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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개연성 Aug 23. 2017

라이언 신드롬

20대가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에 대하여




눈물이라구

처음에는 좀 너무한 것 아닌가 생각했다. 자신의 눈물로 이루어진 호수에 누워 있는 라이언이 나의 눈에는 한없이 슬퍼 보이는데, 엄마의 눈에는 ‘그저 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니. 그런데 다시 보니 우스꽝스러운 모습이기는 하다.


사실 라이언은 탄생부터 좀 그랬다. 2016년 1월 본격 영입된 이 캐릭터는 ‘사자’인데 갈기가 없고, 표정은 무뚝뚝한데 무지(단무지)와 춤을 추고 화가 난 튜브(오리)를 쓰다듬어 주며 친구를 잘 챙긴다. 그런데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우스꽝스러움이 어째서인지 우리의 눈에는 한없이 사랑스러워 보인다. 그래서 새로운 카카오톡 캐릭터의 영입에 많은 사람들이 반발했음에도 영입되자마자 많은 사람들의 최애 (최고 애정) 캐릭터가 되었다나 뭐라나.


라이언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애정을 받게 된 이유를 좀 더 따져보자. 많은 이들이 생각하듯 그저 ‘귀엽게 생겼기’ 때문이라는 설명은 너무 안일하다. 나의 경험을 이야기하자면, 처음엔 얼핏 보고 ‘뭐야 그냥 곰돌이잖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라이언이라는 이름을 듣고 그가 실은 갈기가 없는 사자라는 것, 그리고 그것이 그의 콤플렉스라는 것을 알자 절로 마음에 애정이 샘솟으며 껴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자라면 무릇 당당해야 하는데 갈기도 없고 자신의 콤플렉스를 숨기지도 못한다니, 얼마나 가엾고 안쓰러운지.


다시 눈물 위의 라이언 이야기로 돌아가서. 라이언은 왜 저렇게 울고 있을까? 그것은 그가 무뚝뚝한 표정의 사자이기 때문이다. 그의 눈물로 이루어진 호수 위에 누워있는 것은 라이언이 사자의 위엄을 잃지 않으면서도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들이 (혹은 동물들이) 슬플 때 얼굴을 찡그리며 엉엉 울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라이언은 분노도 자기 방식으로 표현한다. 표정 변화 없이 술병을 깨거나 다 쌓은 레고를 무너뜨린다. 우리는 그의 제스처로 라이언이 화를 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만, 그 표현 방식의 신박함에 웃음이 난다. 그렇게 갈기 없는 수사자 라이언은 우려와는 달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울기도 하고, 분노도 표출하고, 친구들과도 어울리며, 나름 잘 지내는 것 같다. 라이언의 사랑스러움은 바로 이러한 설정들의 조합에서 나온다. 무언가 모자란데 (콤플렉스), 감정을 자기 식으로 표현하는 신선함 (혹은 우스꽝스러움), 그것을 애써 숨기지 않고 자못 잘 지내는 씩씩함 (혹은 초연함).



엄마가 이해하지 못했던 라이언의 슬픔을 곧바로 캐치할 수 있었던 것, 그것에 우리가 애정을 느끼고 열광한 것은 라이언의 모습이 현 20대의 감성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확대해석일까? 엄마에게는 단지 ‘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도 사실은 처절한 슬픔의 표현이라는 것을 우리는 본능적으로 알아챌 수 있다. 그것은 마치 라이언처럼, 오늘날 대한민국에 사는 20대라면 무릇 콤플렉스 한 둘은 있고, ‘헬조선’ 같은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헬조선’에서 태연히 나름 잘 지내며, SNS 상에서 우리네 식으로 때때로 우스꽝스럽게 감정을 표현하곤 하는 것과 관련 있을는지 모른다.



이 시대 청춘의 감성 – 장기하에서 혁오까지


20대 감성은 무엇일까? 꾸준히 이야기되어 온 아날로그 감성, 응답하라 시리즈의 30대 감성, 386 세대 감성과 달리 ‘이 시대 청춘’의 감성은 거의 이야기된 적 없다. 오늘날 20대에게 우리를 우리로 묶을 수 있는 끈끈한 유대가 없다는 것이 아마 주된 이유일 것이다. 2016년 1월 출간된 소설가 김사과의 20대를 담은 산문집 <0 이하의 날들>에서 그는 ‘이 시대의 청춘’들이 사회 구조만을 탓하며 무기력에 빠져 있다 말한다. ‘망했다’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고 서로의 ‘망함’을 구경거리나 웃음거리로 유희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 무기력에 빠져 있을까? 아니다. 우리는 우리 식대로 슬픔을 표현하고 있다. 가수 장기하는 뭐라고 울부짖었는가?


