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항쟁은 한국 현대사의 아픔이고 대한민국의 역사요, 언젠가는 자랑스러운 우리나라 통일운동의 역사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이 시기 제주사람들과 같이 역사의 현장을 살다 간 스님들이 많다. 그분들의 행적을 더듬어 본다.
해방 이후 중앙(서울)의 불교개혁운동에 따라 제주에도 불교 청년단이 결성되고 조선불교혁신 전도 승려대회(이하 제주도 승려대회)가 개최되었다. 1945년 11월 제주 교무원에서는 원문상(1908~1950) 스님을 중앙에 보내 제주교구 독립을 추진하였다.
당시 제주불교 청년단 총무와 제주도 승려대회 부의장을 맡고 있던 원문상 스님은 중문중 학원에서 국어, 역사, 한문을 가르쳤다. 스님에게 교육을 받은 조명철 씨(1934년생, 중문면 하원리)의 회고를 들어본다.
“1학년 때 역사교사로 선생님(스님)을 만났습니다. 교과서도 없이 옛날이야기하듯 수업을 했지요. 학생들은 100% 집중할 만큼 최고 인기였어요. 혜화전문학교를 나오고 제주도에서 유일한 한글학회 회원이기도 하셨죠. 최현배의 <한글 갈> 책자를 제게 주시며 ‘너는 장차 한글학자가 되거라’ 당부하셨어요. 그 책을 얼마나 열심히 봤는지 책갈피마다 선생님 도장이 찍혀있어요. 어느 봄날 선생님을 따라 법화사로 갔어요. 거기서 가사 장삼을 갈아입고 나오시는 걸 보고 스님인 줄 처음 알았죠.
다음 해에 선생님은 새로 부임해 온 서북 출신 교사에게 모함을 받아 예비검속 때 끌려가 총살당하셨습니다. 죄명을 ‘2·7 사건 주모자로 좌익사상 극렬자’라고 기록했더군요. 마음속에는 사회주의 사상을 가졌던 것도 같아요. 선생님도 당대 지식인이었고 석가모니 정신을 받은 사람이니까. 석가모니 자체가 인도 계급사회를 타파하기 위한 혁명가 아닙니까.”
제주도 승려대회 준비위원장을 맡은 이일선(李一善, 1895~1950) 스님은 전남 장성 출신이다. 1937년 백양사 포교사로 제주로 와 전도 순회강연을 주도할 때 대중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스님은 1947년 2월에 결성된 민주주의 민족전선(이하 민전) 공동의장을 맡았다. 당시 중앙(서울) 민전은 우익을 배제한 단체였는데 제주도는 우익이라 할 세력이 없어, 전 도민의 결집체로 역할을 하였다.
민전 주최로 1947년 3·1절 기념식을 열었을 때, 일선스님의 연설을 기억한 분은 이 날을 겨울로 생각하고 있었다. 3월 1일이면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릴 때고, 특히 제주는 맵찬 영등 바람으로 체감추위가 겨울 못지않았을 것이다. 한금순 박사 논문에 실린 김평수(토산리)씨 증언이다.
“북 국민학교에서 신탁통치 운동할 때, 겨울이었는데 ‘서쪽에 저 동백꽃을 보라’면서 운동장에 핀 동백꽃을 가리키며 연설하던 모습이 눈에 선해. ‘서숙 밥(조밥)을 먹더라도 우리나라에서…’하고 연설을 했는데, 신탁해야 한다는 쪽으로 연설했지. 그때는 신탁하는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할 때야.”
기념식이 끝날 무렵 경찰 발포로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부상당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사망자 대부분은 어깨나 등에 총을 맞았다. 미군정 주장처럼 항의 군중이 아닌 해산 군중을 향해 최소 14발을 쏘았던 것이다. 관청이 몰려있는 관덕정 마당에서 총소리가 난 것은 유사 이래 처음이었다.
미군정에서는 민전 간부 28명을 체포했는데, 일선스님도 포고령 위반 혐의로 형을 받았다. 이후 분노한 도민의 항의 총파업이 3월 10일 일어나고 미군정은 한 달 사이에 2500명을 체포 구금하였다. 이 와중에 고문치사 사건이 연달아 발생하여 제주는 공포 속으로 치닫게 되었다.
