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곳에서 더 선명하게 다가오는 깨우침들
작년-올해 총 4번 일본으로 혼자 여행을 다녀오면서 "나"에 대해서 느꼈던 점들이 있다. (고작 일본 갔다 온 거로 뭐 거창하게 "여행" 갔다 온 거냐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을 텐데, 그래도 나는 나름 우리나라에서 볼 수 없는 것들을 보고 경험하러 나름 빡센 일정으로 다녀오는 것이니 여행이라고 치겠다.)
지극히 개인적인 깨달음이라, 아마도 보편적으로 적용될 것들은 아닐 것 같다.
1. 나는 생각보다 "더" 남의 간섭을 받는 걸 싫어한다.
4번의 여행 중 한 번은 9일이라는 장시간 간 여행이었는데, 처음에는 대체 9일이나 일본에서 혼자 뭘 하나... 가기 전에 꽤나 막막했다. 그래도 그 중간에 친구를 잠깐 만날 일이 있어서 좀 괜찮겠지 했는데, 실상은 그 친구가 너무나 바빠 거의 얼굴만 본 수준이었다. 그런데 궁극적으로는 혼자만의 9일이 꽤나 만족스러웠다.
사실 중간에 친구와 잠깐 커피를 마시거나 밥을 먹으려고 스케줄을 조정하는 데에도, 서로 다른 숙소에 묵고 있고 각자의 스케줄이 기본적으로 달랐던지라, 잠깐의 시간을 맞추는데도 생각보다 좀 번거로웠다. 예를 들어, 너무 고된 일정에 나는 아침에 좀 더 쉬고 싶은데 친구는 아침에 시간이 되어서 일찍 커피를 마셔야 했다던지, 나는 너무 피곤해서 도저히 이제 야외 활동이 불가한데 늦은 밤 밖에서 술 한잔 하자고 연락이 온다던지 하는 경우다. 사실 여행지에서 친구랑 좀 더 보려고 했으나 친구의 예측 불가하고 바쁜 스케줄로 우리가 원한 만큼 같이 시간을 보내지는 못하였고, 그래서 나도 가급적 친구가 원하는 스케줄에 맞춰보려 했으나, 도저히 나도 체력적으로 힘든지라 맞출 수가 없더라. 이때 든 생각이, 아 생각보다 타인과 스케줄을 조정한다는 게 번거롭고 에너지가 많이 드는 일이라는 거였다. 게다가 9일간의 여행 대부분이 타인의 개입 없이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일정이다 보니, 저렇게 사소한 타인의 개입이 유독 크게 느껴지고 나의 평화를 방해받는 느낌이었달까. 하지만 이건 지극히 I성향인 나의 느낀 점이고... 외롭거나 심심해서 절대 혼여는 안 간다는 사람들도 꽤 있는 것 보면 이 부분은 정말 성향의 차이인 것 같다. 하지만 나도 언젠가는 생각이 바뀔 수도 있으니 혼여가 최고라고 단정은 안 짓겠다. 다만 현시점에서 나에게 매우 적합한 여행 방식일 뿐.
2. 나이를 먹을수록 인격적으로 추해지지 말 것.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나는 유독 여행을 갈 때 공항이나 타지에서 보는 20대들이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다. 젊어서 예쁘다는 게 이런 걸까, 싶다. 게다가 유독 노년층이 많은 일본으로 여행을 가서 그런지, 그 젊은이들과 노인들의 대비가 더 두드러지는데 (사실 너무 외모에 치중된 생각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엘리오의 아버지가 엘리오에게 해주었던 말 중 "늙으면 이제 쳐다봐주는 사람도 없는데"라는 취지의 대사가 있었는데 (그러니 지금 사랑할 수 있을 때 겁먹지 말고 열정적으로 사랑해라, 뭐 그런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 정말 젊었을 때 이쁘건 잘생겼건, 늙으면 정말 사람들이 쳐다보지 않겠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씁쓸해지고 또 무서워지는 거다. 그리고 난 저 젊은 시절에 왜 좀 더 나 자신을 예쁘게 꾸미고 돌아다니지 않았을까, 그 흘러간 젊음이 유독 아깝게 느껴지기도 하고. 사람이 가장 예뻐 보이는 그 젊은 시절은 이 긴 인생 중 정말 찰나라는 게 슬프다.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을 정도로 늙어버리면, 그때는 고유의 "매력" 혹은 "인격"으로 다른 사람의 이목을 끌어야 할 텐데, 그러니 더 인격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되어야겠구나를 유독 느끼게 된다.
3. 타인의 것이 아닌 "나의" 감각에 집중할 수 있다.
