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허영만의 <꼴>을 읽고 있다. 처음에는 틈틈이 재미 삼아 읽던 것인데 나중에는 그 나름의 논리에 푹 빠져 버렸다. 이를테면 코는 ‘나’를 상징하는데, 그래서 코가 높고 클수록 자의식이 강하며 그렇기 때문에 서양인은 동양인에 비해 이기적이라는 논리가 있었다. 서양인이 개인주의적인 것이 큰 코 때문이라니?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였다. 그렇지만 어쩐지 그럴 수 있을 것만 같다! 이렇게 전혀 과학적인 근거가 아님에도 ‘왠지 그런 것 같아’하는 감상이 모여 관상학은 묘한 신빙성을 갖게 되었다. (물론 백 프로 신뢰하는 것은 아니고, 반쯤 재미로 반쯤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별자리나 혈액형처럼.)
관상을 접하고 나서의 가장 큰 변화라면 그동안은 사람의 얼굴을 볼 때 “예쁘다”와 “못생겼다”로 평가했던 미적 평가 기준 외에도 ‘관상학적인’ 기준이 추가된 것이다. 관상학에서 말하는 귀한 얼굴은 우리가 평소 생각하는 예쁜 얼굴과는 거리가 멀다. 눈은 쌍꺼풀이 없고 긴 눈이 좋으며, 턱은 말년을 상징하니 도톰하고 둥글어야 말년이 평온하다. 코는 콧방울이 둥글어야 재물이 쌓이며 너무 날카롭고 뾰족한 코는 재복에 좋지 않다. 뿐만 아니라 살은 많을수록 ‘귀하고’ ‘복이 많은’ 것이다. 그래서 살이 오를 때는 복이 들어올 때이며, 다이어트를 하는 것은 자신의 복을 자기가 차 버리는 것이라 한다. 충격이었다. 살이라면 무조건 빼야 하는 것, 부정적인 것으로만 여겼던 나에게는 무척 신선한 견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나친 물살은 좋지 않다고 한다.)
이렇게 관상학적인 기준을 갖게 되고 난 후로 늘 보던 사람의 얼굴을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되었는데 얼굴이 동글동글한 친구를 보고 ‘복이 많은 얼굴이군’이라고 생각한 것이 단적인 예이다. 그 전에는 한 번도 그런 식으로 생각한 적 없었다. 뿐만 아니라 타인의 얼굴을 관찰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는데 그러다 보니 사람의 얼굴이라는 것이 참 재미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눈썹이 호랑이 같고, 어떤 사람은 코가 참 도톰하고 좋은 빛이 돈다. 얼굴빛이나 목소리, 눈빛도 관상에 모두 포함되는데, 어쩜 그렇지 싶을 정도로 모두 다 가지각색이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사람의 얼굴을 평가하는 기준이 참 획일적이다. 이렇게 다양한 눈 모양이 있는데 쌍꺼풀이 있는 큰 눈은 “예쁜 눈”, 아닌 눈은 통틀어 “못생긴 눈”으로 말해버리니 말이다.
최근 ‘개성적인 얼굴’이 주목받는 것은 그런 점에서 의미 있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도깨비>로 다시 한번 주목받고 있는 여배우 김고은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예쁜’ 얼굴은 아니다. 하지만 특유의 순수하고 청량한 분위기 때문에 드라마에서 연속해 주연을 맡을 수 있었다. 또 이제는 브라운관에도 자주 보이는 한혜진이나 김진경 같은 여자 모델들, 글래머러스한 몸매로 많은 외국 팬을 거느린 화사퀸(마마무 화사의 별명)같은 캐릭터가 여자들의 워너비가 된 것도 최근의 일이다. 이들은 모두 독보적인 혹은 독특한 캐릭터를 지녔는데 그 캐릭터에 개성 있는 얼굴이 한몫했음은 의심의 여지없는 사실이다. 김고은이 아닌 그 누가 지은탁을, 홍설을, 은교를 할 수 있었을까? 쌍꺼풀이 진 큰 눈, 높은 코, 브이라인 턱이 언젠가부터 너무 흔하고 개성 없게 느껴지는 나로서는 앞으로 점점 더 많은 ‘개성 있는 얼굴’이 나오고 주목받길 내심 기대한다.
