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합과 향유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기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린도전서 13장 4-7절)
사랑은 오래 참는다고 말씀하셨다. 어찌보면 참는다는 것은, 희생을 동반한 기다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 말인 즉은, 여전히 '내가 옳음'에는 변화가 없지만, 대신 봐주고 내가 희생해 준다란 뜻도 된다. 적어도 나는 그것이 '인내'의 정의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참기만 하면 병나고, 참다 참다 폭팔한다."라고 한다. 결국 인내란 이해해주고 져서 소멸되는 감정이 아니라 자비를 베푼다는 우월감으로 일단 문제를 넘기고 본다란 뜻도 된다.
그러니 나의 희생이란 뜻의 '인내'는 '사랑은 오래참고...' 다음 이어지는 성경속 사랑의 정의와 전부 대척된다. 참다 못해 '온유'하지 못하고 폭팔하며, 내가 봐준것이라고 '자랑'하며, 희생한다며 '교만'하고, 너는 왜 인내 못하냐며 다그치니 '무례'하다.
인간이 제대로된 반성과 회개를 못하는 이유는 태생적으로 '내가 옳음' 사고에 천착되기 때문이다. 인간사 모든 갈등의 원인 역시 이 '내가 옳음' 문제에서 기인한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강박이 바로 '의인' 사고다.
나는 정의롭고, 나는 자비하고, 그러니 나는 하나님의 편이고...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로마서 3장 10-12절)
나는, 나는, 나는... 내가, 내가, 내가... 나를 앞세우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 대척하고 그 분의 영광을 가린다. 타락 후 인류의 태생적 질병은 "제가 왕되고 싶은 병"이다. 이는 사탄에게서 들어온 성품이다.
주님이 내게 들려주시길, "오래 참음"이란 기다림이다. 그러나 내가 주체가 된 기다림이 아니다. 하나님의 시간표를 기다리는 것이다. 상대를 사랑하면 '그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해질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이다. 그 때까지의 참음이 '인내'다.
주님께는 내 영혼의 무게가 그의 영혼의 무게가 같고, 나를 두고 오래 참으신 것과 같이, 그를 두고도 시간을 주시고 계신다. 여기엔 내가 개입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주님 말씀 하시길...
"내가 네가 회심하기를 48년을 기다렸는데, 어찌 너는 그의 회심을 1년도 못 기다리고 타박을 하느냐?"
나의 성장과 그의 성장이 다르고, 나의 시간표와 그의 시간표가 주님의 계획하심에 따라 다를 진데 어찌 내가 다그칠 수 있는 자격을 가졌나?
사랑이 급하면 강간이 되고, 그것은 폭력이다. 그것은 마귀의 것이지 온전한 사랑이 아니다. 사랑이라고 합리화 된 강요는 제가 의인이라고 믿던 '가롯 유다'의 마음이다. 옥합을 깨트려 가난한 이에게 쓰지 않고 예수님 발을 씻길 향유를 썼다고 질책하는 위선. 유다가 사탄에 사로잡히는 것은 저가 '의인'이라는 착각에서이다.
주님 내게 말씀하시길,
"그녀도 너 만큼이나 내 사랑하는 딸이다."
반면, 향유를 부은 막달라 마리아는 본래 일곱귀신 들린 자였느나 제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김으로 복음을 전하는 끝까지 그녀의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이렇듯 하나님의 시간표엔 저마다의 쓰임과 사랑하심이 있다. 내가 참음이 아니요. 주님이 참으심이다. 그러므로 이루는 것 역시 주님께서 주님의 시간표대로 역사하심이다.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마26: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