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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 moon song Nov 27. 2024

"두려움 없음"과 “나 자신에 대한 평화”

독일할머니와 한국아가씨, 편지로 삶을 주고받다.

사빈의 위로가 담긴 편지를 번역하고 다듬어 올리는 데에도 한참이 걸렸는데 그러고 나서도 다시 이 글을 쓰는데 한참이 걸렸다. 나의 하루하루는 버퍼링 걸린 컴퓨터화면처럼 정지되었다가 느리게 다시 로딩되는 듯했다가 다시 머 무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식사를 하고 다시 잠자리에 드는 과정을 반복하면서도 나는 내 일상에 돌아오기보다는 아빠가 돌아가신 이후를 정리하고 있는 매일을 보내는 듯했다. 아니 그것이 나의 일상이 되었다고 하는 편이 어쩌면 더 적합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빠가 떠난 빈자리는 공간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당신이 살아온 세월과 그 세월이 누적된 물건들뿐만 아니라 가족들을 비롯한 관계들 그리고 법적인 문제들까지 후폭풍처럼 처리해야 할 것들이 따라왔고 블랙홀이 되어 나의 일상을 뒤틀고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 와중에 사빈의 신중하면서도 조심스러운 위로가 담긴 편지들이 차례로 내게 왔고 그것들을 읽을 수 있는 정도로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우리의 두 번째 주제였던 여성의 삶과 개인으로서의 삶에 대한 그녀의 답변이 메일함에 이미 도착했음을 알았다.


그녀의 편지는 길었고 나는 그 편지의 내용을 번역하면서 서툴게나마 다듬어보려 애썼다. 그녀가 전달하고자 한 행간을 내가 과연 얼마나 전달하고 있는지는 물론이고 우선은 나 자신이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조바심이 일었기에 몇 번이고 다시 읽어가며 그녀의 글 속 그녀의 삶을 내 머릿속에 그려보고 또 그려보았다.
동독에서 자라 전후의 황폐한 환경을 일구어야 했던 사빈. 일과 가사부담을 당연히 받아들여야 했던 사빈. 두 아이를 키우며 아이들에게 시간을 들이는 것을 택하고 일에서의 성취를 포기해야 했던, 직장에서의 여성에 대한 차별을 견뎌내거나 차별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맞서야만 했던 사빈. 눈물을 흘리며 좋아하는 업무를 포기해야 했던, 새로이 택한 직장에서 누적된 스트레스로 청력이상을 겪어야 했던 사빈.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새로이 배치된 곳에서도 여전히 자신의 권리를 위해서 싸워야 했던 그녀···.

그 모든 순간들을 지나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으로서의 자신의 삶을 좋아한다고 이야기하는 사빈. 여성으로서 갖는 공감과 존중의 감각이 가져다준 기회와 환대의 장면들을 "두려움 없음"과 “나 자신에 대한 평화”를 누리는 그녀의 모습을.  


여성으로서의 삶과 개인으로서의 삶

나는 가족 안에서도 사회 안에서도 남성과 여성의 사회적 역할 모델이 아직 상대적으로 구식이었던 시대에 태어났단다. 남자들은 일하러 갔고 여자들은 집안일과 아이들, 환경을 돌보았지.
그러나 동독에서는 1960년대와 1970년대부터 거의 모든 여성이 직장에 나갔단다. 가족에게는 돈이 필요했고 국가도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지. 이는 여성의 평등한 권리를 선전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고 제시되었지. 하지만 여성들은 여전히 정치적으로 착취당하고 이용당했어. 여성들은 직장에서 좀 더 평등했지만, 오늘날까지도 이중의 부담은 남아 있어.

