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역, 공간으로 기념을 일상화하는 시도

2025 문화예술공간기획: 다산역 다산 정약용 테마 역사 갤러리 기획

by 문성 Moon song Kim

기획과 실행의 현장 기록

문화예술 프로젝트의 기획·실행·조정 과정을 현장 기록으로 남긴다. 문화예술 실천이 어떻게 판단과 지식을 만들어내는지, 아이디어가 현실과 만나 기획이 되고 실행이 되는 과정을 따라가며 그 속에서 축적된 인식과 방법을 정리한다.


0. 이름과 장소 사이의 간극

2025년 남양주시청으로부터 다산역에 다산 정약용 선생의 브랜드공간으로서 문화예술공간을 만들어달라는 기획 제안을 받았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영정 봉안식 작업을 하며 더욱 선생에 대한 애정이 생겼기에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 연관된 작업을 할 수 있다는 게 반가웠기에 흔쾌히 제안을 받았다.

다산역은 수도권 전철 8호선 연장 구간에 새롭게 개통된 역으로, 남양주시 다산신도시의 중심에 있었다. 현장을 검토해 보려고 직접 찾았을 때, 이름과 장소 사이의 간극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매끈하고 반짝이는 바닥과 타일, 눈부시게 밝은 형광등, 길고 넓게 이어지는 복도, 병원과 상점을 소개하는 홍보 포스터로 가득한 출입구. 출입구는 각 아파트 단지 혹은 상가로 진입하기 위해 설계되어 있었고, 신도시 베드타운 아파트 단지 특유의 건조한 분위기에 철저히 이동을 위해서 설계된 공간이었다.

정약용 선생의 호를 이름으로 가진 역이었지만 그 이름이 실제로 감각되는 지점은 없었다. 선생은 '다산'이라는 호로 표지판에만 존재했다. '다산'이라는 이름은 역명으로 반복적으로 호출되고 있을 터였지만, 그 명칭이 지시하는 인물과 사유는 공간 안에 존재할리 만무했다. 신도시의 속도 속에서 이름은 기능적으로 사용될지언정, 의미는 정착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프로젝트는 바로 그 간극을 다루는 작업이었다.

지하철역이라는 통과 공간에서 역사적 인물을 어떻게 현재화할 것인가.

그것이 기획의 출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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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발 조건: 다산신도시, 지하철 통로, 도시브랜드라는 정책적 맥락

다산역은 남양주시 다산신도시의 중심 교통 거점으로 하루 평균 약 16,000명이 통과하는 공간이었다. 다시 말하면, 이제 막 생긴 신도시에서 출퇴근하는 이들의 일상 동선을 구성하는 핵심 기반시설이었다. 당연히 머무르기 위한 장소라기보다 이동을 위한 공간에 가까웠다. 브랜드화를 위해 주어진 역사의 일부공간은, 형광등 조명 아래 직선형 동선이 이어지는 화이트 박스형 구조였다. 지나치는 이용객의 짧은 체류 시간, 빠른 보행 속도. 전시나 체험 중심 콘텐츠가 작동하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동시에 남양주시는 이미 정약용을 도시 브랜드의 핵심 자산으로 설정하고 있었다. “정약용을 그리다”라는 브랜드 기본계획 아래 다양한 사업이 진행되어 왔고, 다산신도시라는 명칭 자체가 그 전략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기획은 공간 조사에 더해서 관련 유적지를 답사하고, 정약용 관련 연구서와 기록을 검토하며, 남양주시가 그간 추진해 온 브랜드 사업을 정리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이는 단순한 배경 조사라기보다, 정약용이라는 인물이 정책·도시·일상 속에서 어떻게 위치 지워지고 있는지 역사적 상징을 넘어 지역 속에서 어떻게 현재화되고 있는지 확인하고 분석하는 과정이었다.

과거는 회고를 통해 이해되지만, 도시는 현재와 미래의 방향 속에서 작동한다. 그렇다면 신도시의 현재라는 시간성 안에서 정약용을 어떻게 보여주어야 할까. 단순히 위인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적 접점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가 핵심 과제가 되었다.


