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작가 김석범의 『만덕 유령 기담』은 제주 관음사를 배경으로 한 중편소설이다. 하버드대 방문교수를 다녀온 인류학자 김성례 교수의 말에 의하면 이 소설은 하버드대 동양문학과의 교재로 쓰고 있다고 한다. 아직 국내 번역이 안되었지만 서울에서 진행된 '화산도 완독모임' 2기 (2019 )좌장을 맡은 영문학자 김정주 씨가 초역을 해 주었다.
주인공 만덕(Mandogi)은 오사카의 한인 마을에 있는 절에서 공양주로 일을 하던 여인에게서 뜻하지 않은 임신으로 태어나 걸음마를 익힐 무렵에 제주도 한라산 계곡의 관음사에 맡겨진다. 아버지도 이름도 모르고 ‘개똥이’로만 불리던 아이는 인자한 큰스님(Benevolent Old Priest)에게서 만덕이라는 법명을 받고 이 절의 공양주로 자란다. 몇 년이 지나 기생 출신의 서울 보살(Mother Seoul)이 절의 관리인을 맡게 되고 노스님이 열반에 든 후 만덕은 서울 보살의 만성적인 욕설과 구타에 시달리는 사이 이 절에도 4.3 사건의 소용돌이가 들이닥치게 된다. 관음사는 미군의 지휘를 받는 남한 군경에 의해 불태워지고 만덕과 서울 보살은 S-오름에 있는 작은 절로 옮겨 생활하게 되는데, 이 절은 토벌대의 주둔지이기도 하다. 이 절 아래에 있는 마을(Shinomura; 下里村)에는 남편이 입산한 후 시부모인 오 노인 부부를 모시고 사는 며느리가 있었는데, 이 여인을 흠모하던 만덕은 그녀가 서청 출신 경찰의 협박에 시달리다 감나무 가지에 목을 매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여인의 영혼을 위로하러 찾아간다. 그런데 여인의 죽음에 분노한 서청 출신 경찰이 들이닥쳐 오 노인을 빨갱이 가족이라며 끌고 가고 여인의 장례식을 치르러 왔다는 만덕까지 함께 지서로 끌고 간다. 이윽고 이들 앞에 오 노인의 빨치산 아들이 붙들려 오고 경찰은 오 노인의 손에 총을 쥐어 주며 아들을 쏠 것을 명령하지만 노인은 총구를 자신의 목에 대고 방아쇠를 당긴다. 당황한 경찰은 만덕에게 다시 오 노인의 아들을 쏠 것을 명령하지만 만덕이 역시 이를 거부하고 죽음을 선택한다. 결국 만덕은 비행장에서 사형에 처해지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나 S-오름의 절에 불을 지른 후 어디론가 사라지고, 사람들 사이에서는 만덕이 유령이 되어 순찰하던 경찰의 모자를 벗기고 총을 빼앗아 달아났다거나, 오 노인네 며느리의 유령과 함께 불타버린 아랫마을을 거닐고 있더라는 이야기가 떠돌게 된다. (김정주 초역)
만덕이란 인물은 김석범의 중편 『똥과 자유』에서 우직하고 선량한 용백이로, 장편『화산도』에서는 히스테릭한 목포 보살의 매를 묵묵히 견디며 산사람들을 돕다가 수용소에 갇히는 불목하니 용백이로 나온다. 작가는 악이 난무하는 공포 속에서 모두가 머릿속 계산이 바쁠 때, 한 무구하고 순결한 영혼이 어떻게 상황에 맞서는지 ‘뚜럼(반푼이)’같은 인물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김석범은 오사카에서 삼양 출신 부모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일본에서 성장한 그는 1943년 가을. 한라산 관음사에 머무르며 조선어 공부를 한다. 작가가 1년 동안 머문 관음사의 체류는 김석범 4.3 소설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안 봉려관((安蓬廬觀,1865~1938)
30년 전 4.3 증언 채록을 다닐 때 제주시 앞바다 탑바리(지금은 해수면을 메워 '탑동'이라 부르는)에 사는 한 노인을 뵌 적이 있다. 이엉이 삭은 집이라 방안은 어두웠고 할아버지 쉬고 갈라진 음성은 탁음이라 듣기가 어려웠다. 그분은 관음사가 불타기 전에 절 불목하니를 하셨다고 했다. 관음사는 여스님이 관세음 불상을 가져와서 세운 절인데, 그분이 열반하실 때 수천수만 나비 떼가 무리 지어 날았다는 말씀, 관음사가 불에 탈 때는 겨울 하늘에 우박 같은 산비가 내렸고 신자 한 명이 관음불상을 꺼냈는데 그 불상이 어디 갔는지 모른다는 대충 그런 말씀이셨다. 뜬구름 잡는 이야기같아서 오랫동안 잊다가 최근 (30년 후 )혜달스님(봉려관불교문화연구원 원장)의 자료발굴과 연구를 접하며 희미하나마 윤곽을 잡을 수 있었다.