어렸을 때 나에게는, 처음에는 이것이 중요하지 않았고 우리는 (그 외의) 대안도 몰랐단다. 나의 어머니는 낮에는 일을 하시고, 계속해서 농장 일과 집안일을 하시며 3명의 아이를 키우셨지. 아버지는 국영 농업 회사에서 관리직을 맡고 있었고 농장에서도 일하셨지. 하지만 그는 (아이들을) 돌보는 일과 거의 관련이 없었단다. 할머니가 많이 도와주셨지. (그때) 내가 어린아이의 관점에서 봤을 때 이것은 모두 정상이었지. 오늘에서야 나는 어머니가 성취하신 것을 그리고 그것이 어린 시절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를 정말로 이해하게 되었단다. 그 과정에서 어느 정도 성장했다고 할 수 있겠구나.

나는 16살 때 처음으로 여성으로서의 삶을 의식했어. 우리는 고등학교 시절 의무 인턴십을 이수해야 했고 회사에 파견되었지. 나는 가금류 도살장으로 보내졌단다. 여기서 나는 처음으로 남성과 여성의 업무분배의 차이를 경험했어. 여성들은 하루 종일 조립 라인에 앉아 가금류를 도살했어. 남자들은 온갖 종류의 작업과 냉장 보관, 기술 등의 작업을 하게 되었지. 그 작업들은 그렇게 힘들지도 역겹지도 않았지만 확실히 더 나은 급여를 받았단다. 내가 결코 잊지 못할 장면이 하나 있어. 그날은 하루가 끝나고 우리가 공장 문을 나서고 있었지. 한 무리의 여성들이 내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지. 나는 뒤에서 이 여성들이 얼마나 피곤한 회색빛인지, 질질 끄는 걸음걸이 속에서 얼마나 지쳐있는 지를 보았단다. 그리고 다음으로 생각한 건, 이제 그들은 집에 가서 그곳에서도 계속 (집안)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지. 나는 그 이미지를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어. 회사에서 열심히 일한다는 것이 여성에게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나에게 보여주었거든.

(대학) 공부를 마친 후에는 남성이든 여성이든 상관없이 성과와 지식이 더 평등해졌지.

그러나 첫 직장에 들어가자 상황이 다시 달라 보였단다. (처음엔) 내가 일을 잘하고 정치적 의무를 다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괜찮았지. 나는 아주 좋은 일을 했지만, 여성으로서 국가의 의무를 완전히 다하지 못했지. 여성은 최소한 두 명의 자녀를 낳고 정규직이어야 했거든. 개인은 동독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았고, 격려받지도, 요구되지도 않았어. 사람들은 동일한 목표를 가지고 하나의 집단으로 기능해야 했단다.
하지만 난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서 항상 하루 6시간 정도로 (정규직보다) 더 짧은 시간만 일하려고 노력했어. (돌봄이 필요하다는) 아이들 진단서의 도움으로 한동안 그렇게 일을 할 수 있었는데, 사장이 훌륭한 직원보다 정치적 슬로건을 더 중요하게 여기기 전까지만 가능한 일이었지. 그는 나에게 다음과 같은 말로 선택지를 주었어. 당신은 지나친 (육아시간을 보내는) 엄마이고, 경제적으로 정당하지 않으니, 당신의 기본적 입장을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내게 깊은 상처를 줬고, 불공평한 일이었지. 나를 화나게 만들었고 전체 시스템에 의문을 제기하게 만들었어. 우리 업무팀도 나를 도와주려고 노력했지만 소용이 없었지. 그리고 내 생애 처음으로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했단다. 나는 내 직업과 나의 팀을 매우 좋아했단다. 가족과 직업 중 하나를 이렇게 잔인하게 선택해야 했던 것도 그 당시에는 꽤 이례적인 일이었지. 하지만 어떤 고집, 아이들의 안녕, 그리고 굴복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나로 하여금 그 일을 그만두게 만들었지. 나중에는 많이 울었고 너무 슬펐단다.