2. 핵심 문제: 머무르지 않는 공간에서, 어떻게 기념하게 할 것인가

다산 정약용 선생이 단순히 과거의 인물로서 기억되지 않으려면, 현재의 시간 속에서 그의 유산이 살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어야 했다. 사람들이 무심코 그를 마주하더라도, 그를 새롭게 인식하고 그의 면면을 돌아볼 수 있어야 했다. 주어진 공간이 단순한 이동 통로가 아니라, 기억과 만남이 교차하는 지점이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통로는 관람을 전제로 한 공간이 아니었다. 지하철에서 나오는 혹은 지하철로 향하는 시민들은 목적지를 향해 이동하며, 공간을 배경으로 지나칠 뿐이었다. 이 조건 속에서 설명 중심의 전시는 적합할리 만무했다. 정보의 과잉은 피로를 유발하고, 이미지의 반복은 상징을 장식으로 전락시킬 위험이 있었다. 역사 인물이 도시 브랜드로 차용될 때, 가장 경계해야 할 지점은 소비적 도상화였다.

따라서 멈춰 서서 읽게 만드는 구조가 아니라, 지나치며 감각되도록 하는 환경을 설계하는 방향으로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기억을 강요하지 않고, 일상 속에 스며들도록 만드는 방식.
기념을 의례가 아닌 일상적 환경에서 경험하도록 전환하기로 했다.

이전의 행사가 정약용을 영정 봉안식이라는 의례를 통해 기념하는 것이었다면, 이번에는 공간 속에서 그리고 일상 속에서의 기념을 구축하고자 하는 시도였다.


3. 취사선택: 지나는 걸음 곁으로 기억의 스펙트럼을 펼치다

초기에는 설명 중심의 전시 구성과 환경 중심의 공간 설계라는 두 방향을 두고 고심하다가 결국 후자에 무게를 두기로 했다. 화이트 박스에 형광등이 이어지는 긴 복도형 구조는 병원의 복도를 연상시키는 건조한 인상이 강했다. 그래서 공간에 흐름을 두고 기념할 수 있도록 색채 전략을 쓰고자 했다. 우선 이 메마른 공간의 시작점인 출입구에 연녹색을 출발점으로 두었다. 정약용의 옥색 도포를 떠올리게 하는 색이자, 남양주의 자연을 상징하는 색을 배경으로 정약용의 새로운 초상으로 출입구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이후 서가를 모티프로 한 구간으로 들어서며 색채가 점차 다채로운 스펙트럼으로 확장되도록 구성했다. 선생의 깊은 학문적 역량과 폭넓은 실천, 사유와 활동을 보여주는 이 영역에는 녹색에서 연두, 노랑, 핑크로 이어지는 풍부한 색채의 흐름으로 역동성을 부여했다.

특히, 다산 정약용 선생의 저술 세계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고자『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를 중심으로 한 1표 2서부터 행정·민생·법제 전반에 걸친 그의 대표적인 저작들을 배치했다. 그 사이사이에 거중기, 유형거, 녹로 등 발명과 기술의 흔적, 그리고 그가 사랑했던 꽃과 나무 이미지를 함께 구성해 학자이자 실천가, 그리고 자연을 가까이했던 한 인간으로서의 면모가 겹쳐 보이도록 설계했다. 걸어가며 감각할 수 있고, 멈추어 서서 읽고자 한다면 더욱 자세히 이해할 수 있도록 소개를 더했다.

이어서 지도와 다산과 연관된 지역 정보 콘텐츠 구간은 화이트를 유지하여 내용에 집중하도록 조율했다. 다산과 연관된 작품을 전시한 시민갤러리는 진녹색을 배경으로 설정해 전시된 작품에 시선이 자연스럽게 모이도록 배치했다. 연녹색에서 시작해 다채로운 색의 스펙트럼을 지나 진녹색으로 이어지는 흐름은, 이용자의 걸음과 함께 변화하도록 의도되었다.

멀리서 보면 색채로 먼저 감각되고, 가까이 다가서거나 멈추어 선다면
이미지와 캡션을 통해 정약용과 관련된 구체적 내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원하는 이는 정보를 얻고, 그렇지 않은 이는 색과 이미지로 공간의 분위기를 감각할 수 있도록
층위를 나눈 것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전시를 설치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의 환경을 설계하는 작업에 가까웠다. 특정 지점에서 감동을 유발하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는 동선 속에서 의미가 축적되도록 기획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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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구현 과정: 제약과 긴장의 시간, 그리고 작동의 순간

실행 단계는 단순하지 않았다. 지하철 역사 안이라 시민들이 오가야 했기 때문에 시공 시간과 구간이 엄격히 제한되었고, 조명과 구조 변경 역시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었다. 예산 범위 안에서 소재와 마감 방식을 조정해야 했고, 디자이너·시공사·행정 담당자 간의 협의가 반복되었다.

