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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경인 Feb 26. 2023

정지아 “아버지의 해방일지”

- 사회주의자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기

 이 책은 해방 공간에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사회주의를 택한 아버지가 출옥 후 전남 구례에서 이웃과 더불어 살다 간 이야기다. 동시에 딸이 사회주의자 아버지로부터 벗어나 자본주의 사회를 적응해 가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5.10 분단선거 반대 유인물을 살포하다 경찰에 잡혀 고문으로 성기불능 상태였는데 지인이 한약으로 살려내 자신이 태어났다는 사실을 딸은 ‘아버지가 최 약방의 꼬임으로 나의 고통이 시작되었다. “고 자조한다.

 

 30여 년 전, 여성 유일 비장기수 고 박선애 씨를 인터뷰하며 정지아 이름을 처음 들었다. 당시 민주화의 물결을 타고 독서계를 달군 이태의 “ 남부군”이 출소한 빨치산들 사이에서 아쉬움이 있었는데, 빨치산 부부의 딸이 후속 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얼마 후 그 결과물이 “빨치산의 딸”이란 제목으로 나왔다. 그때 쏟아져 나왔던 빨치산 관련 책들을 읽었는데 정지아의 글이 특별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아마 작가의 표현대로 “너무 의식적으로 힘을 준” 내용이 부담스러웠는지도 모른다. 난 그 시대 질곡의 역사를 뒹굴며 살아간 사람들이 의식주, 특히 밥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하는 것들이 더 궁금했다.


니가 거 뭣이여

사회과학 허냐?

사회과학 별것 아니여

밥이여

알겄냐?

또 니는 뭣이여 부처님 찾냐?

부처님 가운데 토막도 밥이여

탁발이여 동냥이여 공양이여 방생이여

알겄냐?

농토산이께 젤 중한 거는 밥인디

천주학 노랑차이도 별수 없이 밥인께

영성체가 별거간디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찌개백반인께로

알겄냐?

카농이 뭣인 줄 알겄쟈!

알었으면

지 밥 싸게 찾아 묵고 도통하잔께

작것!

          (김지하 <카농 서형> 전문)


 카농은 ‘가톨릭 농민회’의 준말이고, 서형은 카농 출신으로 국회의원을 했던 서경원 씨를 말한다. 이 시는 1980년대 작품이다. 해방공간에서는 밥을 둘러싼 생각의 차이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로 갈리고 1980년대 이후는 진보와 보수로 표현되기도 했다. 공평하고 평등한 밥을 원했던 사람들을 사회주의자라고 하고 공산주의자라고도 했고 빨갱이 사상이라고 했다.

 이 소설 속 아버지(고상욱)를 둘러싼 가족은 연좌제 등으로 자신들의 꿈이 좌절되는 여러 정황과 맞닥뜨린다. 작은아버지는 군인들이 6학년 교실에 들어와 “고상욱을 아는 사람이 있느냐”라고 했을 때 “고상욱이 우리 짝은성인디요, 짝은성이 문척멘당 위원장이야요” (126쪽) 말해 형을 자랑스럽게 여긴 죄 값을 평생 지고 다녀야 했다. 그 후 작은아버지는 아버지에 대한 지적 콤플렉스까지 합쳐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다. 그런 작은아버지가 조카가 가출하는 길에 자전거로 쫓아와 달랜다.   

 “아리야, 고만 가자, 어쩌겠냐, 가야제. 저 질이 암만 가도 끝나들 안 해야 “ (208쪽)

 ‘탓을 하는 인생은 이미 루저’라고 냉정히 대했던 작은아버지도 빨치산의 딸이라는 굴레로 날개가 꺾인 아리처럼 그 길을 벗어나보려고 몸부림치다가 주저앉은 것이다.

 

 고추밭에서 두 시간 김매는 것을 못 참는 아버지는 ‘문자농사’에 머물렀다. 이런 아버지를 보며 딸은 ‘혁명가와 인내의 상관관계’를 생각한다.  

