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는 한라산 중턱 허리를 가르며 천왕사 가을 숲길을 지나는 중이다. 차창 너머 오른쪽으로는 크고 작은 오름들이 노을에 젖고 있었다. 같이 가는 친구가 올해 선산을 정리해 천왕사에 유골을 모셔 마음의 짐을 내려놓은 것 같다는 말을 했다. 우리 세대의 정서로 아직 남아있는 봉분 문화를 친구는 장손 자격으로 돌아가신 지 몇 년 안 된 아버지 묘소까지 이장하여 불교식 화장을 한 것이다.
올해 초 작은 시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시아버지의 작은 부인으로 들어와 몇 년 같이 살아보지도 못하고 두 아들 키우며 혼자 사신 분이다. 훤칠한 미인이고 강단도 세서 저런 성정이니 당당하게 첩 살림을 했구나 싶을 때도 있었다. 해녀가 직업인 그분은 자신의 몸으로 돈을 벌어 살았고 늙어서는 본인 집 한 귀퉁이에 구멍가게로 두 아들 뒷바라지를 하였다. 그분이 가신 곳도 천왕사였다.
장례식장에서 천왕사로 가는 영구차에 올랐을 때 흐르던 쇼팽의 장송행진곡. 평소 무심코 듣던 그 곡이 절절하게 스몄던 것은 여성으로 곡절 많았던 고인의 삶이 그 곡 위에 얹혔기 때문이리라.
운구행렬이 장례식장을 빠져나와 천왕사에 안치되기까지는 반나절도 안 걸렸다. 작은 시어머니는 적잖은 현금을 자식들에게 남겨놓으면서도 영구히 모시는 비용이 500만 원이라는 말에 비싸다고 “아무 길에나 뿌려버리라”라고 했다고, 그분다운 유언이었다. 그날 아흔아홉 골 계곡 아래 천왕사는 겨울 나뭇가지 사이로 찬 공기가 서릿발처럼 쨍쨍하였다. 나는 그 싸한 적막함이 마음에 닿았고 이렇게 공기 맑고 조용한 곳에 영면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 하고 있을 때, 유골단지는 금박 입힌 지장보살이 휘황한 봉안당 실내공간으로 들어갔다.
(천왕사 봉안실)
이승의 삶을 마쳤으니 인간의 고향인 별의 세계, 북두칠성으로 돌아가시라는 칠성판. 느티나무나 소나무로 형편껏 관을 짜 등판에는 북두칠성을 새겨 오름 기슭에 묻는 것을 후손의 과업이자 보람으로 여기던 시대가 저물고 있다. 그런데도 복잡한 유교 장례의식이 아직도 내 마음에 머물고 있는 것은 팔순 넘은 어머니가 내심 원하고 있어서다.
할머니 장례식처럼 오름 자락에 누워있는 수많은 무덤 자리들은 많은 경우 후대의 짐이 될 것이다.
장례풍습이 바뀌면 한 문화가 바뀌는 것이라고 한다. 천주교 묘지에 갈 수 있으리라 믿었던 시어머니도 한 줌 재가 되어 천주교 납골당으로 갔다. 서랍장처럼 만든 차가운 대리석 속으로 유골단지가 들어갈 때 나는 가슴이 답답하였다. 영혼이 갇히는 느낌이랄까.
죽어서 별로 돌아가든, 한 자락 바람으로 떠돌든 그것은 개개인의 내세관과 연관되어 있겠지만 그 죽음을 맞아 치러야 하는 후손들의 제반 사정도 참작되어야 할 것이다. 지인들의 부고 소식을 들을 때면 아직 제대로 시작도 못 해본 삶 같지만 나도 형편껏 죽음을 준비해두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별의 후손이라는 건 과학적 지식의 바탕으로 이해하지만 구체적 실감은 별의 거리만큼이나 아스라하다. 나는 그저 흙의 한 입자로 돌아가고 싶다. “흙에서 태어난 이, 흙으로 돌아갈 지니...” 내 육신의 잔해가 새로운 생명이 움트는 데 도움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내 생전의 기억들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에 잠시 머물다 시간의 풍화작용을 받으며 서서히 잊히기를. 나 또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들을 그렇게 흘려보냈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