도면이 여러 차례 수정되고, 디자이너와 시공사에서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 준 덕분에 설치 방식은 현장 조건에 맞추어 재설계되었다. 공간의 비례와 동선의 흐름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시각적 밀도를 확보하는 균형을 찾는 과정은 예상보다 많은 시간이 들었다. 긴 복도형 구조 안에서 색과 오브제가 과도하지 않으면서도 분명하게 읽히도록 만드는 일은 작은 수치와 간격의 조정까지 포함하는 작업이었다.

제작물은 차근차근 완성되었다. 며칠에 걸쳐 구조물이 벽면에 자리 잡고, 도서 오브제가 설치되고, 그래픽이 부착되면서 비로소 전체 맥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설치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계속 지하철을 타고 내리는 이들이 오갔다. 일부는 공사를 지켜보며 공간의 변화를 궁금해했고, 복도를 걸으며 자연스럽게 색채가 달라진 벽면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선생의 초상 앞에서 잠시 멈추어 사진을 촬영하기도 하고, 책 오브제를 앞에 멈춰 서서 자세히 내용을 읽기도, 작업을 하는 우리에게 내용을 자세히 묻기도 했다. 단순한 통과 공간이었던 복도에서, 머무름과 관찰, 질문과 감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 반응들은 강렬한 집단적 변화라기보다, 제각기 다른 사소한 변화들에 가까웠다. 그러나 바로 그 점이 중요했다. 동선을 고려한 시각적 단순화와 내용의 층위화에, 공간이 오가는 통로의 역할을 넘어 정약용이라는 인물을 감각하는 자리가 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현장에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그 반응들이 나에게 뿌듯한 성취감으로 남았다. 준비과정의 복잡함과 고단함이, 사람들의 경험 속에 차분히 정리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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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기획 회고: 의례를 넘어 환경으로

기념, 즉 뜻깊은 인물, 사건, 날짜 등을 오래도록 잊지 않고 마음에 간직하고 기억하는 행위는 보통 전통적 속에서는 특정한 날과 형식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재 불특정 다수가 함께 살아가는 도시에서의 기념은 형식으로 완성되기보다는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이번 작업은 정약용을 상징으로 소비하는 장치가 아니라, 현재의 도시 맥락 속에서 다시 마주하도록 만드는 환경을 설계하는 시도였다. 기념을 의례적 장면이 아니라 공간적 구조로 전환하는 것, 그리고 그 구조가 반복 속에서 작동하도록 만드는 것. 공간이 매개가 되어 사람들이 오가고, 멈추고, 바라보고, 기억하며 비로소 선생을 현재형으로 기념하게 하려 했다. 역을 지나던 누군가가 잠시라도 멈추어 그의 이름을 읽고, 그의 얼굴을 기억하고, 그가 남긴 사유를 떠올려보며 다산역 혹은 다산 신도시라는 명칭을 되새겨볼 수 있는 연결고리가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한편으론 매일 오가는 동선 속에서 이름과 이미지가 축적되어, 인물이 교과서 속 위인을 넘어 일상의 배경이 되는 것은 기념의 대상이 장식으로 전락하면 어쩌나 하는 우려가 생겼다. 역사적 인물을 환경 디자인 요소로 사용하게 될 때, 친근하게 대하기도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표면적으로 소비하거나 심하게는 희화화의 대상으로 삼는 경우도 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다산역에 놓인 다산 정약용 선생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결국 다산역을 오가는 시민들의 몫일 것이다. 그들이 추구하는 미적인 기준 그리고 사회적 가치의 기준에 따라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지켜보며 앞으로의 기획에도 참고해보려 한다.


6. 남은 질문: 도시, 정책, 기억

도시 브랜딩에서 역사적 인물을 호출하는데 가장 적합한 시각적 방법은 무엇인가.
정책과 예술의 접점에서 기획자는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는가.
신도시의 시공간적 특성 속에서 기억은 어떻게 지속될 수 있는가.

다산역 프로젝트는 하나의 완결이라기보다, 기념의 방식을 전환하는 실험에 가까웠다. 의례적 기념을 넘어 공간적 기념, 그리고 일상 속 기념을 구축하려는 시도는 정약용브랜드 역사라는 이름으로 구현되었다. 공간은 완성되었지만, 의미는 반복 속에서 형성될 것이다. 그 과정을 지켜보는 일 또한 기획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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