얼굴에 대해 주야장천 얘기했지만, 사실 정말 하고 싶은 말은 장소에 대한 것이다. 관상에 대해 생각하며 자연스럽게 ‘장소’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공간이 그저 물리적인 개념으로써 존재하는 것이라면, 장소는 공간에 사람이 있음으로써 의미가 창출된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공간에 비해 장소가 더 ‘특별하다.’ 공간이 장소가 될 때 ‘장소감을 갖게 된다’라고 하는데, 이는 “낯설던 곳이 친숙한 곳으로 변해감에 따라 우리들만의 특별한 감정이 묻어있는 장소로 느끼게 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처음 ‘장소감’이라는 표현을 접했을 때, 나에게는 어디까지나 생소한 개념이었기 때문에 관련한 몇 가지 경험들을 생각해보았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중, 고등학생 때의 기억이다. 학교라는 공간은 누군가에게는 그리운 또 누군가에게는 끔찍한 장소겠지만, 대한민국에서 공교육을 받은 대부분의 사람, 즉 학교에서 청소년기 대부분을 지냈던 우리에게 학교가 어떤 ‘장소감’을 가지고 우리 정체성의 일부가 되어 남아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만약 학교가 단순한 공간이었다면, 체육 시간 모두가 나간 뒤 교실의 적막함, 새 학기의 어색함과 부산스러움, 비 오는 날의 어두컴컴한 교실의 냄새, 나른한 여름날 창가로 들어오는 한 줄기 바람, 야자실의 무겁고 탁한 공기와 같은 것 등이 왜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나겠는가. 학창 시절로 결코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를 생각하면 바로 엊그제처럼 생생하며 그리운 기분이 드는 것은 아마 그 장소가 우리에게 주었던 특별함 때문일 것이다.
장소에 애착을 갖게 되고 그 장소의 깊은 유대를 가진다는 것은 인간의 중요한 욕구이다.
라는 에드워드 렐프의 말에서 재미있는 지점은 장소감이 인간의 ‘욕구’라는 해석이다. 내가 장소에 대한 욕구를 처음 발견한 것은 대학에 입학하고 난 후다. 연세대학교에는 정문을 들어서면 펼쳐진 백양로, 고풍스러운 외관의 연희관, 번화하고 시끌벅적한 신촌 등 눈에 띄고 특별한 ‘공간’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중 나에게 ‘장소감’을 주는 것은 없었고, 그래서 처음으로 무언가 결핍되어있다, 외롭다고 느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학창 시절과 비교했을 때, 대학 생활의 공간들은 장소감을 가지기 훨씬 어려웠다.
그러던 중 교환학생을 가게 되었다. 일 년간 뉴질랜드의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나는 다시금 ‘장소감’을 발견했다. 뉴질랜드에서의 기억을 회고하면 가장 먼저 뉴질랜드 특유의 변화무쌍한 날씨와, 내가 생활했던 오래된 기숙사 곳곳의 냄새, 공기, 분위기 같은 것들이 생각난다. 특별할 것 없는 공간들, 그 공간에서 있었던 일상, 그 순간순간들이 학창 시절과 마찬가지로 무척 생생하고 그립다. 도대체 이 공간들이 가진 무엇이 이토록 공간을 ‘특별하게’ 하는 것일까. 무엇이 나를 이토록 그리움에 젖게, 센티멘탈하게 하는 것일까. 나는 그 이유를 오랫동안 생각했지만 끝내 알 수 없었다.
<꼴>은 시작에서부터 얼굴을 하나의 거대한 자연에 비유한다. 코와 이마, 광대, 턱은 다섯 개의 산이고, 눈과 입은 골짜기다. 산이 적당히 높고, 골짜기가 적당히 깊어야 풍경이 아름답고 조화로운 것처럼 사람의 얼굴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사람의 얼굴을 풍경에 비유하는 건 관상학에서 일반적인 것처럼 보인다. 이를테면 눈썹은 관상을 볼 때 중요한 것 중 하나인데, 눈썹 털 하나하나가 나무와 같다. 그래서 너무 털이 무성하면 빛이 들지 않는 숲처럼 좋지 않다. 적당히 길며 눈썹 털 사이의 길이가 적당해 속이 보일 정도로 맑을 때, 하나하나가 갈대와 같이 수려하고 가지런할 때 좋은 눈썹이라 한다.
왜 얼굴을 자연에, 풍경에 비유하는 것일까. 재미있게도 에드워드 렐프의 <장소와 장소 상실>에도 장소를 얼굴에 비유한 구절이 있다.
