 역사의 섬광이었습니다.


코뮌은 단순한 폭동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국가 기구가 멈췄을 때, 시민들이 존엄을 지키기 위해 선택한 직접 민주주의의 처절한 실험이었습니다.


imgb3-003.jpg?type=w3840 © Museum of Living History (Musée de l'Histoire vivante) — Montreuil


II. 오스만의 대로 vs 코뮌의 바리케이드


이 대목에서 우리는 흥미로운 도시 공학적 관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코뮌 발생 직전, 파리는 오스만 남작(Baron Haussmann)에 의해 대대적으로 개조된 상태였습니다. 좁고 구불구불한 중세식 골목을 밀어버리고 사방으로 뻗은 넓은 대로(Grands Boulevards)를 만든 표면적인 이유는 '위생과 미관'이었지만, 본질적인 목적 중 하나는 시위대가 바리케이드를 치지 못하게 하고 군대의 대포가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는 '전략적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코뮌 투사들은 이 '직선의 도시'에서도 저항의 지리학을 찾아냈습니다. 오스만이 설계한 광장과 대로의 교차점에 더욱 견고하고 과학적인 바리케이드를 구축하며 권력의 설계도에 맞섰습니다. 도시를 완벽하게 통제하려 했던 권력의 의도가 오히려 혁명의 요새가 되는 역설이 발생한 셈입니다. 이는 오늘날 비즈니스 전략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아무리 완벽한 하드웨어(시스템)를 구축하더라도, 그 안에서 살아가는 구성원의 역동성(소프트웨어)을 간과하면 시스템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작동할 수 있습니다.


02-Commune-de-Paris-barricade-de-la-Chaussee-Menilmontant-le-18-mars-1871ado.jpg?type=w3840 © Adoc-photos - Barricade at the Chaussée de Ménilmontant


III. '피의 일주일'


코뮌의 종말은 참혹했습니다. 5월 21일부터 28일까지 벌어진 '피의 일주일(Semaine sanglante)' 동안 파리는 불길에 휩싸였습니다. 베르사유 군의 진격에 밀린 코뮌 측은 튈르리 궁전, 시청사 등 구체제의 상징물에 불을 질렀고, 파리의 밤하늘은 붉은 핏빛으로 물들었습니다.


이 혼란의 와중에 베르사유 정부 측은 공포스러운 괴담을 유포했습니다. 여성들이 석유병을 들고 무차별 방화를 저지른다는 소문은 보수적 시민들을 자극하며 코뮌 지지자들에 대한 가혹한 여론을 형성했습니다. 실제 이후 벌어진 군사재판에서 1,000명이 넘는 여성이 심판대에 올랐고, 일부는 방화 혐의로 사형 또는 중형을 선고받기도 했습니다. 공포를 이용해 상대를 비인간화(Dehumanization)하고 여론을 장악하는 기술은 예나 지금이나 가장 잔인한 정치적 도구로 사용됩니다.


XVM65d09cf4-8732-11eb-a141-65771bb5eb8f.jpg?type=w3840 Celestino Sadurní / Leemage via AFP - Execution of Communards in the Luxembourg Garden


IV. 성심 대성당(Basilique du Sacré-Cœur) : 참회와 도덕 질서의 회복


이제 몽마르트르를 지배하는 성심 대성당의 진실을 마주할 차례입니다. 흔히 이 성당이 코뮌의 죄를 씻기 위해 지어졌다고 알려져 있지만, 역사적 사실은 좀 더 입체적입니다. 이 성당을 짓겠다는 '국가적 서원(Vœu national)'은 코뮌이 발발하기 전인 1870년 12월, 보불전쟁의 패배를 참회하고 국가를 구원하기 위해 이미 기획되었습니다.


하지만 1873년 국민의회가 이 건립을 '공공의 이익'으로 의결했을 때, 당시 집권한 보수적인 '도덕 질서(L'Ordre moral)' 정권은 이 성당을 코뮌의 혼란을 잠재우고 가톨릭적 질서를 회복하는 상징물로 적극 활용했습니다. 즉, 성심 대성당은 코뮌 때문에 탄생한 것은 아니나, 코뮌 진압 이후 승리자들의 가치를 공고히 하는 기념비적 역할을 부여받은 셈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성스러운 안식처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패배의 침묵을 강요하는 공간이 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 Shutterstock.com (Selected by Monsieurdefrance.com)


파리지앵의 시선


공동체가 '사회적 합의'를 실종했을 때 지불해야 하는 비용은 참혹합니다. 1871년의 파리는 그 극단적인 대가를 역사에 기록했습니다. 단 72일간 지속된 파리 코뮌(Commune de Paris)은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했지만, 그 과정에서 분출된 정교분리(Laïcité), 아동 노동 금지, 무상 의무 교육과 같은 의제들은 훗날 프랑스 공화주의를 지탱하는 핵심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지점은 갈등 이후의 태도입니다. 갈등의 상처 위에 성심 대성당 같은 화려한 기념비를 세워 비극을 덮는 데만 급급해서는 안 됩니다. 진정한 사회적 진보는 비극의 현장 위에 웅장한 건물을 올리는 행위가 아니라, 그 비극의 원인을 직시하는 고통스러운 성찰을 통해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공존의 규칙'을 설계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오늘날 사회 역시 가치관의 극심한 충돌을 겪고 있습니다. 각자가 외치는 '정의'는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서로를 향하고 있으며, 타협 없는 신념은 때로 공동체 전체를 위협하는 공멸의 불씨가 되기도 합니다.


파리가 갈등의 잿더미 위에서 사회적 합의(Consensus social)를 찾아내기까지 수십 년의 세월이 걸렸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단순한 외침을 넘어 제도권에 안착하려면 긴 호흡의 인내가 필요합니다. 반대 세력을 적으로 규정하기보다 그들을 설득하고 체제 안으로 포용하는 '유연한 리더십'이야말로, 지금 우리 사회가 갈등을 딛고 한 단계 도약하기 위해 반드시 갖춰야 할 시대적 소명이라 생각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파리의 만국 박람회 - 이들의 유산과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