달이 차오른다 가자


어디를? "달이 맨 처음 뜨기 시작할 때부터 준비했던 여행길을/ 매번 달이 차오를 때마다 포기했던 그 다짐을", 누가? "말을 하면 아무도 못 알아들을지도 몰라/ 지레 겁을 먹고 벙어리가 된 소년"이.


따져보면 소년의 꽤나 처절하고 비장한 다짐인데도 장기하의 뒤에서 선글라스를 쓰고 춤을 추는 미미 시스터즈, 후렴구에 “워어어어”를 울부짖는 장기하의 사뭇 진지한 표정에 아무도 그의 노래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저 우스꽝스럽게만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그가 기존 질서를 거부하며 이해할 수 없는 삶의 양식을 비스듬히 바라보는 것을 그의 식대로 표현한 것이다!


초창기의 장기하와 얼굴들. 장기하는 이렇게 엉뚱하고 처량한 이미지였다. 아이유와 사귀면서 이미지가 완전히 변했지만 (!)


이 노래의 화룡정점은 장기하가 “오늘도 여태 껏처럼 그냥 잠들어 버려서 못 갈지도 몰라”라고 나지막이 읊조리는 부분이다. 그처럼 “달이 차오른다, 가자” 하며 몇 번이나 비장하게 이야기했으면서 어째서인지 여지를 남겨둔다. 그래서 소년은 길을 떠났나, 여태 껏처럼 그냥 잠들어 버렸나? 그건 알 수 없다. 마치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는 채 달이 차오르는 것을 보는 우리들 모습 같다.


장기하가 무기력하고 길 잃은 청춘의 모습을 대변했다면, 93년생의 ‘진짜’ 청춘들이 모여 자신의 이야기를 노래로 쓴 밴드 혁오는 어떨까. ‘뉴 타입 인디 아이돌’로 불리며 데뷔 일 년 만에 스타 반열에 오른 혁오의 인기 비결은 그들만의 뚜렷하고 트렌디한 스타일만은 아닐 것이다. 혁오의 노래는 누군가에게 말로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들을 담고 있다.


사랑도 끼리끼리 하는 거라 믿는 나는 좀처럼 두근두근 거릴 일이 전혀 없죠
집에서 뒹굴뒹굴 할 일 없이 빈둥대는 내 모습 초라해서 정말 죄송하죠
혁오, 위잉위잉
숨어있는 날 봐도 쳐다보지 마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지 않아
이방에서 내가 사라진대도 그 아무도 없어진지 모를 거야
혁오, Panda Bear


그들의 노래에는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허무함과 외로움, 무기력, 인간관계에서의 고민이 있다. 장기하의 비장한 다짐은 옅어지고, 별 볼일 없는 청춘에 대한 담담한 그래서 어쩐지 더욱 서글픈 자백만이 남았다.



라이언이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이 눈물의 호수 위에 누워있는 것이라면, 미래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없는 상황에 불안을 표현하는 우리들 나름의 방식은 ‘자조’이다. 스스로의 상황을 자조적으로 말하며 유희의 거리로 쓰는 것이다. 지금 당장 페이스북에 접속해 보라. 친구들이 얼마나 자조적 표현을 많이, 일상적으로 쓰는지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고백하건대 나도 SNS에 자조적 어투의 글을 즐겨 쓴다. ‘나는 휴학생인데 왜 매일 신촌에 오는가… 휴학하고 다들 뭐하지…’라든지. ‘한 시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여휴에 누워서 우르릉 쾅쾅하고 비 내리는 소리를 들었다… 마음이 참 편안하군… 뭔가 잊은 것 같지만 내 착각이겠지 하하’ 이라든지. (2014년에 페이스북에 쓴 글이다.) 이제 생각하니 나는 이것이 불쌍하거나 비참한 나의 처지를, 남들이 보기에 불편하지 않으면서 나름 웃기게,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지옥불반도 지도까지 나온 ‘헬조선’이라 비유하는 대한민국, 취직이 안 되는 문과생의 사과 ‘문송합니다’도 우리의 처지를 자조적으로 표현한 신조어이다.