“소속감이나 정체감이 생기는 토대가 되는 인간적 접촉은 대개 같은 땅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한다(Minar&Greer, 1969).”는 단순한 이유로 공동체를 강조하는 것은, 장소 경험에서 물리적 환경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부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주변의 경관이나 장소에 항상 주목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해서 경관이나 장소가 무의미해지지는 않는다. 비슷한 방식으로, 외모가 개인의 정체성에 중요한 부분이긴 하지만 우리는 대개 자신의 외모나 친구의 외모를 매우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에드워드 랠프는 무장소성이 현대 사회의 심각한 문제라고 얘기하는데, 무장소성의 원인이 다른 무엇도 아닌 ‘경관의 밋밋함’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현대 사회의 경관은 “평범하고 평균적인 경험으로서의 가능성만을 제공하는 경관”이며, 이런 획일성 때문에 인류가 현재 무장소의 힘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위의 인용문을 이해하려 노력하며 조금 더 읽어보자 – 장소감을 갖는 데에 공동체, 즉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중요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건 단순히 “인간적 접촉이 같은 땅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차라리 “공동체가 장소의 정체성을, 장소가 공동체의 정체성을 강화하며, 이 관계 속에서 경관은 공통된 믿음과 가치의 표출이자, 개인 상호 간의 관계 맺음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즉, 공동체와 장소가 상호작용을 통해 경관을 바꾸어나가기 때문에, 그런 특수함으로 인해 공간이 장소성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콩고의 음부티 피그미족은, 현재의 우호 관계나 적대 관계에 따라 마을에 있는 움막의 출입구 방향을 정한다고 한다. 장소와 공동체의 관계가 경관에 표출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경관은 ‘커뮤니케이션 매체’이자 ‘공동체를 드러내는 것’이다. 에드워드 랠프는 이런 물리적 환경, 즉 경관의 중요성이 간과당하고 있다고 보았다. 마치 우리가 외모가 개인의 정체성에 중요한 부분임에도 너무 당연시하는 것처럼 말이다.
에드워드 렐프의 주장과 관상학의 공통점이 있다면 겉모습(외양)을 중시한다는 사실이다. 어떤 사람의 인격이나 운명 등을 판단할 때, 일반적으로는 그 사람의 지능이나 직업, 성격, 가치관, 인간관계, 과거의 인생 등을 봐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관상학에서는 그 사람의 외양, 즉 ‘얼굴’에 모든 것이 드러난다고 말한다. 물론 사람의 얼굴을 정확히 읽는 것은 매우 까다롭다. 이를테면 성품은 사람의 눈빛에서 드러나는데, 눈동자에 빛이 있으면 정신이 맑고 총명하지만, 이 빛이 밖으로 넘치면 그건 ‘살기’가 된다. 또 사람의 덕, 즉 마음 씀씀이는 얼굴의 주름으로 알 수 있는데 이 주름은 숙련된 관상쟁이라도 알아보기 어렵다고 한다. 이런 주장들은 신빙성은 젖혀두고라도 무척 파격적이고 흥미롭다. 관상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얼굴의 생김새가 (미적 기준과는 별개로) 개인을 드러내는 데에 중요한, 어쩌면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줄곧 실용성 면에서만 평가되어온 장소에 있어서도, 경관은 어쩌면 생각보다 훨씬 중요할지도 모른다.
