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로스코를 보기 위해서
4월에 짧은 일정으로 도쿄를 다녀와서 2개월 만에 또 "급" 도쿄를 방문했다.
사실 도쿄의 첫인상은 "교토보다는 감성이 없네..." 였는데, 사실 이건 어떻게 보면 도쿄 "시내의 풍경"에 관한 평이었고(교토는 모든 거리가 고즈넉하고 도시 같은 느낌이 전혀 없이 감성적이니까), 돌아와서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도쿄만큼 "콘텐츠 측면"에서 뛰어난 도시가 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기 시작했다. 술, 미식, 예술, 관광, 쇼핑 등... 일단 대부분 사람들의 관심사 중 하나는 얻어걸릴 수 있을 만큼 다양한 분야에 굉장히 깊고 전문적으로 파고들어서 즐길 수 있는 콘텐츠가 무궁무진한 느낌이랄까. 그래서 도쿄의 매력에 빠진 사람들은 도쿄가 최고라고 하나 싶기도 하다.
(반면 도쿄가 서울과 너무 비슷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 말도 얼핏 이해는 간다. 이런 경우는 그냥 대부분의 관광객들에게 유명한 장소를 "찍먹"하듯 관광하고 온 경우일 거라고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이런 방식으로는 절. 대. 도쿄의 매력을 다 느낄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여튼, 이번 도쿄 여행을 다짐하게 된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이 DIC 가와무라 미술관의 "마크 로스코" 방을 직접 보고 싶어서였다. 도쿄 시내에서 한 시간 좀 넘는 치바현이라는 곳에 위치한 미술관인데, 일본 DIC 페인트 회사가 설립하였고 마크 로스코 외 다수의 유명한 소장품들을 전시하는 미술관이다.
사실 마크 로스코의 이 전시를 보고 싶었던 이유는, 무의식적으로 "마음의 정화"가 필요하다고 절실하게 느껴서였던 것 같다. 이 시기에 다른 사람 때문에 좀 난감한 있었는데, 내가 궁극적으로 피해를 보지는 않아 직후에는 “참 다행이네!”라는 생각이 지배했지만 마치 사고 후유증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정신이 피폐해지는 게 느껴지는 거였다. 뭔가 좀 잠시 혼자만의 시간이 절실히 필요하다 느낀 이때 문득 이 가와무라 미술관의 마크 로스코 방이 떠올랐다.
하지만 직장인인지라, 눈치 안 보고 일정을 막 빼기는 어려워서 여행을 갈지 말지 고민하면서 인터넷으로 온갖 후기들만 찾아보는데, 이 미술관은 안타깝게도 사진촬영이 금지라 후기에서도 이 미술관 작품들의 사진은 볼 수가 없었다. 다만 웹사이트에 아래와 같은 마크 로스코 방의 내부 사진이 게시되어 있는데, 지금은 이 사진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지만 당시에는 이 사진만 봐도 울컥하는 거였다... (역시 사람의 감정상태가 참 중요하긴 하다.) 마크 로스코의 작품들은 특히 사람의 감정을 건드리기로 유명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래 사진을 보기만 해도 알 수 없는 벅찬 감정에 당장 그의 작품 앞에 서서 직접 보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어쨌든, 이렇게 매일 하루종일 생각하는 거 보니 어차피 조만간 가게 될 거 같아 결국 도쿄행 비행기를 끊었다. (게다가 마침 이 시기에 너무나도 보고 싶은 다른 전시들도 시기가 겹쳤고, 살인적인 더위의 여름에는 일본에 절대 가고 싶지 않았기에... 이래저래 도쿄에 가야 할 이유가 많았다…!)
그리고 그렇게 꿈에 그리던 가와무라 미술관에 도착했다. 오픈 시간 거의 직후에 도착해서 친구들로 보이는 일본 어머니들 한 팀만 보였고, 한적하게 이 아름다운 미술관을 구경할 수 있었다. 이제 꽤 많은 작품들을 봤다고 생각했는데(그리고 특히나 일본은 좋아하는 작가들이 겹치는지, 미술관 소장품들 작가가 굉장히 많이 겹친다. 모네, 마네, 르누아르, 고흐 등등.. 인상파들이 특히 많다.) 처음 들어보는 작가들의 눈길을 끄는 작품들이 있어서 좀 새로웠고, 이 외딴 시골(?) 같은 곳에 성처럼 생긴 미술관에서 조용히 미술품들을 보고 있자니 너무나도 신성해지는 기분이었다. 이곳에서 조용히 작품들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한결 환기되었다. 평소와 전혀 다른 세계에 와 있는 기분이었달까.
그리고는 대망의 로스코 방에 들어갔다. 이곳에는 총 7점의 "Seagram Murals"가 걸려있다. 이 작품들이 이 미술관에 오게 된 경위가 좀 독특한데, 원래는 마크 로스코가 커미션을 받아 뉴욕의 Seagram 빌딩의 포시즌스라는 레스토랑을 장식할 용도로 1년 반 정도에 걸쳐 이 작품들 포함 30점 정도를 작업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마크 로스코가 이 레스토랑 오픈 후 직접 방문을 해보고는 그 분위기에 실망하여 본인이 스스로 계약을 깨고 결국 1990년 이 미술관에 7점이 오게 된 것이다. (나머지 중 일부는 영국의 Tate와 미국 몇 군데 미술관에 있다고 한다.)
위 사진이 좀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게, 실제로는 이 방의 조도가 매우 어둡고, 짙은 페인트 냄새 같은 것이 나면서 전반적으로 굉장히 엄숙하고 묵직한 분위기다. 이 방에 걸린 로스코의 작품들도 모두 톤 다운된 짙은 블랙, 레드가 주로 사용된 굉장히 어두운 작품들이다. 일부러 이 작품들에 빠지는 경험을 위해(마치 "이 작품들에 감싸여 있는 느낌을 위해") 사이즈가 작고 코너가 둥근 방에 이 거대한 작품들을 설치했다고 하는데, 정말 그래서인지 이 작은 방에 대비되는 작품들의 압도적인 스케일과 이 방의 그 무거운 공기에 온몸이 잠기는 느낌이었다. 작품 사이의 거리, 조도, 방의 크기 이 모든 것이 작가가 의도한 바를 실현하기 위해 치밀하게 설계되고 구현된 것이었다. 마침 관람객은 나 혼자여서(지키고 있는 직원이 한 명 앉아있긴 하다), 최대한 찬찬히 이 작은 방에서 이 공기와 분위기에 흠뻑 취할 만큼 취하고 나왔다. 사진도 못 남기고 아무것도 남길 수 없는 것이 너무 아쉽지만... 잊지 못할 분위기였다. 정말로.
저번 여행에서도 느꼈지만, 일본 기업들의 미술 컬렉션은 정말 어마, 어마 하다. 거의 유럽 미술관을 방불케 하는 경우도 있는데, 참 일본 사람들... 어떻게 이런 작품들을 다 모은 건지, 솔직히 좀 대단하다. 뿐만 아니라 특별전 같은 경우들도 일본에 오는 작품의 퀄리티는 정말 뛰어나다. 인정할 건 해야지. 아픈 과거가 있긴 하지만... 바로 옆 나라라 그나마 쉽게(?) 이런 작품들을 같이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사실 좀 다행이라고 느껴지긴 하다.
아래는 이 미술관의 정원과 산책길의 풍경들. 너무 평화롭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언젠가 또 방문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