혜달스님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제주의 절은 유교문화에 밀려 200년 동안 공백기를 갖다가 봉려관 스님에 의해 관음사가 창건되었다. 봉려관은 제주시 화북에서 태어나 1907년 해남 대흥사 청신암에서 출가한 근대 제주불교 최초의 비구니이다. 제주와 육지를 오가며 전법에 매진하던 스님은 대흥사 심적암에서 일경들이 스님과 의병을 살해하는 광경을 목격한 후 항일운동에 마음이 기울었다. 수계 후 제주로 돌아온 봉려관 스님은 관음사 근처 해월 굴에서 정진하며 1909년 봄, 근대 제주 최초의 사찰 관음사를 창건했다.
관음신앙으로 근대 제주불교를 재건한 봉려관 스님은 폐사된 고찰을 중창하고 10여 곳의 사찰을 창건했다. 동시에 스님은 독립투사들이 항일운동을 할 수 있는 장소를 물색하여 1911년, 서귀포 도순동 산자락에 법정사를 창건하여 거처 마련과 함께 식량과 독립자금을 지원하며 항일운동가들을 보살폈다. 봉려관 스님이 세운 불교학당 <해월 학원>에서 ‘법정사 항일운동’’의 지도부 방동화, 후에 관음사 주지가 된 오이화 스님을 배출되었다. 현재 혜달스님은 근대 한국여성의 선구자요, 최조의 제주여성 독립운동가인 봉려관 스님의 삶을 연구, 조명하고 있다.
항일의병운동(抗日義兵運動)은 일본에 항거하는 의병 운동이다. 동학 농민 운동에서 시작하여 일본의 국권 침탈에 반대하여 을사, 정미의병으로 이어졌고 경술국치(1910년 8월 29일) 이후 항일 무장독립운동 세력의 근간이 되었다. ( 위키백과)
이 사진은 아마 내가 배운 국사 교과서에도 실린 사진일 것이다. 포르투갈제 일본 총구 앞에 활로 대적한 임진왜란 조정의 군대만큼이나 한심하고 막막한 사진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는 걸 알면서도 싸웠다. 근래에(2018) 방영된 드라마 “ 미스터 션샤인”은 역사 왜곡의 논란도 있었지만 구한말 의병운동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드라마였다고 생각한다. “미스터 선샤인”의 주인공 유진 초이 말처럼 “조선을 빨리 망하게 하는가, 좀 늦게 망하게 하는가”의 차이밖에 없는 일을 하였던 의병의 상황을 안 봉려관 스님은 가까이서 보았을 것이다.
1939년 불타기 전 관음사
관음사는 처음에 초가집이었다. 1938년 봉려관스님이 열반하신 후인 1939년, 관음사는 일부 전각이 전소되었다. 이어 관음사 중창에 애를 쓰신 분은 주지 오이화 스님으로 추정하고 있다.
오이화 스님 (맨 왼쪽)
4.3 항쟁의 광풍에 오이화 스님도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다. 오이화 스님은 이 시기에 몸이 아파 관음사 포교당에 머무를 때가 많았다 한다. 학살, 방화가 자행되는 속에서 법당에 앉아 염불을 외고 계셨다는 스님은 증언 속에서만 존재한다.
제주 인민들의 "4.3"무장투쟁 자료집( 김봉현, 김민주 공저, 1963, 文友社印刷所)에는 관음사 전투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 당시 돌오름에 포진되어 있던 인민의 전투대는 창고 참았던 분노가 일시에 폭발되어 이를 일격에 공략하기 위한 제반 전투태세를 갖추고 벼락 치는 관음사의 적진에 돌격 힘 격전을 유격전을 진행하였다. 백주에 벼락이 쳐서 번쩍이는 번갯불이 일어났고 한라산 산비가 몹시 내려 놈들에게 천벌을 주었다. 이때 전투대는 장시간에 걸친 전투 행정에서 적 27명을 살상했으며 그들 방화자들도 유격대들에 처단되었다.