“ 인내할 줄 아는 자는 혁명가가 되지 않는다는 게 고등학교 그 무렵의 내 결론이었다. 고통이든 슬픔이든 분노든 잘 참는 사람은 싸우지 않는다. 그저 견딘다,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 들고일어나 누군가는 쌈꾼이 되고 누군가는 혁명가가 된다. 아버지는 잘 못 참는 사람이다. 두 시간의 노동도 참지 못한 아버지가 생사를 넘나드는 지리산의 고통은 어떻게 견뎠을까.” (68쪽)”

  노동이 익숙할 정도로 몸의 숙련기간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 그들은 노동자 농민을 위한 세상에 평생을 헌신했지만 정작 본인들은 노동에 매우 서툴렀다. 머리로 배운 사상을 몸이 검증할  시간을 이 사회는 주지 않아서, 그들도 몸은 봉건제도의 가부장제 남성들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내가 아는 빨치산 장기수 여성들은 그렇게 무력하지 않았다. 농사는 물론이고 참기름장사, 식당도우미, 식모살이(가사 도우미) 심지어 돌 깨는 일을 하면서 남은 생을 꾸려갔다. 아버지 역시 분단된 조국에서 자신이 선택한 삶을 일관되게 살 수 있었던 배경에는 무엇보다 어머니의 옹골찬 생활력이 있었다.                          

 어머니는 37년을 감옥에서 보낸 비전향 장기수가 놀러 와 남의 집 대봉을 무심히 따 먹는 걸 보고 놀라는 딸에게 “애기라 근다. 애기가 머슬 알겄냐, 열셋에 입산해 평생 감옥살이만 했잖애. 세상살이 배울 새가 있었가니” (144쪽) 했던 사람이다. 하지만 남편이 선 보증으로 딸이 1200만 원의 빚을 떠맡게 되자 평소 너그럽고 격조 높던 어머니는 ‘그 년을 찾아 오씨요’라고 채무자에게 ‘년’ 자를 쓰며 펄펄 뛴다. 이 광경을 딸은 “혈육의 관대함으로 해석하여 아름다운 모정이라고 쳐본 들. 이데올로기라는 것이 돈이나 모정 앞에서는 무용지물이구나, 그런 냉정한 분석을 하며”어머니의 악다구니를 보았다.


 작가와 부모님


 유물론자 아버지는 늘 이성적 합리주의자로 살았고 딸에 대해서도 한결같았다. 딸의 외모를 평가하는 데도 아버지 잣대는 엄정했다.

“하의 상은 되겄다. 그러면(수능기준으로) 8등급이구나. 아버지는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되었다. 그렇잖아도 관심 없는 외모를 딱, 끊고 서른셋까지 기초화장도 하지 않았다. (중략) 아버지의 평가에 상처받지는 않았다. 그날, 아버지와 내가 무언가를 사람살이에 아주 중요할 지도 모르는 무언가를 놓친 것 같다는 막연한 느낌 때문이었다. 그게 무엇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 (31-32쪽)

 딸이 간파한 ‘사람살이에 아주 중요할 지도 모르는 무언가를 놓치는 느낌’은 소소한 일상의 중요함, 개성의 존중, 아름다워지고 싶은 인간의 본능 같은 것들이 아니었을까.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 ”사회주의가 망하는 꼴을 보는 심정이 어떠냐 “고 비아냥거리는 딸에게 아버지는 “ 어떤 형태로든 이 세상의 진보에 대한 꿈을 꾸며 사는 것이 사람이고 그 생각에는 “변함없다”라고 말한다. “젊어서 사회주의가 아니면 심장이 없고 나이 들어서도 사회주의자이면 머리가 없다.” 는 말이 있다. 사회주의는 평등의 가치가 다른 가치에 우선하는데 인간의 기본 욕망을 들여다보면 그건 실현될 수 없는 가치라는 것이다. 그러나 경제 성장보다는 분배에 더 관심을 가져 그런 지향에 가치를 두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다.                      