사실 밥을 먹을 때만 해도, 누군가와 함께 먹으면 신경 써야 할 것이 생긴다. 특히나 내가 식당을 고른 경우에는, 이 식당의 음식이 상대방 입맛에도 맞는지가 제일 신경 쓰이고, 그 외로는 타인이 원하는 메뉴를 고른다거나 등의 타협과 조율, 양보가 필요하다. (하지만 타인과 먹을 때 "즐거움" 측면에선 훨씬 월등할 수 있다는 건 인정한다. 타인과 추억도 쌓을 수 있고.) 이렇게 여러 가지 신경 쓰고 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내가 먹는 음식에 오롯이 집중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 때가 있다. 아니면 내가 느낀 점이 타인의 의견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는다던지. 하지만 혼자 먹으면 내 페이스에 맞춰서, 오롯이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을 먹을 수 있고, 상대방 맞춰준다고 억지로 많이 시킬 필요도 없고(예를 들어 나는 음료나 술을 안 먹고 싶은데 상대가 먹어서 나도 맞춰줘야 하는 경우), 찬찬히 음미하면서 먹을 수도 있고, 그 경험은 온전히 "나"에 맞춰져 내 것이 된다. 게다가 눈치 안 보고 웨이팅 심한 식당도 방문할 수 있고. 어쨌든 "감각"의 측면에서 훨씬 농도가 짙어지는 것 같다. (추가로 이렇게 혼자 먹다 보면 다른 사람과 밥을 먹는 소중함이라던지 아니면 혼밥의 장점도 알게 되고.)
그리고 무엇보다 혼여의 최대 장점은 여행 계획 자체를 내가 원하는 대로 자유자재로 짤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여행 가서 최대한 많이 걷자 주의여서 하루에 거의 4만보에 육박하게도 걷곤 하는데, 사실 지금 내 또래 중 이런 내 여행 스타일을 맞춰줄 수 있는 사람이 많을 것 같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주위를 보면 지하철 한 정거장 거리도 택시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리고 나는 쉬고 먹는 휴양보다도 최대한 많이 보고 느끼자 주의라, 저렇게 걷는 중간중간 온갖 방문할 곳들을 거쳐가는데, 이게 또 내가 가보고 싶은 곳들이 상대방 취향에 맞지 않으면 내가 온전히 원하는 여행이 성사될 수가 없다.
나이를 먹을수록 나는 자기 주관이나 취향이 없는 사람이 매력이 없다. 자기가 애초에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타인의 의견에 그냥 따라가거나 아니면 상대의 호감을 사기 위해 상대에게 무작정 맞춰주는 그런 사람들. 그래서 좀 더 내 확고한 취향을 가다듬기 위해 이런저런 경험을 해보고자 하는데, "나"를 알아가는 여정에서는 오롯이 혼자 새로운 것들을 경험을 해보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 같다.
4. 자립심이 생긴다.
사실 전에도 친구와 일본, 유럽에 여행을 간 적이 있었고, 그때마다 친구에게 기대어 공항에서 시내로 이동하는 교통이나, 식당으로 가는 방법 등 모두 친구가 찾아본 대로, 알아본 대로 생각 없이 따라다니곤 했다. 그래서 그런지, 몇 년이 지난 현재 친구와의 추억은 남았지만 이동 방법이나 지리, 장소 등에 대해서는 거의 내 머리에 남아있는 게 없는 거다. (그래서 작년부터 일본 여행을 갈 때 내가 하나부터 열까지 교통편부터 내가 직접 다 알아보는데, 알아보기 전부터 이미 상당히 귀찮고 복잡하게 느껴져 시간도 알아보는데 오래 걸리고 정작 가서도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곤 했다.) 그런데 이렇게 손수 하나부터 열까지 내가 직접 다 알아보고 계획하고 다니다 보니, 이제는 그 도시의 지리나 교통편 같은 것은 좀 더 확실하게 각인이 되었고, 그다음 여행을 갈 때마다 조금씩 더 동선 짜는 것이 수월해지는 걸 보면서 굉장히 스스로 대견해졌다. 소위 "여행 능력치"가 개발된달까. 여러 시행착오 끝에 이제는 여행 계획을 세울 때 어떤 식으로 검색을 할지, 어떻게 하면 이동에 좀 더 효율적인지 좀 더 알게 되었고, 날로 업그레이드되어가는 내 여행 방법론에 스스로 매우 뿌듯하다.
뭔가 자잘하게 좋은 점이 더 있는 것 같지만, 일단 크게는 이 정도인 것 같다. 내 경우 주위에 혼여가 재미없을 것 같다고 안 해본 친구들도 있는데, 그래도 모두 한 번쯤은 경험해 보는 것 나쁘지 않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