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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 text Jun 24. 2023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


 참으로 자극적이고 도발적인 제목이 아닐 수 없다.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겠냐니. 제목만 보고 책을 샀음을 부인하지 않겠다. 대체 무슨 내용일지 너무 궁금해서 집에 오자마자 책을 폈고, 그제야 부제를 확인했다. ≪무문관≫ : 나와 마주하는 48개의 질문.



 ≪무문관≫은 불교의 한 종파인 선종의 옛 스님들의 화두를 모아놓은 책이다. 저자가 프롤로그를 통해 ≪무문관≫에 대해 설명한 내용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불교의 최종 목적은 불교의 창시자인 싯다르타처럼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는 것, 그를 통해 자신만의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선불교에서 고안한 '화두'는 바로 부처가 되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는 관문과도 같은 것이다. 앞서서 깨달음을 얻은 이들이 어떻게 이 화두라는 관문을 통과했는지 참고하는 것은 스스로 깨달음을 얻는데 도움이 될 수 있으며, 이렇게 화두를 뚫어낸 선배들의 일화를 숙고하고 나라면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수행법을 간화선이라고 한다. 화두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해설이 붙은 다양한 종류의 간화선 교재가 있는데, 무문 스님이 48개의 화두를 선별해서 해설한 ≪무문관無門關≫도 그중 하나다. 


 영어로는 The Gateless Gtae라고 번역된다는 ≪무문관≫. 해석하자면 문이 없는 관문. 관문이라고 하면 통과할 수 있어야 하는데 문이 없으니 통과할 수가 없다. 그러면 이것은 관문일까 아닐까. 그야말로 제목부터 화두를 던지는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라는 책은 ≪무문관≫에 담긴 48개의 화두에 대해 저자 강신주가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책이다. 






 저자는 ≪무문관≫ 속 48개의 질문들을 나름의 기준으로 나누어 총 4부로 구성했다. 현대의 문제의식과 사유방법을 따랐기 때문이라고 한다. 책은 ≪무문관≫에 수록된 깨달음을 얻은 옛 스님들의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그 에피소드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풀어내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예를 들자면


운문 선사에게 한 선승이 물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운문 선사가 대답하였다. “마른 똥막대기니라.” - 《무문관》 운문시궐


 이라는 화두를 소개하고, 이 에피소드는 "자신이 스스로 부처가 될 생각을 하지 않고 부처가 무엇인지 말해달라고 요청하는 선승에게 '스스로'가 깨닫는 것이 부처가 되는 길인데 그것을 '남에게' 묻느냐는 의미로 '마른 똥막대기'라는 충격을 주어 부처가 무엇인지 묻는 것, 그리고 스스로 진리를 구하지 않고 남에게 물어보는 행위는 똥막대기나 다름없다는 운문 선사의 가르침"이라는 저자의 생각이 따라오는 식이다. 그야말로 선문답 풀이집이랄까. 


 아무래도 깨달음을 주기 위한 이야기다 보니 난해하고 뜬구름 잡는 것들이 많은데, 저자의 해설이 각각의 화두가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주었다... 사실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책을 다 읽고 난 지금도 여전히 자신이 없다. 옛 스님들은 대체 이런 난해한 질문 속에서 어떤 깨달음을 어떻게 얻었던 것일까. 그것을 해냈으니 대단한 거겠지. 


 ≪무문관≫ 자체가 이미 화두를 공부하기 위한 해설서인지라  ≪무문관≫에는 각각의 화두에 대해 저자인 무문 스님의 해설이 수록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본래 화두란 스스로 깨우쳐야 하는 것이기에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의 저자인 강신주는 무문 스님의 해설을 보지 않고 각각의 화두에 대한 스스로의 해석을 적었다고 한다. 결국 이 책은 ≪무문관≫속 화두를 해석하는 '정답'이 아니라 화두라는 개념조차 낯선 독자들이 이 화두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저자 나름의 해석을 공유해 주는 참고서 성격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이 참고서를 통해 나는 이 책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이렇게 요약해 보았다. 물건이나 타인의 생각에 대한 권위와 집착을 내려놓고, 그 자리에 온전한 자신의 생각을 가득 채워야 한다. 주위 의견에 흔들리지 말고 나의 본래면목을 찾아 내가 내 삶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진리라도 흉내 내어서는 안 된다. 남을 따라 하는 것으로는 진리에 이를 수 없다. "자기 삶의 온전한 주인공이 되어라."






 책을 읽으면서 인상 깊었던 구절을 몇 가지 정리해 보았다.


나이를 먹었다고 해서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삶을 결정할 수 있는 힘과 자유가 없다면, 어른이라고 해도 어른일 수 없는 법이니까요.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남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아야 어른입니다. 싫은 건 싫다고 하고 좋은 건 좋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어야 어른입니다. (6p)


나는 바로 나입니다… …그런데 나의 모든 행동은 너무나 타인들과 유사합니다… … 이건 내가 나로서 살아가기보다는 누군가를 흉내 내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걸 말해주는 것 아닐까요. 한 번밖에 없는 삶을 살아가면서 이건 너무나 슬프고도 우울한 일 아닐까요. (13p)


서암 사언 화상은 매일 아침 자기 자신을 “주인공!” 하고 부르고서는 다시 스스로 “예!”하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깨어 있어야 한다! 예! 남에게 속아서는 안 된다! 예! 예!”라고 말했다. (33p)


남이 아무리 선의지를 가지고 조언을 해도, 그 말에 따라 사는 순간 우리는 주인이 아니라 노예로 전락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악의를 가지고 우리를 노예로 부리려는 사람에 대해서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35p)


진리라도 흉내 내서는 안 된다.(62p) … 남을 흉내 내는 것으로 깨달음에 이를 수는 없는 법입니다.(65p)


불립문자라는 슬로건의 목적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남의 말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말을 하는 것, 그러니까 잃어버린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는 것 말입니다.(83p)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된다면, 서 있는 곳마다 모두 참되다……해탈한다는 것, 그래서 부처가 된다는 것은 일체의 외적인 권위에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당당한 주인공이 된다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123p)


선악을 넘어서 좋음과 나쁨을 판단하는 맨 얼굴을 회복한 사람. 그 사람이야 말로 삶의 주인공입니다.(171p)


싯다르타는 싯다르타일 뿐이고, 나는 나일뿐입니다. 그런데 왜 나를 갈고 다듬어서 싯다르타와 같은 사람으로 만들려고 할까요. (199p)






 매일 아침 자신을 "주인공!"이라고 불렀다는 서암 스님은 깨달음이란 별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데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렇기에 단순히 '주인'이라고 말하지 않고 거기에 존경을 뜻하는 '공'을 붙였다는 것이다.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되었다면 이미 부처가 된 것이기 때문에 존경을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지금까지 나는 어떻게 살아왔나. 자신이 바라는 모습이 아니라 타자가 바라는 모습이 되기 위해 스스로를 부정하지는 않았나. 타자가 내게 바라는 것에 속아 그 말의 노에로 살며 그만큼 스스로 행복을 포기해 왔던 것은 아닌가. 


“주인공!”

“예!” 

“깨어 있어야 한다!” 

“예!” 

“남에게 속아서는 안 된다!” 

“예!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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