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벽에서 순환도로로, 그리고 계급의 경계로
파리는 세계적인 대도시 중에서도 유독 좁고 폐쇄적인 영토를 고집하는 도시입니다. 실제 파리의 면적은 고작 105km²에 불과합니다. 서울 강남·서초·송파구를 합친 면적인 120km²보다도 좁고, 런던의 15분의 1 수준에 머무르는 규모입니다. G20 경제 중심 도시 가운데 가장 작은 영토를 가진 이 도시는, 1860년 외곽 코뮌들을 병합해 현재의 20구 체제를 확정한 이후 166년 동안 단 1km²도 확장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파리는 살아 숨 쉬는 도시라기보다 정교하게 보존된 박물관에 가까운 구조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 경계를 물리적으로 그어놓은 것이 바로 외곽 순환도로 "페리페리크(Périphérique)"입니다. 페리페리크는 단순한 교통 인프라가 아닙니다. 파리의 안과 밖을 나누고, 안쪽의 질서를 바깥으로부터 지켜내는 현대판 성벽(Rempart)으로 기능합니다.
이야기는 근대 파리의 기틀이 잡히던 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860년, 당시 파리 센강 지사였던 조르주 외젠 오스만(Georges-Eugène Haussmann) 남작의 주도 아래 파리 외곽의 7개 코뮌을 통합하는 대대적인 행정 구역 개편이 단행되었습니다. 나폴레옹 3세의 최종 승인을 거쳐 완성된 이 20구 체제는 오늘날 우리가 아는 파리의 골격이 되었습니다.
오스만은 도로망 설계와 도시 정비를 통해 중세의 미로 같던 파리를 직선의 근대 도시로 탈바꿈시켰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도시의 경계는 오히려 더욱 선명해졌습니다. 아돌프 티에르(Adolphe Thiers) 가 프로이센(Prusse)의 침공에 대비해 구축한 군사 성벽이 도시의 팽창을 가로막는 물리적 한계선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입니다. 이 방어선은 1920년대에 철거되었지만, 그 자리는 이내 아스팔트로 메워졌습니다. 그리고 1973년 조르주 퐁피두(Georges Pompidou) 대통령 재임 시절, 성벽의 흔적 위로 총 연장 35km의 거대한 순환도로가 최종 완공됩니다. 성벽이 사라진 자리에 아스팔트 띠가 들어서며 파리를 외부 세계와 단절시키는 현대적 해자(Douves)가 완성되었습니다.
도로를 경계로 갈라진 자본의 비대칭성은 이제 공포에 가까운 수치로 증명됩니다. 2025년 기준 파리 내부의 평균 주택 가격은 제곱미터당 만 3천 유로(약 2천 210만 원)에 달합니다. (출처: INSEE 2025 통계) 특히 1구에서 7구에 이르는 파리 중심부는 제곱미터당 만 8천 유로(약 3천 60만 원) 이상을 호가하며 일반 서민의 접근을 사실상 원천 차단하고 있습니다.
이 천문학적인 가격은 파리 중심부의 성격 자체를 바꿔놓고 있습니다. 한때 파리지앵들의 일상이 숨 쉬던 유서 깊은 거리들은 이제 거대한 외국 대자본과 일부 특권층, 그리고 에어비앤비(Airbnb)를 찾는 관광객들의 전유물로 변모했습니다. 살아 있는 도시가 아니라, 고소득 특권층과 여행객만을 위한 박제된 공간으로 변질된 것입니다. 정작 이 도시를 실질적으로 지탱하는 평범한 시민들은 살인적인 임대료와 자본의 압박을 견디지 못한 채, 페리페리크 외곽 너머로 하나둘 밀려나고 있습니다.
안 이달고(Anne Hidalgo) 시장의 차량 억제 정책은 중심부의 계급화를 더욱 공고히 합니다. 2024년부터 2톤 이상의 대형 차량(SUV 등)이 1~11구 중심부에 6시간 주차할 경우 108유로, 즉 18만 원이 넘는 비용을 지불해야 합니다. (출처: sortiraparis 2024 보도) 파리 외곽에 거주하며 생계를 위해 도심으로 진입해야 하는 노동 계급에게 이는 거대한 경제적 바리케이드입니다.
파리시는 2026년까지 시내 주차장 2만 개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500곳의 '차 없는 거리'를 조성한다는 목표를 실행 중입니다. SUV 특별 주차 요금 정책은 주민 투표에서 54%의 찬성을 얻어냈으나, 이 투표권은 오직 파리 시내 거주자들에게만 부여되었습니다. 매일 페리페리크를 넘어와 도시를 지탱하는 200만 명의 통근자들에게는 발언권조차 주어지지 않은 역설적인 민주주의입니다.
