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과 감성, 공감과 조화, 품격과 절제, 효율과 디테일, 이 모두가 멋
'멋' 이란 단어는 외국어로 쉽게 번역이 되지 않습니다. 만약 영어 단어로 바꾼다면 다음과 같은 많은 단어들이 생각나는데 딱 들어맞는 말들은 아닌 것 같습니다.
flavor, taste, smartness, dandy, dress up
foppish, charm, grace, sensitive, swag
우리 옛 역사 쪽을 돌이켜보면 '풍류(風流)' 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어떻게 보면 '멋' 의 원류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풍(風)' 에서 알 수 있듯이 풍류는 자연과 연관이 된 개념입니다. 자연과 함께 즐기는 것이 풍류죠. '자연과 더불어 노는 멋' 이라고 해야 할까요? 현재 우리가 통상적으로 아는 '멋' 은 의미가 많이 달라졌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운치(韻致)' 라는 말도 있는데, 이 역시 '운(韻)' 에서 알 수 있듯 문학·예술적인 개념을 기본으로 하여 주로 자연 풍경에 쓰이는 말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을 멋스럽다고 여겼던 것이겠지요. 한편 과거에는 '고움' 은 여성적 아름다움으로, '멋' 은 남성적 아름다움으로 보기도 했습니다만 최근에는 그렇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우리나라 속어에 일본어를 차용해서 쓰는 표현들이 좀 있는데, 이 중에서는 '간지(感じ)' 나 '가오(顔)' 정도가 생각납니다. 하지만 이 역시 완전하게 '멋' 과 동일한 말이라 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콩글리시인 '폼' 에 어울린다고 할까요?
사전에 보면 '멋' 은 '세련되고 아름다움', '고상한 품격이나 운치' 로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설명하기에는 역시 좀 부족해 보입니다. 아래 기술하겠지만 '멋' 의 의미는 그보다는 훨씬 개념이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 참 우리 민족은 '전망대' 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저런 데까지 정자를 지었으니 말이죠. 놀라면 저런 데서 놀아야 제맛?)
* 출처 : Pixabay / KimDaeJeung , 단양 도담삼봉.
이렇게 '멋' 이 외국어로 번역이 잘 되기 어려운 이유는 개념이 굉장히 광범위하기 때문입니다. 일단 '멋' 은 '맛' 에서 파생된 말이라는 설이 정설입니다. 그래서 ①감각, 특히 미각(味) 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특히 여기서 말하는 미각이라는 것은 짠맛, 매운맛처럼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감각이 아니라, 예컨대 예가체프 커피에서 느껴지는 꽃내음 향 같이 씹거나 삼키면서 은은하게 느껴지는 향과 맛에 가깝습니다. (delicate flavor/feeling)
맛은 취향(趣向)하고 연결이 됩니다. 따라서 '멋' 은 ②스스로가 선호하는 것이 됩니다. 좋아하지도 않는데 주변 시선을 의식해서 억지로 하는 것은 '멋' 이 아닙니다. 본인이 좋아하는 걸 해야 '멋' 입니다. (self-preference)
한편으로 이와 같은 미각에 대비하여, '멋' 은 '맛' 에 비해 오히려 ③감성적·정서적인 개념에 가깝다고 봅니다. 외형적인 어떤 조건을 만족해서 '멋있는' 게 아니라, 스스로와 이를 관찰하는 사람의 감성적이거나 정서적인 만족이 있을 때 '멋있다' 고 표현합니다. (sensitive/emotional satisfaction)
단순한 개인 만족에서 끝나지 않고 '멋' 에는 ④공감이라는 개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스로 혼자만 만족하면 '멋있다' 고 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은 아닐지라도 어느 정도의 타인 역시 그 취향에 공감해줄 때 '멋' 이 됩니다. (sympathy)
또 여기에는 ⑤품격이 따라옵니다. 많은 사람이 좋아하더라도 속칭 '저질스러운' 것은 절대 '멋' 이 아닙니다. (dignity/elegance)
⑥다른 사람과 다른 고유하거나 독특함도 필요합니다. 아무리 품격 있고 선호도가 좋다고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다 하고 있는 것은 '멋' 이 아닙니다. 보통의 일반인들과는 구별되는 자기만의 무언가가 '멋' 이 되는 것이죠. (identity)
(* 요즘 인테리어 할 때 이런 '체리 색' 은 거의 안 쓴다고들 하는데 그럼 어떻습니까. 남들 다 하는 대로 따라 하면 절대 '멋' 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제피셜입니다.)
과거 우리나라의 멋의 원류라고 할 수 있는 '풍류', 즉 ⑦자연·주변과의 조화와 ⑧가무(歌舞) 와 같은 놀음의 개념도 포함되어 있다고 봐야 합니다. 지금도 '멋있는 집' 이라고 하면 단순히 건축미 등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 풍광과 조화가 잘된 집을 일컫습니다. 과거 우리 조상들이 풍광이 좋은 곳에 어김없이 정자를 지었던 것도 같은 맥락이죠. (balance with nature or surroundings)
'놀다' 라는 개념도 우리나라에서는 조금 독특합니다. 그냥 일상 중에서 재미를 즐기는 정도의 개념이 아니라, 탈춤이나 판소리에서 '이제부터 한바탕 놀아볼까나' 하는 것처럼 일부러 노는 판을 만들어서 제대로 흔들어보는 그런 느낌의 '놀다' 입니다. 노래방에서 신나는 노래를 틀면 일부러라도 일어나서 흔들어 재끼는 것처럼 말이죠. (enjoy myself)
여기에서 파생되어 '멋' 에는 ⑨의도성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환경 속에서 임기응변으로 잘 살아가는 게 아니라 내가 스스로 계획해서 내 삶을 '멋지게' 디자인하는 것입니다. 내가 '일부러' 계획하고 실행하여 내 인생에 덧칠하는 것이 '멋' 이 됩니다. (on purpose)
자기가 능력이 된다고 무분별하게 막 하면 '멋' 이 아닙니다. 수십 억짜리 슈퍼카 몰고 집에 금으로 도배가 되어 있다고 '멋진' 삶인가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⑩주변과의 조화를 위한 절제와 규범 준수가 '멋' 의 중요한 조건입니다. (moderation/compliance)
여기에서 파생하여 어찌 보면 '멋' 에는 ⑪효율성 개념도 포함돼 있습니다. 하루 저녁에 수십만 원 하는 식사 한다고 '멋스러운' 게 아니라, 내가 가진 범위 안에서 최대한의 만족을 뽑아내는 것이 '멋' 입니다. (efficiency)
마지막으로 '멋' 은 ⑫디테일에 대한 세밀한 관심에서 완성됩니다. '멋스러운' 식사라고 하면 단지 고급스러운 음식을 정갈하게 담아낸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컵이나 수저는 물론 수저받침이나 식탁보 하나하나까지 모두 신경 써서 골라 배치하고, 와인을 따더라도 간결하고 능숙하게 따서 예의를 갖춘 자세로 따르며, 식단과 주변 분위기에 딱 맞는 조명과 음악을 골라 과하지 않게 깔고, 준비한 음식이나 예법 등에 대한 역사적 유래 등을 미리 알아두어 대화의 소재로 꺼내는 등의 세밀한 노력이 더 '멋스러운' 식사를 만듭니다. (close atten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