현대 사회- 특히 한국 도시의 경관은 어떨까? 콩고의 음부티 피그미족과 비교해봤을 때, 경관은 장소와 공동체의 관계를 충분히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아니, 장소랑 공동체의 관계는커녕 각각의 요인을 드러내는 데에도 실패했다. 나는 작년에 처음으로 제주도로 여행을 갔는데 토박이 서울 사람으로서 제주시가 서울과 어떻게 다를지 무척 기대했다. 그런데 막상 제주시에 도착하자 서울이랑 별반 다를 바 없어 무척 실망했다. 섬이라는 특이한 장소적 정체성이 있음에도 말이다. (제주도의 역사는 한국사와 따로 기재해서 쓸 수 있을 만큼 대륙의 것과 또 다르다. 공동체의 성격 역시 다를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는 지점이다. 그런데도 제주시에는 그것이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서귀포시는 조금 달랐는데, 그래서 좋았다.) 대구, 전주, 부산 등 한국의 어느 대도시 혹은 소도시를 가도 경관이 비슷하다. 나는 그것이 굉장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한편 뉴질랜드는 도시마다 특징이 있어 방문하는 재미가 있었다. 인구가 가장 많은 오클랜드는 진정한 국제도시라고 생각될 만큼 모든 인종이 모여 있는데, 그래서 대도시의 모습을 갖추었으면서도 각국의 문화권에서 즐겨 찾는 다양한 식당가나 상점가가 있었다. 수도이자 국회가 있는 웰링턴은 바람이 많이 부는 도시로 유명했는데 그래서 건물을 높게 지은 것이 거의 없었고, 몇 년 전 세계적으로 화제가 될 만큼 큰 지진이 났던 크라이스트처치는 도시 곳곳에 희생자들을 기리는 공간을 설치했다. 바다 옆의 도시 넬슨은 흰색과 파란색 건물이 많아 ‘바다 도시’라는 인상을 주었고, 무척이나 큰 호수로 유명한 타우포는 그저 압도적인 크기의 호수만으로도 정말 아름다웠다. 물론 뉴질랜드는 한국보다 훨씬 큰 나라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자연경관이 많으니 다르다고 할 수 있겠지만, 바로 옆 나라인 일본과 비교해서도 우리나라의 도시 광경은 처참한 수준이다. 대학가를 예시로 들어보면, 어느 대학가를 가도 비슷비슷하다. 연세대 앞이나, 홍대 앞이나, 인천대 앞이나 거기서 거기라는 말이다. ‘그 동네 특유의 분위기’보다는 소비를 위한 공간만이 즐비하다. 한 마디로 획일적이다. 개성이 없어도 너무 없다. 얼굴로 치자면 쌍꺼풀이 진 큰 눈, 높은 코, 브이라인 턱만 있는 셈이다.
앞서 말했듯 나는 뉴질랜드에서의 공간이 왜 이리 특별한 의미를 가질까 고민했다. 처음에는 거기에서 한 의미 있는 경험이나 소중한 사람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난생처음으로 외국에 나가서 산 것이었고, 그로 인해 평생 잊지 못할 특별한 경험들을 한 장소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국이 그렇지 않냐고 하면 그런 것은 또 아니다. 한국에서도 특별한 경험을 많이 했다. 소중한 사람들도 많이 만났다. 그런 이유라면 신촌은 나에게 무척 장소감을 가진 곳이어야 맞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왜일까.
뉴질랜드에서 썼던 일기들을 읽으며 문득 이유를 알았다. 당시 쓴 일기에는 유독 “저 멀리 보이는 바다가 나를 위로하는 것 같다(슬픈 날)”, “햇볕이 드는 공원에서 피크닉을 하거나 누워서 책을 읽거나 하며 평화롭게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을 보았다(행복한 날)”이라며 경관 얘기를 많이 했더라. 반면 한국에서 쓴 일기에서 경관 이야기를 쓰는 일은 드물다. 그 경관이 그 경관이기 때문이다. 뉴질랜드의 경관은 오래된 교회, 끝없이 펼쳐진 잔디, 산에서 보는 해 지는 광경, 하다못해 푸른 하늘까지 정말 다채롭고 또 어디를 가든 다르고 새롭다. 그런 다양한 도시의 경관들 덕분에 당시에 내가 느꼈던 감정들이, 또 당시에 그 장소가 주었던 의미들이 그렇게 생생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가지 더 생각나는 에피소드가 있다. 11층까지 있는 기숙사 건물에서 일 년간 기숙사 생활을 했었는데, 각 층이 하나의 커뮤니티였다. 재미있었던 것은 매 학기가 시작할 때 층마다 콘셉트를 정해서 그 컨셉에 맞추어 층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모여 데코레이션을 했던 것이다. 내가 있던 1층은 ‘빨강’과 ‘포켓몬’이 컨셉이었는데 그래서 빨간색 띠를 1층 여기저기에 두르고, 게시판에 포켓몬 그림을 그리고, 포켓몬 볼을 인쇄해 각자의 방문 앞에 붙이고 그 위에 자신의 이름을 썼다. 이것은 마치 (콩고의 음부티 족이 그러하듯) 그 공동체의 특징이나 성향을 경관을 통해 드러내려는 시도였다고 생각된다. 또 내 방이 1인실이었기 때문에 맘대로 가구 배치를 옮기거나 인테리어 할 수 있었는데, 그래서 시기나 기분에 따라 인테리어를 바꿨다. 어떤 때는 창문 옆에 침대를 두고, 어떤 때는 문 옆에 침대를 두고 하는 식이었다. 하루 대부분을 보내는 공간을 시간을 들여 나에게 맞추어 꾸미는 것이 퍽 즐겁고 의미 있었다. 그리고 그런 공간은, 당연히도, 장소감을 가질 수 있었다. 지금도 내 방의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생생하고 그리울 만큼 말이다.