이세진(李世震,1910~1949) 스님은 여섯 살에 어머니와 인연 깊은 내장사 백학명 스님에게 맡겨졌다. 때 묻지 않은 동진(童眞) 출가였다. 11세에 고향에 내려와 제주 공립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몇 년간 사서를 배운 후 18세에 내장사로 출가해, 백양사에서 비구계를 받았다.
스님은 백학명 스님이 만든 내장 선원에서 3년가량 수행했다. 내장 선원은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선농(禪農) 불교의 기본정신에 입각한 선원이었다. 그 후 금강산 표훈사 중향강원 강사로 있다가 1937년 제주도로 돌아와 한림 포교당 포교사로 부임해 승려교육을 담당하였다.
스님은 1942년 도평리에 서(西) 관음사를 창건하였다. 내장 선원 강령에 따라 초가집에 법당과 객실 한 채만 짓고 나머지 터에는 기와공장을 운영하여 주민들과 판로 개척을 의논하며 직접 시장에 나가 팔았다. 자체 생산 활동으로 승가의 자립을 이루고자 했던 스님의 꿈이 실현되는 시기였다.
이세진 스님
서관음사 개혁운동이 불교계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킬 때 제주 4·3항쟁이 시작되었다. 이세진 스님은 도평리 청년들과 입산하였다. 스님 나이는 39세였다, 도평리 사람들에게는‘산왕’으로 불렸고, 여러 스님들도 ‘총을 들었던 무장대 스님’으로 기억하고 있다. 1949년 3월 경 산에서 내려온 스님은 체포, 수감되었다 김우송 헌병의 도움으로 풀려난다. 그러나 예비검속 때 다시 잡혀 수장(水葬)되었다. 여섯 살 사미승으로 불가에 들어가 35년 동안 사문의 길을 걸은 스님이 마지막 길은 총을 든 무장대원이었다.
오이화(吳利和, 1903~1950) 스님은 관음사가 군인들에게 이중 삼중 포위되어 총성이 울릴 때도 법당에 앉아 목탁을 두드리며 불경을 외웠다고 한다. 스님은 제주시 오라리에서 출생하여 12세에 출가하였다. 제주교구 교무원장을 지내고 제주 승려대회 임시의장을 할 만큼 지도력이 있었다. 성품이 온화하고 사리에 밝아 대중강연에도 능통했다. 마차에 묶여 물고문을 받는 등 모진 고문을 받아 후유증으로 1년 후 돌아가셨다. 이렇게 해방 후 불교계에서 주도적으로 일한 스님들은 모두 희생되고 새로운 세상을 염원했던 희망도 함께 파괴되었다. 모두 토벌대에 의한 죽음이었다.
애월읍 수산리 대원정사 주지 일조 스님(1940년생)이 고아가 된 내력은 70년 동안 금기였다. 수십 년 동안 스님과 동고동락한 신도나 화주들도 “대동아전쟁 때 일본에 돌아오다 폭격 맞아 부모님이 돌아가셨다”정도로 알고 있었다. 스님은 80세가 돼서야 아홉 살에 겪은 4·3을 담담히 말하였다.
“아버지는 일본서 대학을 나오고 해방 후 돌아와 단국중학교를 세웠어요. 5.10 선거를 반대해 학생들과 산으로 올라갔고, 이 일로 수감되었다 풀려났는데 아버지 행방을 대라며 할머니를 잡아갔어요. 시어머니가 잡혀가니 어머니도 맨발로 아기 업고 따라갔다가 같이 총살되었죠. 누나도 죽고. 고모 등에 업힌 여동생도 총에 맞아 시름시름 앓다 다섯 살에 죽었습니다. 아버지는 후에 대전형무소에서 돌아가셨고요. 집도 한 채는 불태워 버리고 남은 한 채는 경찰에서 쓴다고 헐어 목재들을 가져갔어요. 난 이때 충격에 노지 생활까지 겹치니 탈장에 소아 관절염으로 걷지를 못했어요.