나는 다른 직업을 찾았는데 그 일은 내 주변의 새로운 사람들, 즉 특별한 고객 때문에 나에게 많은 도전을 안겨주었어. 그로 인해 귀에 갑작스러운 청력 상실이 발생했지. 그걸 귀의 심장마비라고 부르더구나. 모든 슬픔과 스트레스가 질병으로 이어진 것이었지.
그리고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부서가 지방 자치 단체의 공공 행정 부서로 이전되었단다. (통일) 이전에는 여성이자 어머니로서의 권리를 위해 싸워야 했었지. 그러나 이제는 적어도 개인으로 존재할 수 있고 나 자신을 대표할 수 있게 되었어. 사람들은 더 인간적으로 그리고 여성이라는 존재로 인정되고 존중받게 되었지.
나는 Quedlinburg 시의 공원 관리직에서 일하며, 다시 하루 6시간씩 업무를 하게 되었고 훌륭한 상사를 만나게 되었단다. 정부는 우리(직원들)를 서로 대결시키려고 했어. 내가 6시간만 출근하는 한, (우리) 부서의 연봉은 주어지지도 않고 삭감될 수도 있다고 했지. 이는 순전히 협박이자 괴롭힘이었어. 인사담당자는 나를 혼자 두었어. 더 이상 독재는 없었지만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자신의 대의를 위해 일어서야 했지. 이번에는 나를 쫓아낼 수 없었어. 하지만 사람에 대한 설렘과 두려움, 슬픔과 의심도 있었지. 내 상사는 계속해서 괴롭힘을 당했단다. 그는 아마도 이 세상에 비해 성격이 너무 좋은 사람이었을 거야. 나는 항상 그 사람 곁에 있었단다.

오늘날 (과거를) 돌이켜보며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건, 동독 여성들이 임신, 출산 및 합병증 발생 중에 대우받았던 방식이야. 이 (임신, 출산, 합병증) 때문에 나는 여러 주 동안 여러 병원에 입원했었단다. (당시의) 지배적인 어조는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별로 나쁘지 않아요, 괜찮을 거예요, 그렇게 행동하지 마세요'였단다. 적어도 내 경험으로는 그랬지. 의료 과정에서 여성에 대한 무례함과 가부장주의가 어느 정도 있었어. 나는 마치 내가 거기에 없었던 것처럼 진료를 받고 판단을 받았지. 모든 것은 아마도 국가가 고의적으로 시민을 평준화했던 것과 관련이 있었을 거야.
집에서도 우리는 고전적인 (남녀의) 역할 모델을 유지했었지. 남편과 나는 그것과 다른 무엇을 전혀 알지 못했단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우리는 이미 좀 더 현대적인 방식으로 생각하고 살아왔지. 모든 젊은 세대는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다르게 생각하니까. 예를 들어, 남편은 나의 새 직장을 위해 사랑하는 고향을 포기했고 우리는 Quedlinburg 시로 이사했단다. 그리고 남편은 이미 나를 따라잡으려고 노력하고 있었어. (그에게) 나는 거의 10년 더 어리고 조금 더 자발적이었지만 그 또한 아이들을 더 잘 돌보고 작은 집안일도 도맡았단다. 그에게는 많은 것들이 새로운 것이었지만 그는 그것들에 열려 있었어.

여성의 관점에서 볼 때, 나는 평등과 존중을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했지.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인생을 잘 헤쳐 나갈 수 있었고 수년 동안 아주 좋은 일을 할 수 있었고 많은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을 수 있었지. 나는 또 가족, 친척, 친구들 사이에서 매우 인정받고 존경받는다고 느껴. 문제는 여성으로서의 삶 자체가 아니라 환경이야. 양쪽 모두에 존중이 있다면 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다양성인지는 거의 중요하지 않단다.

