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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규준 Apr 30. 2024

마주침

마주침-이규준

     

1. 마주침의 논리학

원인에 관한 물음은 논리적으로 무한 후퇴한다. 원인, 원인의 원인을 계속해서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원인에 관한 무한 후퇴를 막기 위해서 자기원인이라는 개념이 필요하다. 자기원인은 다른 것에 의해 존재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 의해서만 존재한다. 자기원인은 원인에 관한 무한 후퇴를 막고 그 막은 지점에서부터 역으로 다른 모든 것들을 산출해낸다. 그렇게 세계는 존재한다. 자기원인과 세계는 분명 상호작용한다. 중요한 것은 자기원인이 세계에 영향을 끼치듯이 세계도 자기원인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기원인은 자기 자신에 의해서만 존재해야 한다. 자기원인이 세계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면 그것은 자기원인이 아니다. 고로, 자기원인과 세계는 하나이다. 놀랍게도 하나가 존재한다.

  

2. 마주침의 존재론

세계는 내재성의 평면이다. 세계는 흰 종이이다. 종이는 조금 구겨져 있다. 종이 위에는 주름들이 있다. 종이에서 주름만 따로 떼어낼 수 없듯이, 존재에서 존재자를 따로 떼어낼 수 없고, 세계에서 사람을 따로 떼어낼 수 없다. 주름을 떼어내려고 하면 종이가 따라올 것이기 때문이다.

     

3. 마주침의 인식론

주름은 접혀있다. 그래서 펼 수 있다. 주름이 펴질 때 우리는 아파한다. 아프고 나면 주름이 펴져 있다. 우리는 어느새 타인을 향해, 세계를 향해, 나를 향해 열려있다. 모두가 이 과정을 반복한다. 코스모스에서 카오스로, 카오스에서 코스모스로. 자기원인은 몸을 비튼다. 이 때문에 수많은 주름이 접힘과 펼침의 운동을 이행한다. 타인을 마주하는 순간, 우리에게는 사랑이, 그러니까 재앙이 닥친다. 우리는 고통받는다. 우리는 생각한다. 새로운 사유를 창조하는 순간 우리는 고통으로부터 마침내 탈출한다. 접힘과 펼침. 타인이 없다면 우리는 변할 수 없다. 타인이 있다면 우리는 변할 수밖에 없다. 타인은 접혀있는 나를 폭력적으로 펼친다. 마주침. 고로 타인은 구원이다.

     

4. 마주침의 윤리학

우리는 타인을 옆으로 끌어당기려고 해서는 안 된다. 불가능할뿐더러 옳지도 못하다. 우리는 타인을 위로 끌어당겨야 한다. 그것이 타인과 가장 가까워지는 지름길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모두가 있다. 하나와 무한은 같다. 고통이 우리에게 닥쳐왔을 때 자기원인을 떠올릴 것. 자기원인이 몸을 비틀고 있음을 기억할 것. 눈을 들어 하늘을 볼 것. 하늘을 용서할 것. 하늘로서 용서할 것. 왜냐하면 당신이 바로 하늘이기 때문이다. 흰 종이와 주름은 뗄 수 없기 때문이다.

     

5. 마주침의 미학

구겨진 종이가 완전히 펴졌을 때 우리는 우리가 사라질까 봐 걱정해야 할까. 전혀. 오히려 그 많던 주름이 전부 펴졌으므로 종이가 너무 넓어지지 않을까를 걱정한다면 모를까. 새하얀 종이가 끝없이 펼쳐지는 그 세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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