이세진(李世震)(1910-1949) 스님은 외가가 독실한 불교 집안으로 6살에 동진(童眞) 출가한 분이다. 제주 4ㆍ3 항쟁 때 이세진 스님은 도평리 청년들과 입산하였다. 스님의 이때 나이는 39세, 무장대에 소속될 나이는 아니다. 아마 도당 본부에서 일하다 산 무장대의 상황이 열악해질 때 무장대로 편입되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관음사에서 이세진 스님을 만난 광순 스님(명법 사주지)은 절 옆에 막사를 만들어 스님들과 따로 식사를 하며 절의 피해가 없도록 했다는 일화를 전한다.
1949년 3월 경 산에서 내려온 스님은 주정공장 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김우송 헌병의 도움으로 풀려나 관음사 포교당에서 은신하다 1949년 7월 9일 사복경찰에 잡혀나가 수장되었다.
이세진 스님은 후세도 없고 일찍 출가해서 고향 한경면 저지리 명단에도 서관음사가 있던 제주읍 도평리에도 희생자 명단에 올라있지 않았다. 2019 나온 " 제주 4.3 사건 추가 진상보고서 1" 행방불명 희생자 명단이나 예비검속자 명단을 뒤져보았지만 이세진 이름은 찾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산화한 이름이다. 어떤 연유로든 4.3 희생자에 오르지 못한 이름들에 삼가 묵념을 올린다.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1949년 1월 경 ‘관음사 전투’는 토벌대에 의해 관음사가 전소되는 일차적 빌미가 되었다. 나중에는 제주도 대부분의 사찰들이 전소, 파옥되었으니 관음사도 절의 운명을 피할 길은 없었을 것이다. 4.3 증언에 의하면 관음사는 48년 겨울 도당 본부였다고 한다.
- 2.7 지대가 대승리로 성공한 전투로, 동북- 신촌 사이의 청년들을 묶어 만든 부대입니다. 총사령관은 이덕구가 했겠지요. 관음사 전투 중에 경찰들이 섬멸당했는데 경찰 한 명이 기관총 떨어뜨린 것을 다시 가서 주워서 돌아가는 것을 보고 산부대에서 ‘적이지만 용감하다’고 감탄했다는 일화가 있어요. 대대장 김완식은 후에 북촌 학살로 부모님이 죽은 것을 알고 경찰서로 내려가서 “내가 김완식이다” 말하고 총알 한 알로 자살했다고 들었어요. 김완식 아버님은 일제 때는 일본서 일하며 북촌 신성 회관 건립에 중심 역할을 했고 해방 후에는 북촌리건국준비위원회 , 이어 개편된 북촌리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하셨어요.
(이석림, 조천면 북촌리, 1991년 증언)
1947년 3.1 사건의 발포로부터 1954년 한라산 금족령이 풀일 때까지 7년 여 동안 온갖 곡절이 스며있는 관음사. 토벌대가 경내에 진입할 때까지 법당에서 불경을 외고 계셨다는 주지스님, 그리고 화엄 속의 불상을 꺼내 신도의 집에 모신 17세기의 목조 관음보살좌상. 내가 30년 전에 설핏 들었던 신도의 집은 한금순 불교사 연구자의 말에 의하면 지금 도남의 보현사라 한다.
제주 관음사 관음보살상 (사진 한국학 중앙연구원)
이 불상은 17세기 최고 조각가 색난의 작품으로 추정한다. 기록에는 개금불사를 했다는 것만 나와있다. 전국 사찰을 돌며 이 시기 색난의 불상을 살펴본 적이 있었는데 이 불상은 그 시기 제작된 것 중 으뜸이었다. 불상의 전체 매무새도 유려하지만 얼굴 표정을 보면 우리가 위급할 때마다 부르던 관세음보살의 자비가 고요하게 배어 있다.
지금 관음사의 옛 모습은 없다. 항쟁의 기간에 비해 너무 긴 토벌과 학살의 시간, 이끼로 덮여있는 아미산의 돌 터와 대웅전으로 돌아온 목조 관음불상이 남아 하루가 일 년 같았을 시간을 침묵으로 전한다.
현재 관음사는 매년 4월 3일이 되면 4.3 당시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들과 그 시대의 흐름에 비켜서지 않았던 스님들을 위로하기 위해 천도재와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 참고논문: 제주4.3항쟁과 제주불교의 사회 참여 활동( 한금순, “대각사상” 제31집, 201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