   

 “서른 넘어 집들이에서 내가 마신 위스키는 황홀했다. 마셔보지 않았다면 나는 영원히 술과 맞지 않은 사람인 줄 알았을 것이다. 한계란 그런 것이다. 아버지는 해방 전후의 한계와 여전히 맞서 싸우는 중이었고, 그 사이 세상은 훌쩍 그 한계를 뛰어넘었다... (70쪽)”

 그렇게 맛있는 술을 드렸는데 아버지는 ‘18년 산 시바스 리갈을 소주 한 박스와 바꿔 먹는다. 이는 자본주의 세례를 거부하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고 자신의 선을 넘지 않으려는 신중함으로 비치기도 했다. 여기서 ‘한계’라는 말은 나의 아날로그적 삶의 방식에 대한 경고처럼 들렸다. 딸은 그 시대 사회주의자들은 부패할 기회조차 가져보지 못한 사람들이고 욕망은 한시적으로 유보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인간의 본성에 거스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인정머리 없는 딸은 더 나아가 고색창연한 사상으로 무장된 빨치산 동지들도 자녀들이 고학력이면 한 번 더 보고 사회적 지위가 높으면 한 번 더 쳐다보는 데는 별 차이가 없고 “그들의 친밀감이 퍼스트클래스에 올라탄 돈 많은 자들끼리의 유대감과 별반 다르지 않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딸의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기는 사회주의나 자본주의, 종교를 똑같이 생각의 차이 정도로 본다. 여호와의 증인을 믿으며 가정이 파탄 난 사촌언니, 그 딸까지 같은 종교를 가진 것을 알았을 때 친척들은 “ 니 신세 말아 묵은 그놈의 교리, 니가 사람 종자면 또 가진 않겠지야? “ 라며 힐난한다. 이때도 딸은 비정하게 그 상황을 본다.

 “숙자언니나 아버지나 똑같은 종자였다. 사람들은 아버지를 숙자 언니 보듯 보았을 것이다. 아버지가 긴 감옥살이를 하고도 신념을 버리지 않았듯 숙자언니도 하느님에 대한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중략) 어쩌면 산에서 내려온 후 자식에게조차도 사회주의를 전파하지 못했던 아버지보다 실천력은 비교 불가능하게 탁월했다. 집안에 무려 8명의 여호와의 증인을 탄생시킨 것이다. ”(115-118쪽)

 그러나 유물론자 아버지의 친구관계는 좌. 우의 구분이 없었다. 아버지가 “ 그래도 사램은 갸가 젤 낫아야” 했던 박현우 선생은 조선일보 애독자다. 그 또한 형 누나가 빨치산으로 죽고 본인은 학도병으로 지리산 토벌 나갔던 이력을 갖고 있다. 박현우 선생이 한 숨처럼 토해내는 ‘하염없다 “의 의미를 아직도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아버지는 은공을 갚으려고 입산한 전직 순경에게 ”반동을 어캐 믿고 일을 맡기겠냐 “며 돌려보냈다. 나중에 한 사람이 아쉬운 판에 왜 그러셨냐고 물었을 때 아버지는 담담히 말한다.   

“ 질 줄 알았응께, 질게 뻔한 전쟁이었소. 우리사 이왕지사 나선 몸이제만 그 짝은 사상도 없고 신념도 읎는데 멀라고 뻔히 질 싸움에 끼울 것이요? “(178쪽)

  빨치산은 민중이 내주는 쌀을 받다가 빼앗게 되는 상황이 되었을 때 지는 싸움이 된다고 아버지는 간파했다. 그래서 죽을 목숨 살려준 은혜를 갚는다는 것도 신념이 아니냐고 순경이 물었을 때 사회주의자 아버지는 고개를 저었다.

 “ 아니요, 그것은 신념이 아니고 사람의 도리제. 그 짝은 순경을 그만둔 것으로 사람의 도리는 다 했소. 글면 된 것이요”(180쪽)

 아름다운 장면이다. 그랬다. 제주 4.3 때 중학교 교사였던 인민유격대 사령관도 입산한 어린 제자를 보고 “ 공부나 하지 뭐 하러 올라왔느냐” 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패전이 보이는 그 시기에도 한라산으로 올라간 사람들이 있었다.  