최근 파리시는 페리페리크를 단순한 고속도로가 아닌 '도시형 대로(Boulevard urbain)'로 전환하겠다는 파격적인 구상을 구체화하고 있습니다. 이는 '녹색 벨트(Ceinture verte)' 프로젝트로 불리며, 도로 일부 차선을 폐쇄하고 그 자리에 7만 그루의 나무를 심어 거대한 선형 공원을 조성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출처: APUR 2024 보고서) 시 당국은 이를 통해 소음과 공해를 줄이고 파리와 외곽을 잇는 녹색 가교를 만들겠다고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이 원대한 계획 뒤에는 실질적인 교통 대책 부재라는 비판이 뒤따릅니다. 매일 120만 대의 차량이 이용하는 혈관을 좁히는 것은 결국 외곽 거주자들의 이동 시간을 박탈하고 그들의 삶을 물리적으로 고립시키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심리적 단절과 75라는 숫자의 무게, 사회학자 크리스토프 기뤼(Christophe Guilluy)가 분석한 '교외 프랑스(La France périphérique)'는 이 현상을 날카롭게 해부합니다. 메트로폴리스의 혜택을 독점하는 엘리트 계급과 그 혜택에서 소외되어 도로 밖으로 밀려난 이들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심리적 강이 흐릅니다. 생드니(Saint-Denis)나 클리시(Clichy)에 거주하는 노동자들에게 대중교통은 완벽한 대안이 되지 못합니다. 무거운 장비를 실어야 하거나 불규칙한 업무 시간을 가진 이들에게 지옥철 환승은 생존을 위협하는 선택지이기 때문입니다. 영화 '라 엔(La Haine, 1995)'에서 묘사된 방리유 청년들의 분노는 이 도로가 단순한 콘크리트 구조물이 아닌, 사회적 증오와 고립의 근원임을 증명합니다.
파리 시장 선거가 포함된 2026년 6월 지방선거는 이러한 배타적 도시 정책에 대한 준엄한 심판대가 될 전망입니다. 라시다 다티(Rachida Dati)를 필두로 한 우파 진영은 "파리는 모두의 도시"라는 구호를 내걸고 세를 결집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생계형 통근자를 위한 1시간 무료 주차와 페리페리크 매일 이용자를 위한 월 50유로의 통합 패스 도입을 핵심 공약으로 내세웠습니다. 우파와 사회당의 구호가 뒤바뀐 것이 아닌가 싶을 만큼, 이달고 시장이 파리를 루이비통 매장이 즐비한 거대한 '명품 박물관'으로 전락시켰다는 이들의 비판은 프랑스 사회의 깊은 계급 갈등을 정확히 관통합니다
처음 파리에 도착했을 때, 나를 가장 당혹스럽게 했던 것은 지도가 말해주지 않는 심리적 거리감이었습니다. 지도상으로는 불과 몇백 미터. 그러나 페리페리크를 건너는 육교 하나가 주는 위압감은 생각보다 훨씬 컸습니다. 17구의 세련된 아파트 단지에서 몇 걸음만 걸어 나오면, 회색빛 도로 너머로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졌습니다. 같은 도시라고 부르기가 민망할 만큼, 분위기도 공기도 달랐습니다.
내가 만난 파리지앵들은 '도로 밖(Au-delà du périph)' 을 언급할 때면 어김없이 말끝을 흐리거나 미묘한 우월감을 내비쳤습니다. 굳이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그 뉘앙스는 충분히 읽혔습니다. 주소지에 찍힌 우편번호 '75' 가 주는 안도감 그것이야말로 이 도로가 만들어낸 가장 견고하고도 잔인한 무형의 자산입니다.
최근 추진되는 그랑 파리(Grand Paris) 프로젝트는 이 경계를 허물고 파리를 광역화하려는 야심 찬 구상입니다. 하지만 도로를 공원으로 바꾸고 제한 속도를 시속 50km로 낮춘다고 해서, 수십 년간 쌓여온 차별의 정서가 하루아침에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밤마다 페리페리크 위를 달리는 수만 대의 전조등은 파리의 경계를 더욱 선명하게 비춥니다. 그것은 빛의 도시가 외면하고 싶은 어두운 그림자이자, 현대 프랑스가 공화국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반드시 허물어야 할 내면의 성벽입니다.
페리페리크는 도로가 아닙니다. 하나의 선언입니다. 어떤 도시가 스스로의 경계를 35km의 아스팔트로 봉인할 때, 그것은 단순한 교통 설계가 아니라 누구를 안에 들이고 누구를 밖에 둘 것인지에 대한 의지의 표현입니다. 시속 50km의 속도 제한도, 18만 원의 주차비도, 나무 7만 그루의 녹색 벨트도 그 본질은 바뀌지 않습니다. 형식이 바뀌었을 뿐, 경계는 여전히 작동하고 있습니다.
철학자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는 도시를 "권리의 공간"이라 불렀습니다. 도시에 산다는 것은 단순히 거주하는 행위가 아니라, 그 공간이 제공하는 삶의 질과 기회에 동등하게 접근할 권리를 갖는다는 의미입니다. 페리페리크는 바로 그 권리가 멈추는 지점입니다.
콘크리트를 걷어낸다고 경계가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경계는 언제나 물질이 아닌 인식 속에 먼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파리가 박물관으로 남을 것인지, 아니면 다시 살아 있는 도시로 돌아올 것인지 그 답은 도시계획의 설계도 위에 있지 않습니다. 도로를 바꾸는 것은 공학의 영역입니다. 그러나 경계를 허무는 것은 언제나 언제나 시민의 몫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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