‘자조’의 사전적 정의는 ‘자신을 비웃다’이다. 자신을 일상적으로 비웃는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 우리는 심지어 콤플렉스를 숨기지도 않는다. 어떻게든 국가적, 개인적 콤플렉스를 숨기려 치열하게 살았던 윗세대와는 다르다. 사회를 뒤엎겠다고 화염병을 들고 길거리에 나서지도 않는다. 기껏해야 인터넷에 한탄하는 글이나 싸지른다. 누군가의 눈에 이것이 ‘무기력’과 동일한 것처럼 보인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무언가 무모하게 시도하기에는 그 기회비용이 너무나 큰 현실 아닌가. 그리고 어쩌면 그처럼 ‘못난’ 스스로를 본인도 인지하고 있기에 우리는 보듬기만 해도 모자란 자신을 냉소하는 것 아닐까.


‘20대 감성’을 설명하고자 했지만 사실 그런 것이 존재하기는 하냐고 묻는다면 확언할 수 없다. 세대론으로 오늘날 20대를 설명하기에는 무리라는 지적은 일견 타당하다. 문유석은 <개인주의자 선언>에서 “지난 시대의 기준을 들이댄 ‘세대론’으로 현재를 완벽하게 설명하려 드는 건 어리석다. 처한 입장의 차이가 하늘과 땅처럼 다른 다양한 개인들을 ‘세대’라는 카테고리로 묶는 것이 얼마나 큰 의미가 있을까.” 라며 오늘날 20대를 차별에 찬성하는 괴물이 되어버린 세대로 보는 것도, 모든 것에 달관하여 절망의 나라에서도 행복한 젊은이로 보는 것도 모두 성급하다고 이야기한다. 이 모든 것은 그저 시대상의 한 단면일 뿐이라는 것이다.


차별에 찬성하는 괴물이 되어버린 세대
오찬호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참조. 오늘날 20대는 수능 점수를 거의 유일한 공정 경쟁의 결과로 받아들여 ‘인서울’과 ‘지방대’에 대한 취업 시 차별은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더 높은 곳’에 있는 학생들이 자신을 멸시하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기보다, 스스로 자신보다 ‘더 낮은 곳’에 있는 학생들을 멸시하는 편을 선택한다.

절망의 나라에서 행복한 젊은이
루이치 노리토시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참조. 일본 젊은이들은 고도 성장기의 버블이다 꺼진 지금, 미래에 대한 희망이 별로 없기 때문에 현실에 만족하고 있다고 한다. 실제로 오늘날 일본 젊은이들의 행복지수는 근래 40년 중 최고치란다. 이에 대한 한 학자의 해석에 따르면, 인간은 미래에 더 큰 희망을 걸지 않게 되었을 때 자신의 처지에 만족한다고.


그래서, 나는 “이것이 오늘날 20대다”라고 말하는 대신 앞서 설명한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청춘의 단면을 ‘라이언 신드롬’이라고 이름 붙이려 한다. 자신의 처지를 자조하고, 우스꽝스럽게 표현하며, 슬픔도 놀이처럼 하는 것 말이다.



라이언 신드롬의 이면 – 자학의 정치학


차라리 듣지 못한 편이 내겐 좋을 거야/ 차라리 보지 못한 편이 내겐 좋을 거야” (‘위잉위잉’)라는 혁오의 노래 가사처럼 우리는 때때로 차라리 기대하지 않기를 선택한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성장기에서 침체기로 접어드는 시대에 태어난, 너무 많은 사회적인 기대가 무너지는 것을 지켜봤으며 (명문대만 오면 잘 살 줄 알았는데, 대학교만 나오면 잘 살 줄 알았는데) 또한 앞으로 지켜봐야 하는 세대인 것과 관련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기대하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확언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이야기하기엔 안 그래도 불안한 삶에서 희망마저 사라지는 것 같아 두렵다. 이런 심리 전반은 어찌나 복잡 미묘한지, 다른 세대는 물론 우리 스스로도 알기 어려운 것이다. 알 수 없으니 제대로 대처할 수 있을 리 없다. 결국에는 그저 웃어 버린다. 슬프지 않기 위함이다. ‘똥송 합니다(동양인이라서 죄송합니다라는 뜻의 신조어)’라니, 슬프기 이전에 웃기지 않은가. 이처럼 유머는 비참함을 웃음으로 승화시키지만, 때론 본심을 숨기기도 한다.


