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노래

by 양경인

내 의식이 눈 뜰 때부터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노래로 떠오른다. 늘 우리가 잠들고 난 후에야 귀가하시는 아버지를 기다리며 어머니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막내를 재우며 어머니가 부르는 노래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누님 누님 나 장가보내 주

까마귀 가치 울고 호박꽃 피는 내 고향의

어여쁘고 순진한 아가씨가 나는 좋아...”


새 신발을 사달라고 조르는 내게는,


" 여보야 당신아 구두나 사주소

무슨 구두 빼딱 구두 뒤 높은 신으로

구두를 신다가 자빠나 지면은

너도 망신 나도 망신 가부시끼 망신"


이런 노래도 농을 치면 나는 할 수 없이 닳데로 닳은 검정고무신을 당분간 더 신어야겠다고 포기하고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나중에 그 노래들이 한국전쟁 피난지 부산에서 처녀시절을 보낸 어머니가 귀동냥한 노래라는 것을 알았다.


첫아기를 낳고 백일쯤 되었을까, 친정어머니께 아기를 맡기고 긴한 볼일로 외출했다가 막 현관을 들어서는 데, " 웡이자랑 웡이자랑 자랑 자랑..."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막내가 스물서넛 되었을 때니 이십 년 만에 들어보는 자장가였다. 몹시 애조 띤 음색이어서 잠시 뭉클했지만 모른 척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아기가 그동안 몹시 보채었는지 아기구덕 머리맡에는 염주며 불경 책이 동원되어 있었다.

그 후 손자 손녀들이 꾸준히 늘어나 셋째 동생이 조카를 며칠 어머니께 맡기고 찾아가는 날, 오랜만에 식구가 모여 외식 후 노래방에 갔다. 나도 어머니도 노래방은 그때 처음이었다. 그곳에서 다시 몇 년 만에 어머니가 부르는 노래를 들었다. 아니 한 곡을 끝까지 부르는 것을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그날 어머니는 "홍도야 우지 마라"를 부르셨다. 그때 나는 작은 아이 오줌을 누이러 화장실에 갔다가 룸 밖으로 흘러나오는 그 노래를 들었다.


"사랑을 팔고 사는 꽃바람 속에

너 혼자 지키려는 순정의 등불

홍도야 우지 마라 오빠가 있다..."


평소에 삼류 유행가요라 생각했던 그 노래가 전혀 다른 곡이 되어 가슴을 후벼 파는 것이었다. 전통민요에 트로트 가락이 묘하게 뒤섞여 있었지만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고 오히려 "홍도야.."의 격조를 한층 높이고 있었다. 그 노래자락 속에는 어머니가 걸어오신 한 평생이 들어 있었다.


제주 4.3으로 12살에 고아가 되어 부산 영도 바닥에서 샛별 보며 통조림 공장에 다니고 저녁별 등에 지고 자취방으로 돌아오던 어머니의 외로운 청춘. 스무 살에 결혼하며 6남매의 생계를 거의 혼자 짊어졌던 드센 중년기, 천금 같은 오라버니가 대구 형무소에서 총살되자 외가 봉제사를 맡은 어머니는 외할머니 제사만 돌아오면 눈물바람을 뿌리셨다. 신산한 삶의 역정이 한이 되어 곰삭아 흐르던 저 가락. ‘애간장을 녹인다'는 말을 이때처럼 실감할 때도 없었다. 룸 안으로 들어가니 어머니는 구성지게 3절을 뽑고 있었다.


" 홍도야 우지 마라 굳세게 살자

진흙에 핀 꽃에도 향기는 높다

네 마음 네 행실만 높게 가지면

즐겁게 웃을 날이 찾아오리라"


늙은 나무껍질 같은 손으로 마이크를 꼭 쥐고서 깊은 주름살이 잠시 펴지며 흐르듯 꿈꾸듯 부르는 노래....

미어지는 가슴을 누르고 " 이 노래 어머니 십팔번 해도 되겠다" 너스레를 떨었다. 마음속으로는 어머니 생전에 다시 듣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몇 년 후 나는 임방울의 창을 우연히 듣다가 어머니 노래와 비슷한 감동을 받았다. 식민지 시대 민족의 애환을 주물렀다는 명창 임방울. 인간사 슬픔의 내력을 알려거든 임방울의 “쑥대머리”를 들을 일이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휘돌아가는 인생의 어느 고비에서 운명이나 숙명의 단어를 한 번쯤 떠올려 본 사람은 흥부가의 한 대목 "가난이야, 가난이야, 원수년의 가난이야..."로 시작되는 “가난 타령”의 서러운 애원의 가락을 음미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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