불행하게도 때로는 여성으로 성장하기 위해 눈물과 분노가 필요했지. -그런데 남자들에게도 이런 순간이 있는 것 같다.- 한때는 얼마나 미숙한 농장의 소녀였는지, 지금의 나는 어떤 사람인지! 어느 순간 남자로서 더 잘 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 그리고 남자로서 인생을 좀 더 쉽게 살아갈 수 있었을 것 같았지. 친구들 사이에서도 이 문제를 이야기하곤 했어. 하지만 결국 나는 여성으로서의 삶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결론에 분명히 도달했단다. 가족에 대한 모든 책임, 직장에서의 내 권리에 대한 헌신, 그리고 침묵을 지키고 인내하는 것 역시 나란다. 나는 그런 사람이고 항상 (내가) 여자임을 좋아한단다.
여자인 것도 장점인 것 같아. 우리가 습득한 사회적 기술, 나의 좋은 네트워킹 감각(가족과 직업, 관계에서), 사람에 대한 존중과 공감은 항상 나에게 문을 열어주었어. 내 생각에 우리 여성들은 특정 상황과 순간에 더 민감한 안테나를 갖고 있고,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어. 남자들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채 벽에 머리를 부딪히는 것을 좋아하지.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해야 했을 때, 내 능력이 (가족, 직업, 관계에서) 도움이 됐단다.

그리고 전반적으로 오랜 시간을 거치며 나는 덜 불안해졌어. 나에게 또 무슨 일이 일어날까? 나는 아주 많은 것을 성취했지. 더 이상 누구에게도 아무것도 증명할 필요가 없어. 이제 남은 건 단지보다 편안한 은퇴로 이어지는 경험일 뿐이지. 좋은 경험과 나쁜 경험, 그것은 바로 경험이 존재하는 이유일 거야. 나는 (그 경험의 과정에서) 나 자신을 잘 의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단다. 나는 내가 무엇을 하는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무엇을 할 수 없는지 알고 있고 그것이 내 욕구를 충족해 주지.

너희는 (나처럼) 더 이상 그렇게 불안해하지 않거나 추진력을 가지긴 어렵겠지. 오늘날의 젊은 여성들은 이전의 내가 겪었던 것과는 다른 요구에 직면해야 한다는 걸 알아. 물론 이는 사회정치적 상황과 관련이 있겠지. 요구 사항이 더욱 다양하고 광범위해졌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쉽지 않을 거야. 나는 항상 균형을 옹호하는 사람이란다. 항상 유행을 따르지 않고 "아니요"라고 말하고, 지금 (무언가를) 가져야 한다면 (차라리) 아무것 없이도 행복한 마음으로 지낼 수도 있을 거야. 때로는 적은 것이 더 좋고 (우리를) 해방되게 할 수 있지. 나는 그렇게 점점 더 나아지고 있단다. 그건 내게 "두려움 없음"과 “나 자신에 대한 평화”를 주거든.

엄마 그리고 엄마 곁에 있던 아빠를 그려보았다. 전후의 동독과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통일독일의 격변 속을 지나온 사빈의 삶처럼,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해방을 맞고 한국전쟁을 겪어야 했던 그리고도 독재와 유신을 거쳐 민주화를 지나온 두 사람의 삶을. 사빈의 이야기 속에서 엄마아빠도 그와 같은 눈물과 분노의 시간을 겪어야 했음을 그리고는 아무것도 증명할 필요가 없는 순간에 이르러 내 곁을 떠났음을 알았다.

이 글을 적는 지금 눈이 나린다. 어제 두 달간의 유품정리를 마치고 나자 보슬비가 눈으로 바뀌어 내리기 시작했다. 엄마아빠의 흔적을 비운 집에 소리없이 눈이 쌓이기 시작했고 그 광경에 나는 뒷산으로 산책을 나섰다. 엄마와 아빠가 이따금 올라가던 우리동네의 뒷산에 올라 가만히 우리동네의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엄마아빠가 두 사람의 보금자리를 처음 마련해 우리를 키워내고 이제는 떠난 이 곳이 고요히 눈을 덮고 잠들어있는 듯 했다.

나도 지금 내가 겪는 이 과정들을 지나며 두려움 없음과 나 자신에 대한 평화로 한 걸음씩 더 나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사빈의 말처럼, 그렇게 내 안에서 엄마아빠와 대화를 나누고 그들이 나에게 남긴 것들도 평화롭게 내 일상 속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11월의 대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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