어쩌면 한국은 너무도 급격한 근대화를 겪었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도시 경관에는 미처 신경을 쓰지 못하고 단지 ‘도시를 만드는 것’에만 집중했을지 모른다. 그래서 현재의 도시 경관이 이렇게 처참한 수준이 된 것이다. 광화문 광장만 봐도 알 수 있는데, 그저 도로를 크게 뚫어놓고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러나 광장 본연의 기능에 충실하다거나 한국적인 느낌을 담지는 못했다. (세종대왕상만 있으면 다인가?) 동대문디자인플라자는 어떤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 디자이너를 데려다가 번쩍한 건물을 만들었지만, 사실 주위의 한옥들에 전혀 어울리지 않아 최악의 디자인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최근 개성 있고 특이한 인테리어의 식당이 많아졌는데, 몰개성과 획일성에 지친 사람들이 찾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또 셀프 인테리어가 주목받은 지 꽤 되었다. 특히 후자는 과시욕보다도 내가 사는 공간을 의미 있게 가꾸고자 하는 욕망의 표현이라는 설명이 더 적합할 것 같다. 내 집을 일상적으로 남에게 보여주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나는 사람들이 점점 더 경관의 중요성이나 의미를 알아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또 그러길 바란다.
나는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살게 될 한국이 장소감을 가진 곳이길 바란다. 그건 아마 누구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에드워드 렐프에 의하면 “장소 의식은 같은 장소 출신의 사람들에게 그 장소 자체가 지닌 본질적으로 동일한 정체성을 부여하며, 그 역도 성립한다.” 즉, 바르셀로나 출신의 사람은 바르셀로나의 정체성을, 파리 출신의 사람은 파리의 정체성을 갖게 된다는 말이다. 내가 서울의 정체성을 갖는다고 할 때, 또 그런 정체성을 고향이 같은 사람들과 공유한다고 할 때 그것이 ‘개성 없음’이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미 그것은 현재 진행형인 것 같다–한국은 ‘유행의 나라’라고 하지 않는가.) 다행인 것은, 장소는 마치 생명체와 같아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사는 도시가 어떤 모양으로 변화할지는 우리의 선호와 취향에 달렸다. 물론 한순간에 변화하지는 않을 것이다. 몇 년 전 재개발을 한다고 우리 동네의 산을 전부 깎아 평지로 만들었던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듯, 아쉽게도 당분간은 밋밋한 경관이 지속될 것 같다. 내가 사는 가재울 지역은, 개울을 메우고, 산을 깎아 만든 동네로, 한국의 여느 동네처럼 전형적인 몰개성의 동네이다. 그러나 언젠가 다시 개울이 생기고 언덕이 생길지 모르는 일이다. 개울을 메우고 산을 깎는 것에 비해 무척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말이다. 나는 다만 얼굴도 이전에 비해 개성 있는 얼굴이 점점 더 주목받는데, 장소는 언제쯤 개성 있는 장소가 주목받게 될지 그것이 궁금한 것이다.
그 시작은, 제언하건대, 다양한 미적 기준을 가져보자는 것이다. 마치 내가 이전에는 사람의 얼굴을 볼 때 “예쁘다”와 “못생겼다”만으로 생각했지만, 이제는 “복스럽다”와 “박복하다(?)”의 기준으로도 생각할 수 있게 된 것처럼 말이다. 무조건 근대적으로 보이는 것만 추구하는 것을 넘어서서 도시의 경관에 대한 ‘우리만의 기준’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 또 관상에서 중요한 것은 요소 하나하나가 아닌 다른 요소와의 조화이다. 눈이 아무리 좋아도 코와 입이랑 어울리지 않으면 좋은 관상이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좋은 경관이란 번쩍한 건물이나 뻥 뚫은 도로 그 자체보다는 오히려 그것과 주변 광경들과의 조화로 결정되는 것 아닐까. 사는 사람들과 그 장소의 관계가 담긴, 그런 조화로운, 또 개성 있는 경관을 가진 나의 동네, 나의 도시, 나의 한국을 꿈꿔본다.
이 글은 2017년 5월 미스핏츠에 실렸습니다.
http://misfits.kr/16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