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먼자들의 도시'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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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먼 자들의 도시'라는 강렬한 제목에서 장님들의 세상에선 외눈박이가 왕이라는 역설적인 격언이 떠올랐다 - 그리고 실제로 왕이 된 자를 보게 된다 -.
인간은 후천적으로 발달하거나 퇴행하기는 하나 기본적으로 일정 범위의 감각을 갖추고 태어난다. 물론 그것도 스스로가 일반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는 일반인의 일반화 오류일지 모르겠지만. 신체의 오감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시각이 마비된 자들의 도시라니, 인류 문명 뿐 아니라 모든 동물들의 삶에 근간을 이루는 시각이 어두워진 세상은 과연 어떤 세상일까.
1.
어느 날 갑자기 눈이 멀어버리는 사람들. 원인불명, 정체불명의 무조건적인 백색의 공포 - 이건 마치 어디에서 어떻게 걸렸는지 모르는 그 전염병 같다 -.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사람들의 혼란 속에서 확실한 사실 한 가지. 눈 먼 자들과 접촉하면 눈이 먼다는 것. 대책이 없는 전염병의 경우 격리만이 우선적인 해답이라는 것을 역사적으로 알고는 있지만, 그 전염병은 잔혹하게도 모두를 덮치며 모든 것을 앗아간다.
격리시키는 자도 격리 당한 자도, 누구하나 한 치 앞을 알 수 없고, 볼 수 없는 백색의 혼돈 속에 눈이 멀지 않은 단 한 명. 물론 본인도 시한부 시각일 거라 자각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에게 남은 유일한 시각은 계속해서 유지되며 보지 못할 것, 보지 않아도 될 것까지 보게 된다 - 이 부분에서는 보아야 될 것을 보지 못하고, 보지 않아야 할 것을 보게 되는 오이디푸스의 슬픈 역설이 떠오른다-.
오이디푸스 일화에서는 단지 그가 본인의 눈을 찌르는 것으로 비극이 마무리되지만, 이 백색의 도시는 그러하지 못했다. 본래부터 시각을 가지지 못한 장님쥐들은 퇴화한 눈으로도 살아낼 수 있는 생존전략을 지니지만, 시각을 잃어버린 인간은 자신의 몸 하나 건사할 수 없는 연약한 동물에 불과하기에, 자연의 위험에 고스란히 노출될 뿐만 아니라 눈 먼 자들끼리 스스로 생존경쟁을 해야 하는 비극의 연속선에 놓이고 만다. 불행히도 그 와중에도 총기로 대표되는 폭력성에 의해 계급은 발생하며, 본능에 충실한 욕구 실현 - 특히 성욕 - 까지 '리바이어던'에서 언급한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이 그대로 실현되고 만다.
극복 불가능해보이는 불행에 절망하고 포기하고 분노하던 인간들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생물체로서의 근원적인 생존욕뿐이다. 잠시 멈추는 순간 모든 것이 그대로 멈춰버리는 설국열차처럼, 어디로 가야할 지 알 수 없지만 한 곳에 머물 수 없다는 것만은 알고 있는 이들에게 남겨진 건 오직 두 개의 눈, 그리고 절대적인 신뢰뿐. 눈 먼 자들에게 있어 유일하게 남은 시각을 가진 자는 마치 홍해를 가르고 지나가는 모세와 같달까.
그리고 혼돈의 카오스를 거쳐 출애굽을 한 끝에 부지불식 간에 닥쳐왔던 백색의 공포는 시작과 같은 말로 걷히게 된다.
2.
최소한의 통찰력을 갖추었을 때 우리는 "눈을 뜬다"라고 표현하기에, 눈을 뜬다라는 것은 단지 시각의 확보에 그치지 않는다. 시각을 갖춘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지극히 당연한 행위일 뿐이라 그 중요함을 모르고 사는 것이 아니었을까. '작은 죽음'이라 불리는 잠에 들고, 깨어나는 행위가 단지 눈을 감고 뜨는 것에 의해 결정되는 데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