자조를 유머로 승화시킨 예능인이라면 유병재가 있다. 그는 자세히 보면 꽤나 미남형인데도 (잘 모르겠다고? 정말 자세히 봐야 한다.) 작은 체구와 키, 어색한 수염, 전반적으로 불균형한 비율 때문에 뭘 하든 개그 느낌이 나고 우스꽝스러워 보인다. 뿐만 아니라 유병재의 억울, 고통, 괴로워하는 연기는 정말 ‘리얼’해서 오버스럽기만 한 보통의 개그맨의 연기와는 클라스가 다르다는 평을 듣는다. 어쩌면 그건 인터넷에서 웃긴 UCC를 올리다 방송 작가가 된 그의 이력과 관련 있을지 모른다. “그가 극한직업-매니저 편에서 보여준 피학적 개그는 단순히 스타일의 문제가 아니라 유병재의 정체성과 연결된 것으로 보입니다. 전공을 살리지도, 개그맨 공채에 합격하지도 못한 그는 직업의 이름이 가진 권위를 누려본 적이 없습니다. 대신 그는 가지지 못한 권위를 갈망하기보다는 오히려 탈권위적인 개그를 통해 자신만의 웃음 공식을 만들어냈다. (출처 아이즈)”라는 설명처럼, 유병재는 스타일뿐 아니라 정체성까지도 자학 개그에 관한 한 독보적인 캐릭터이다.



그는 ‘혹독한 연기 수업’을 지향하는 리얼리티 예능 프로그램 <연기수업>에 출연한 적 있는데, 첫 방송에서 그의 말실수에 관한 에피소드가 비중 있게 다뤄졌다. 자기소개 시간, 스승을 맡은 박신양이 그의 제자들에게 “여기 왜 왔냐”라고 묻자 유병재가 있어 보이는 말로 장황하게 설명한다. 박신양이 추궁하자 유병재는 변명과 얼버무림을 계속하다 “최민식의 배우학교였으면 최민식 선생님에게 배웠을 것이다”라며 “(박신양이) 합격하셔서 배우게 된 것”이라고 무리수를 둔다. 박신양은 표정을 찌푸리고, 분위기는 점차 살벌해져 간다. 이후 박신양의 혹독한 꾸지람에 유병재는 극도로 긴장해 급기야 쓰러져 휴식을 취하기에 이른다.



“합격하셔서”라는 대답은 유병재 특유의 장난스럽게 핵심을 피해 가는 화법이 그대로 드러난 대답이었다. 다른 때처럼 웃고 넘어갈 법도 한데 박신양은 그렇지 않았다. 대신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가 그토록 유병재를 몰아붙인 이유는 장난스러움으로 본심을 숨기려는 그에게 진심을 듣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도 페이스북에 자조적인 글을 쓰는 너에게, 그리고 나에게 묻는다. 그래서 네가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데?


“사실 나에게도 박신양 같은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어”라는 지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오늘날 20대가 필요한 것은 어쩌면 자조적 표현, 장난스러운 표현에 숨겨진 진심을 털어놓게 만드는, 슬픔이라는 놀이에 숨겨진 진짜 슬픔을 마주 보게 하는 무언가 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문득 했다. 설사 그것이 누군가는 이해하지도 못하는 슬픔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라이언 신드롬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


사실 혁오가 옳다. 우리는 정말 별 볼 일 없다. 장기하가 이야기하던 엉뚱한 패기조차 남아있지 않은 우리는 시도 때도 없이 무기력하고 또 외롭다. 혼자가 편하다고 이야기하면서 은연중에 타인의 애정을 갈구한다. 직설적인가 하면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투덜대는가 하면 누구에게도 미움받기 싫어한다. 약한 면을 드러내지만 슬픈 마음은 감춘다. 괴롭지만 웃어넘긴다. 이처럼 미묘하기에 고민한다. 종국에는 뭉뚱그려버린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이 라이언을 닮았다면, 어쩌면 우리가 라이언을 사랑스럽게 여기는 것만큼이나 우리들도 그런 존재이지 않을까. 다른 세대들에게서 이해받지 못하고, 스스로마저 자조할지언정, 우스꽝스러운 모양새로 오늘도, 이번 달도, 올해도 꿋꿋이 살아가는, 기뻐하는, 슬퍼하는 우리말이다. 설사 때때로 개드립을 치며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행동을 하더라도.




이 글은 2016년 3월 1boon에 소개되었습니다.
http://1boon.daum.net/misfits/56e18b88a2b8815c35760f86?embed=1&view=sim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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