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와 팽나무

by 양경인

국제시장 양장점에서 일했던 어머니는 자투리 천이 많았다. 명절이 돌아오면 내 몸의 치수를 재고 앞 뒤 다른 양복천을 대어 외투를, 조각보를 사방 무늬 만들며 원피스를 만들었다. 추석 전날 제주시에서 내 걸음으로 한 시간 남짓 걸렸던 중산간 마을인 오라리 할머니 집.

올레 입구 팽나무 그늘에서 안도의 지친 숨을 토해내고 있으면 오가던 사람들이 추석빔 예쁘다고 한 마디씩 하였다.


할머니는 나를 그다지 반기는 것 같지 않았다. 우영팟에서 천천히 허리를 펴며 “오란댜?(왔니)” 하면 그뿐. 올레 안에 들어설 때 내 볼을 만지고 옷을 쓰다듬으며 덕담하던 동네 사람들만도 못했다. 칭찬을 침이 마르게 하는 사람은 아랫집 친척 할머니였다. 홍역 때 고등어 연기에 눈이 멀었다는 친척 할머니는 마당을 들어서는 내 잰 발걸음만 듣고도 척 알아맞혔다.


어머니가 시집가 보니 친할머니는 불한당 같은 할아버지와 매운 시어머니 사이에서 반병신이 되어 있더라고 했다. 풍도 아닌데 오십도 되기 전에 손을 떨었고 첩의 밥상을 수시로 날랐다고. 제주 4.3 때 동네 웬만한 남자는 거의 돌아가셨다. 그 상황을 피해 일본으로 갔던 할아버지는 두드러지게 ‘허우대 번듯한 남자’였을 것이다. 10년 만에 돌아와 하얀 와이셔츠에 코트를 입고 나서면 여자들이 폴폴 붙어 오더라고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여자를 데려와 안방에서 같이 자도 밥상을 차려놓고 호미 들고 밭에 갔다.

할아버지가 일본에서 작은부인을 얻어 살다가 사이가 틀어져 귀향한 두 달 후에 내가 태어났다. 그때 데리고 온 막내 삼촌은 5살, 고모는 3살이었다. 할머니는 첫 손녀가 태어날 때 어린 오누이 부양을 한꺼번에 맡은 것이다. 할아버지는 어린 두 자식을 맡겨놓고 풍운아처럼 돌아다니다가 잠깐씩 집에 들어와 어린 고모가 보리밥 먹었다고 고해바치면 “왜 쌀밥을 해주지 않았느냐 “고 할머니를 때렸다.

할머니는 첫 손주인 나를 무심히 대했지만 어린 삼촌과 고모는 살뜰히 챙겼다. 뒤란에 돌배나무나 비파가 익으면 온전한 것은 막내 삼촌과 고모를 주고 흠집 난 것을 내게 주었다. 성장하면서 내 서열이 고모 밑이라는 자각을 심어준 할머니, 그렇다고 나를 야단치거나 나무란 적도 없었다. 할머니는 평생 몇 단어를 쓰실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눌변에 종일 같이 있어도 말 몇 마디 안 하셨으니까. 하지만 움직임이 빨라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동안 몇 가지 일을 마치셨다. 그런 할머니를 내가 그리워할 줄은 몰랐다. 내가 혼기를 넘겨 친지들께 중매를 부탁할 때도 “우리 손주가 경 곱진 안 허여 (그다지 예쁘지는 않아)”고 내 앞에서 말하던 야속한 할머니를.

제삿날 당일에 돌아온 할아버지는 제상 음식이 부실하다며 할머니 머리채를 잡았다. 나는 그 광경을 창호지 문 밖에서 실루엣으로 보았다. 어린 마음에 너무 놀라 숨도 쉴 수 없을 지경이었지만 머리채를 잡힌 할머니는 아무 말도 없었다. 작은 신음소리조차 없었던 그날의 광경은 내 마음에 풀지 못한 숙제로 남아있다.

팽나무 그늘에 앉아 그날 할머니의 침묵을 생각한다. 사춘기 작은삼촌이 할머니가 내민 고구마 범벅을 먹기 싫다고 빽 소리 지를 때도 댓돌에 어질러진 삼촌 신발을 가지런히 놓고 덤덤히 부엌으로 들어가시던 모습도 떠오른다.

성질 급한 난봉꾼 할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오십 줄에 이미 노인이 되었던 친할머니는 구순을 넘기고 돌아가셨다. 돌아가실 즈음에 뜬금없이 또 나타난 행색이 초라한 이복 아들에게 조상 밭 한 귀퉁이라도 줬으면 좋겠다고 유언을 하셨다.

“다 같은 생명 아니가? 나 도렌 해시카 (낳아 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내가 자랄 때 모든 큰 나무는 팽나무였다. 제주에서 느티나무가 마을목이 되는 곳은 없다. 반닫이 가구 ‘궤’나 마루 널판으로 쓴 나무 중에 느티나무가 많은 걸 보면 원래 없었던 것은 아니고 목질이 우수해서 베어 쓰다 보니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말처럼 별 쓸모가 없는 팽나무만 무성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애월읍 소길리 팽나무, 강정효 사진

팽나무는 이제 할머니에게로 들어가는 문이다. 생모를 일찍 떠난 아이들이 애틋했을 뿐, 첩의 자식이라는 건 중요하지 않았을 할머니의 마음을 솨아솨아 팽나무 바람이 전해 준다. 생전의 아버지는 “어머니가 미련해서 내가 고아가 안 된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늘을 주는 역할 외에는 새싹도 늦게 나오고 꽃이 언제 피는지도 모르고 열매도 사내아이들 공기총알로나 겨우 쓰이는 밋밋한 팽나무, 부스럼이 자주 생기는 어린 나를 위해 어머니가 치성을 드리던 곳도 할머니 집 근처 ‘오라동 내왓당’에 있는 팽나무였다. 오래된 팽나무는 신목(神木)이 되어 인력이 미치지 않는 소원이나 비념을 담은 지전 물색 댕기를 달고 있다. 누대의 역사를 품고 마을 사람들의 생로병사를 지켜보았을 400년 수령의 팽나무는 그저 무덤덤하게 삭풍에 몸이 뒤틀리기도 하면서 과거를 소환한다.


팽나무 씨앗으로 자라 느티나무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가을의 햇살로 노을처럼 자신을 장엄하게 물들이지도 못하는 ‘폭낭’이 팽나무라는 표준어를 갖고 있다는 것도 한 참 후에야 알았다.

이전 03화폭풍의 언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