 

 매사 삐딱한 눈으로 보았던 아버지를 새롭게 만난 것은 장례식에서다. 3일장으로 치러지는 장례식장에서 황 사장이 조의금 맡을 사람은 신중하게 쓰라며 “평생 당하고만 사셨는데 가시는 길꺼정 당하시먼 쓰겠는가” 라고 했을 때 딸의 생각은 달랐다. 아버지는 당하지 않으려고 사회주의에 발을 디뎠고 선택한 싸움에서 쓸쓸하게 패배했을 뿐이라고. 그리고 묻는다, 아버지는 십 대 후반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여든둘 된 노동절 새벽, 세상을 떠날 때까지 짊어지셨는데 사회가 개인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이렇게까지 가혹하게 묻는 게 옳은 지에 대해서.  당하기로 따지면 자신이 더 당했다고. 아버지는 선택이라도 했지 나는 태어나보니 빨갱이 딸이었다고. 자식도 억울한 데 당한 사촌의 입장은 더 말할 나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로 해서 육사의 길이 좌절되고 앙상하게 여읜 모습으로 장례식장에 나타난 사촌 길수오빠의 한 마디는 모든 정황을 녹인다.  

“ 왔능가? 못 올 줄 았았네”

“... 와야제”(82쪽)

인간살이의 어려움, 죽음은 모두를 관대하게 한다는 말로 이 대화를 다 설명할 수는 없다. 내게 큰 울림을 주었던 이 “...와야제”는 모든 이즘을 녹이는 휴머니티 정수 같았다.

  

우리 현대사의 상흔들, 베트남 상이군인은 장례식에 와서 목발을 휘두르며 패악을 부렸다. 빨치산으로 죽은 자기 형님이 생각나서였다.

“ 성님은 요레 뽀대 나게 장례도 치르는디 우리 성은 암도 모르게 가부렀잖은가, 난 상욱이 성만 보면 성이 나더라고. 고생은 혓지만 지는 살아있응께...“ (196쪽)

그러나 당사자인 부모는 평등한 세상이 곧 오리라는 희망을 품고 산에서 기꺼이 죽은 사람들을 늘 부러워했다. 쭉정이들만 남아서 겨우겨우 살고 있노라고. 내가 만난 제주 4.3의 생존자들도 그렇게 한탄했다. “사람 닮은 것들은 그때 다 죽고 사람 축에 못 낀 사람만 살아남았다고” 그런 말을 들으며 그 ‘사람 닮은 사람’이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그 궁금증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우파 친구들이 떠난 자리에 좌파 친구들이 몰려오고 있었다”로 표현되는 장례식의 정황은 사회주의자 아버지가 사람을 보는 눈이 이데올로기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긍께 사람이지”, 그 말속에는 모순이 많은 것이 사람이고 그걸 이해하는 것이 다른 이들을 사랑할 수 있는 터전이 된다는 뜻으로 들렸다.


 “ 밀란 쿤데라는 불멸을 꿈꾸는 것이 예술의 숙명이라고 했지만 내 아버지에게는 소멸을 당당하게 긍정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었고, 개인의 불멸이 아닌 역사의 진보가 소멸에 맞설 수 있는 인간의 유일한 취미였다.” (44쪽)

 한시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매 순간 개별성을 훌쩍 넘어 인간 보편에 선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사회주의는 이상인가?  나 또한 이해타산과 공동체 이익이 충돌할 때면 위태롭게 갈등하며 살고 있다.

  고단했던 해방정국에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투신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정지아의 방법으로 쿨 하게 정리되었다. 자서전처럼 몰입되어 읽다가 베트남 노랑머리 소녀 등장은 다소 작위적으로 느껴져. 결말을 미완으로 남겨도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지역사회연구소에서 일하는 학수, 곡성 가농회원 김상욱, 가농출신 군수, 노랑머리 외국인 소녀 이런 이들이 아버지의 바람을 이어 이 사회를 밀고 나갈 것이다.


  소설을 읽는 내내 묵직한 정서가 내면을 받치고 있는 느낌이었다. 정지아 문장은 곱씹을수록 어렵다. 나는 이 소설을 장악하지 못했다. 작가의 사유가 워낙 탄탄해서 문장을 쫓아 따라가다 보면 요즘말로 ‘웃픈’ 상황에 직면한다. 처음에 웃다가 나중에는 울었다.

 소설 속 딸이 살면서 타협하는 지점은 어디일까. 아버지를 넘어섰을까, 아님 비켜섰을까. 그리고 나는?  

 소설 속의 딸은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냐”고 하다가 “ 오죽하면 사람이 그러겠냐”의 아버지 마음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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