15세에 고모할머니가 보살로 계신 인연으로 원천사에 갔어요. 이 절은 원래 수산사인데 고정선 주지 스님이 4·3 때 남로당원이던 고인수 스님을 며칠 숨겨준 것이 드러나 총살당하고 절은 뜯어서 해체되었다가 나중에 원천사를 세운 거죠. 그때 스님이 ‘아픈 것 낫게 해 달라 하지 말고, 새로운 삶을 주신다면 부처님 뜻 받들어 살겠으니 도와 달라’고 기도 방법을 가르쳐 주셨죠. 새벽에 일어나 절도 못하고 합장기도만 했지요. 기도생활 34일 만에 걷기 시작하고 49일째는 뛰어다닐 수 있게 되었어요.
저는 부처님과의 약속으로 출가했습니다. 1953년 6·25 전쟁이 끝나자 애월면에서 군인 전사자가 318명이나 되었어요. 수산봉 요사채에 있을 때, 애월면에서 위령제를 부탁했어요. 4·3 때 죽은 군인 경찰가족까지 합쳐 417명이 되었죠. 비록 부모님은 경찰 군인에게 죽었지만 저는 출가 자니까 초월해야지요. 1954년도부터 시작해서 55년째 군경 호국 위령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남원읍 의귀리 속칭 ‘속냉이 골’에는 평화 탁발순례단 푯말이 있다. 2004년 5월, 도법스님 일행이 이곳을 찾아 천도재를 지내며 세운 것이다. 1949년 1월 10일 ‘의귀리 전투’에서 희생된 무장대원 수십 명의 주검은 근처 밭에 버려졌다. 몇몇 유족이 몰래 야트막한 무덤을 만들었으나 돌보는 이가 없어 가시덤불로 덮여 있었다.
지금은 스님 조언을 따라 뜻있는 사람들이 매년 8월 15일 벌초를 하고 있다. 제주 4·3 평화공원 묘역 어느 귀퉁이라도 대자대비 마음으로 시대를 중생과 같이 했던 16명 스님의 순교비가 세워지는 날이 오기를 기다린다.
도법스님이 쓴 푯말
속냉이골 의귀사건 희생자 유골방치터
모든 생명은 존엄한 것이다.
옛말에 '적의 무덤 앞을 지나더라도 큰 절부터 올리고 가라'고 했다.
바로 이곳은 제주현대사의 최대비극인 '4.3사건'의 와중에 국방경비대에 희생된 영령들의 유골이 방치된 곳이다.
당시 국방경비대 제2연대 제1대대 2중대는 남원읍 중산간 마을 일대의 수많은 주민들을 용공분자로 몰아 의귀초등학교에 수용하고 있었다.
1949년 1월 12일(음력 48.12.14) 새벽 무장대들이 내습, 주민피해를 막아보려 했지만 주둔군의 막강한 화력에 밀려 희생되고 말았다.
이때 희생된 십수 명의 무장대들은 근처 밭에 버려져 썩어가다가 몇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이곳에 묻혔지만 내내 돌보는 사람 하나 없이 덤불 속에 방치돼 왔다.
우리 생명평화탁발 순례단은 우익과 좌익 모두를 이념대립의 희생자로 규정한다.
학살된 민간인뿐만 아니리 군인 경찰과 무장대 등 그 모두는 해방공간과 한국전쟁 때 희생된 내 형제 내 부모였다.
'평화의 섬'을 꿈꾸는 제주도, 바로 이곳에서부터 대립과 갈등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우리 순례단은 생명평화의 통일시대를 간절히 염원하며, 모성의 산인 지리산과 한라산의 이름으로 방치된 묘역을 다듬고 천도재를 올리며 이 푯말을 세운다.
2004. 5. 13
생명평화 탁발순례단 일동
72주기 4.3 추모제에서 코로나 위기로 인적이 드문 광화문 광장에서 조계종 스님들
2020년 4월 3일, 제주 4.3 72주기 광화문 추모제에서 조계종 스님들이 천도재를 올맀다. 2018년에 시작하며 세 번째이다. 스님들 뒤 쪽에서는 재경 유족 청년회 회원들이 108배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