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든 하루라도 젊을 때 습득하자
최근 예전에 접했다가 중도 포기하거나 다 봤지만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다시 본 영화가 두 편이 있다. 그 첫 번째가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시계태엽 오렌지(1971)이고, 두 번째는 메리 헤론 감독의 아메리칸 사이코(2000)이다. (아메리칸 사이코는 나름 유명한 영화인 걸로 알고 있는데, 감독은 이번에 처음 알았으나 너무나도 생소한 분이다- 대충 찾아보니 가장 유명한 필모가 아메리칸 사이코 하나인 듯...?)
사실 본 영화는 기억이 잘 안나도 다시 보지는 않는데 (아직 못 본 영화가 너무나도 많으니), 아메리칸 사이코는 그냥 왠지 다시 보고 싶었달까. 대충 엄청 돈 많은 싸이코 주인공이 나온다는 것 외에 너무 기억이 잘 안나기도 했고. 이 영화들을 지금 보니 영화 외에도 뜬금없이 깨닫는 점들이 있어서 그냥 좀 끄적여 보고 싶었다.
Clockwork Orange (1971) - Stanley Kubrick
이 영화는 내가 고등학교 여름방학 때 무슨 봉사활동 캠프에 갔다가, 거기서 애들이 거실 같은 곳에서 다 같이 이 영화를 보는데 영화 초반부터 너무나도 불쾌함에 자리를 뜨고 결국 끝까지 못 본 기억이 강렬하게 남아있다. 그래도 내심 워낙 거장의 영화이기도 하고, 아이코닉한 영화로 평가되는지라 좀 궁금해서 언젠가는 봐야지...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최근에 유튜브에서 스탠리 큐브릭 감독에 대한 영상을 보고는 다시 생각이 나서 찾아봤다.
영화를 보는데, 주인공이 어느 작가 집에 가서 폭행하는 장면(아마 여기까지 보고 자리를 떴던 것으로 기억한다)까지는 마치 얼마 전에 본 것처럼 너무 생생하고 익숙했다. 아무런 이유 없는 폭력에 상당히 불쾌한데, 그걸 넘기고 계속 보니... 연극 같은 연출과 세련된 시네마토그래피, 주인공의 미친 연기, 여기에 엄청난 시너지를 보여주는 베토벤의 제9교향곡까지 그냥 홀린 듯이 보게 되었다. (이게 나한테는 꽤 의미 있는 점인데, 언젠가부터 나의 "도둑맞은 집중력" 때문인지 영화관이 아닌 곳에서 영화를 보면 중간에 딴짓을 하거나 끊어보는 경우가 상당히 많아졌다. 이제 갈수록 재밌게 느꼈지는 영화가 잘 없어서 이기도 하겠지만).
글로 설명하자니 한계가 있어 아쉽다. 주인공의 표정과 연기, 그리고 60년대에 연출했다고 믿기지 않는 그 세련된 시네마토그래피 모두 직접 봐야 느낄 수 있는데. (하지만 당시에 모방범죄 등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어 상영이 중단된 적이 있었던 것만큼 아마 지금도 이 영화를 보면 초반부터 역겨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꽤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리고 문득 이렇게 폭력적인 장면에 그에 대비되는 신나는 음악이나 고상한 음악이 사용되는 걸 보면 항상 "킹스맨"이 떠오르는데, 역시나 그 이전에 이렇게 훌륭한 영화들이 있었네, 싶다.
어디서 스쳐지나 본 적이 있었는지, 후반부에 나오는 주인공이 눈을 못 감게 장치를 두고 무슨 영상을 계속 보게 하는 장면이 있는데, 최근 넷플릭스 "더 에이트 쇼"에서 이 비슷한 장면을 보고 이 영화가 떠올랐었다. (오마쥬 한 거라고 한다). "더 에이트 쇼"를 다 보고 기분이 상당히 불쾌하고 더러웠는데, 누군가를 정말 따라 할 것 같아서 굳이 이런 콘텐츠를 만들어야 하나 싶기도 했고. 반면에 "시계태엽 오렌지"도 그 당시에는 이런 이슈로 꽤나 논란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래도 나는 이 영화는 다 보고 나서 "더 에이트 쇼"처럼 마냥 기분이 더럽지는 않았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나름 생각해 볼 수 있는 철학적인 메시지가 있는 영화라서 그런 건지. "더 에이트 쇼"처럼 밑도 끝도 없이 온갖 가학만 보여주다가(뭐 나름 인간 본성이 이렇다, 라는걸 보여주려 한 것 같지만 상당히 기분이 더럽다) 결국 k-드라마 결말스럽게 마무리된 게 아니라서 역시 거장의 작품은 다르긴 하네, 싶기도 하고. 최근 본 영화 중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영화인 것 같다.
American Psycho (2000) - Mary Harron
10년도 더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어떤 과장님이 이 영화의 명함씬이 명장면이라며 추천해 주셔서 봤었는데, 내용이 기억이 안 나서 (딱히 보고 싶은 영화도 없었고) 다시 봤다. 좀 놀라운 게, "시계태엽 오렌지"는 이보다도 훨씬 전인 고등학생 때 잠깐 본 건데도 그 장면들이 며칠 전 본 것 마냥 너무나도 익숙했는데 (그만큼 너무 강렬했던 것일까?), 이 영화는 초반부터 그냥 다~ 새로웠다. 분명 당시에 꽤 재밌게 봤던 걸로 기억하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보면서 나 자신도 놀라워서 '과연 이렇게까지 기억이 안나는 영화는 내가 정말 봤다고 할 수 있나?' 싶었다. 결론도 진짜 전혀 예상도 못한 결론이었고... (난 대체 예전에 뭘 본 것인가...?)
마냥 좀 잔인했던(?) 영화로만 기억이 남았는데, 지금 보니 이거 나름 블랙코미디다. 현대사회에서 얼마나 인간이 물욕과 지위에 미쳐 어느 짓까지 할 수 있나 보여주는데, 잔인하면서도 중간중간 그 열등감을 드러내는 어이없는 주인공의 대사나 표정으로 뻘하게 터진다. 무엇보다 주인공이 요즘 사회에 실제로 존재할 것 같은 인물들의 복합체인 것 같아 현대사회의 신랄한 풍자로서 (만약 그게 정말 의도한 바가 맞다면) 그 기능이 더 효과적이었던 것 같다. 그나저나 젊은 날의 크리스챤 베일은 허영심에 가득 찬, 월가에 종사하는 상류층으로 외모도 찰떡이지만 첫 주연 영화라는데 연기도 정말 기가 막히다.
하여튼, 이 영화를 20대 때 봤으니 사실 그렇게 늙은(?) 나이에 본 것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영화를 처음 보는 느낌으로 보다니 나름 좀 충격이었다. "나"의 문제인 건지, 다른 사람들도 나 정도로 10년도 더 전에 본 영화를 이렇게까지 기억을 못 하는 경우가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어쨌든 (적어도 나로서는) 지금 하루라도 젊을 때 뭘 더 많이 봐두고 습득해야겠다-라는 생각을 동시에 계속했다. 그리고 무려 24년 전 영환데도 패트릭은 지금도 효과적일 뷰티(!) 루틴을 매우 religiously 실천한다. (꽤나 자세하게 설명해 주니 궁금하신 남성분은 영화 초반이라도 한번 보시길~) 저렇게 생긴 사람도 저렇게 노력하는데...^^;; 이 영화 하나 보고 앞으로 이 긴 인생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깨달음이 많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