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식구 밥상 풍경

by 양경인

12살이 되니, 5명의 동생을 거느린 맏이가 되어 있었다. 두 살 터울로 태어난 우리 6남매는 부모님과 11평 집에서 살았는데 동네 살림살이가 다 비슷해서 좁다는 생각을 해보지는 않았다.

부모님은 보리농사, 콩 농사를 해서 여덟 식구 입을 해결했다. 보리농사는 돗 거름(돼지가 만드는 퇴비)이 있어야 한다. 제주시에 거주하면서도 새마을 운동이 거세게 불기 전까지 우리 집은 돗통시(돼지를 키우는 화장실)를 썼다. 그 덕에 보리밥은 배부를 때까지 먹을 수 있었다.


겨울방학 내내 미역 된장국과 무 넣은 자반고등어조림만 먹다가 아침 밥상에 김이 올라오는 날, 우리들은 어머니 표현처럼 ‘환장’했다. 김은 제주에서 양식을 하지 않아 육지에서 온 것을 사서 먹어야 하는 식재료였다.

아랫목에는 아버지와 어린 남동생이 네모난 밥상을 따로 받고 어머니와 젖먹이 막내 그리고 네 자매는 윗목 동그란 밥상에 둘러앉았다. 김이 펄펄 나는 보리밥을 놋주발에 고봉으로 아버지 상에 올리고 우리 몫은 커다란 양푼에 한꺼번에 담았다.

참기름과 조선간장을 쳐서 동그란 나무 밥상 가운데 턱 놓고, 한 사람에게 12 등분으로 자른 두 장의 김을 각자 받으면 식사가 시작된다. 밥상 앞 5개의 알루미늄 그릇에는 무 된장국이 있었다.

항상 사단은 미욱한 셋째에게서 생겼다. 갑자기 훌쩍이며 김을 분명 다섯 장 밖에 안 먹었는데 세어보니 개수가 모자란다는 것이다. 한 수저 먹고 세어보고 한 수저 먹고 세어보는 것 같더니. 이마에 땀을 송송 내며 부지런히 김을 싸서 먹는 넷째 앞에는 아직도 김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어머니의 중재가 들어갔다.


- 은주(넷째)는 어떵허난(어째서) 김이 줄어들지 안 햄시니(않느냐)

- 난 봉갔수다(주웠어요)

- 어디서 봉가시니(주웠니?)

- 상 아래서 봉가신디 마씸(상 밑에서 주웠는데요)

어리숙한 셋째는 한 수저 먹을 때마다 남은 김을 세다가 상 밑으로 흘렸고, 넷째는 바로바로 주워서 자기 몫 위로 얹어 놓았던 것이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셋째는 눈물범벅이 되고 그제야 몇 개를 양보하는 넷째의 구시렁대는 소리가 들린다.

한편 아랫목 밥상 팀은 아버지가 3살 남동생에게 김에 싼 밥을 한 번 먹여주고 다음 수저는 당신 입으로 가져갔다. 이때 남동생의 눈은 숟가락 방향을 집요하게 따라다녀 아버지는 출근길이 바빠도 공평히 남동생과 한 입씩 씩 먹어야 했다.


젖먹이 막내를 둔 어머니는 둥그런 여자들의 밥상에는 올라온 적이 없는 계란 반찬을 아버지 상에만 올렸다. 알루미늄 그릇에 참기름을 넉넉히 두르고 달걀 두 알을 넣어 뜸 들이는 밥솥에 얹어 반숙한 달걀은 남자들 밥상으로만 갔다. 아버지는 계란 그릇 밑바닥에 살짝 눋은 부분을 긁지 않고 네 자매 밥상으로 넘겼다. 그러면 우리들은 순번을 정해 참기름과 달걀이 바닥에 붙은 양재기에 된장국을 부어 먹는다. 황홀한 맛이었다. 가끔 중간에 생일이나 제사가 끼인 날은 순서가 헷갈려 어머니가 또 심판을 나서야 했다.

자라면서 숟가락이 얌전히 놓인 밥상을 받아 본 기억이 없다. 밥을 먹다가도 나는 서너 번은 일어서야 했다. 행주를 가지러, 모자란 반찬을 뜨러, 동생이 엎지른 국물을 닦으러. 아기를 좋아했던 둘째는 분주한 어머니 대신 막내를 안고 밥알을 입에서 오물거려 유동식으로 만들어서 아기 입에 넣었다. 둘째가 학교를 파하고 대문을 들어서는 순간 막내는 흥분하며 셋째 등에 착 달라 붙었다.


가족이 모여 저녁 먹을 때 손님이 찾아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대개는 남편이 없는 분들로 공문서 작성 등을 할 줄 몰라 아버지게 도움을 청하는 이웃 친지들이었다. 어머니는 내게 수저 한 벌을 내오게 했고, 나는 밥 먹던 숟가락을 놓고 또 일어나야 했다. 극구 사양하는 손님에게 아버지는 '이거는 특별한 거니 맛 좀 보시라'라고 재촉하기까지 하셨다. 어린 내 눈에도 고등어조림이 특별해 보이지 않아 좀 민망했던 기억이 난다. 제주에서 고등어는 흔한 생선이라 고도리(작은 고등어)는 먹지않고 과수밭의 거름으로 썼으니까. 성어기에 몇 뭇을 사다가 배를 갈라 굵은 소금 툭툭 뿌려 항아리 단지에 담아 겨울 내내 먹었던 반찬. 다행히 집에서 농사를 지어 밥 인심은 쓸 수 있었던 것이다. 마지못해 수저를 든 손님도 고등어 토막에는 젓가락이 가지 않고 졸인 무만 먹고는 "정말 잘 먹었다" 고 했다. 하지만 맹세코 우리가 손님보다 나은 음식을 먹지는 않았다.

할아버지가 오시는 날이라야 반지기 밥(쌀과 보리를 반 씩 섞은 밥)을 먹었고 귀한 친척이 오실 때만 돼지고기를 반 근 사 와서 김치찌개를 했다. 그러면 우리 몫으로는 돼지고기 국물밖에 돌아오지 않았다. 식구는 많고 아버지 벌이는 적어서 그저 아끼고 절약해야 하는데 그게 먹거리 자급자족으로 귀착된 것이다.

신기하게도 우리 자매는 보리밥에 된장국만 먹었는데도 변변한 감기 한 번 안 걸리고 자랐다. 아파서 누워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동생이 아팠을 때 어머니가 제사 때나 먹는 곤쌀(멥쌀)로 싸라기눈처럼 퍼지는 흰 죽에다 홍시까지 먹이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밥 한술의 수고로움을 모질게 가르쳤다. 2홉들이 소주병에 담은 고소한 참기름에 비벼 차조 섞은 보리밥을 김에 싸서 먹었을 때의 행복감은 결혼 후 삶의 복병들을 이겨나가는 단단한 뿌리가 되어주었다. 사서 먹는 것은 돈이 있어야 하니 우린 그때 흔한 진주햄 소시지를 한 번도 못 먹었다. 근처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미역, 톳, 모자반을 말려서 상비 식품으로 두고 먹거나 콩자반, 마늘장아찌, 콩나물을 주로 먹으며 컸다.

어리숙한 셋째는 골목에서 종일 줄넘기하다 배 고프면 동네 아이들을 몰고 와서 볶은 콩 넣은 풋마늘장아찌를 반 단지나 먹어치운 일도 있었다. 콩만 골라먹다가 짰는지 세숫대야를 갖다 넣고 씻으며 먹다 흩어진 현장은 장관(?)이었다.


계란 반숙 하나 제대로 못 먹고 자란 네 자매는 성장하여 여러 분야에서 제 몫을 하며 살고 있다. 매사에 미숙하지만 정직했던 셋째 동생은 윤리교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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