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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이두씨 Jul 11. 2022

#16. 귀향(歸鄕): 환영받지 못한 자

2022년 5월 9일

장례 리무진 버스가 다시 출발했다. 


수원시 연화장에서 화장을 마친 뒤, 우리를 태운 장례 리무진 버스는 아버지의 고향인 충청북도 청주의 M납골당으로 출발했다. 내 옆자리에는 아버지의 영정사진과 유골함이 안전벨트로 꽁꽁 동여매어졌다. 나는 옆자리의 유골함이 혹여나 엎어지지는 않을까 우려스러워 청주로 가는 내내 한 손을 뻗어 유골함을 꽉 잡은 채로 이동했다.


아버지의 고향인 충청북도 청주 모처에는 우리 가문의 이른바 '집성촌'(集姓村)이 있었다.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우리와 같은 성씨를 쓰시는 분들이셨다. 우리 가문은 윗분들이 소위 '양반 가문'이라 칭하면서 항렬에 맞는 '돌림자'를 썼었는데, 나를 중심으로 윗대는 'W'자를 나와 같은 항렬은 'K'자를, 아랫대는 'H'자를 이름에 번갈아가며 썼다. 'W-K-H'자로 이어지는 이 계보가 있었기 때문에, 이름을 들어보면 대략적인 항렬을 유추할 수 있었다. 집성촌에 계시는 많은 분들이 이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고 계셨어서, 거슬러 올라가 보면 먼 친척임을 짐작할 수 있었지만, 이미 몇 대에 걸쳐 몇 십촌으로 방대하게 이어져 내려온 이후였기 때문에, 현실적으로는 남남이라고 보는 게 더 적합할 것 같았다.


M납골당으로 출발하기 전에 납골당을 관리하시는 총무분의 전화번호를 사촌 형에게 받았다. 성함에 'K'자를 쓰시는 분이셨기 때문에 나와 같은 항렬이셨지만, 한 번도 뵌 적 없는 분이었다. 아마 이분도 몇 십촌쯤 되는 분이리라 생각했다. 전날 사촌 형이 미리 전화통화를 해서 오늘 납골당으로 가는 사실은 알려두었다고 했지만, 아버지의 유골함이 도착하기 전에 안치 위치, 비용 등 처리해야 하는 다양한 사항에 대해 논의할 것이 있어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이 가도 상대방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후 몇 번의 전화를 더 걸어도 끝내 전화 통화를 할 수는 없었다. 무언가 불안함이 엄습했지만, 사촌 형이 전날 미리 연락을 해 두었으니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수원시 연화장에서 출발한 지 한 시간쯤이 되자, 여느 시골길과 같은 한적하고, 협소한 길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버스 기사분은 그 큰 버스가 갈 수 있는 최대한의 장소까지 우리를 데려다주시기 위해 애쓰셨다. 4시 30분쯤이 되어 우리가 장지로 정했던 M납골당의 근처에 도착했다. 그 큰 버스로는 더 이상 갈 수가 없어 버스 기사분께서는 차를 갓길에 정차하셨고, 우리 모두는 그 길에서부터 천천히 걸어 올라가야 했다.


모두들 차에서 내려 행렬을 만든 뒤 그 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든 동생이 행렬의 가장 앞에 앞장섰다. 내가 아버지의 유골함을 안아 들고 뒤를 따랐다. 그때까지 동행했던 많은 친인척분들은 우리 남매를 따라 천천히 같이 이동했다. 오후 시간이었지만, 여전히 햇살이 참 좋았다.


우리가 걸었던 길은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좁고 경사가 얕은 오르막길이었다. 길 옆으로 파아란 들풀과 군데군데 사람 키만 한 나무들이 뻗어있는 전형적인 시골길이었다. 이미 M납골당에 할아버지, 할머니의 유골을 모셨었기 때문에, 구정이나, 추석에 종종 들었던 장소여서 길이 낯설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길을 항상 승용차로 올랐기 때문에 걸어 올라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화창한 날씨와 그렇지 못한 내 심정이 뒤엉켜 몽롱한 기분으로 그 길을 걸었다.


---(중략)...


그분은 내게 충청도 사투리로 격려인지 꾸지람인지 모를 알 수 없는 목적의 이야기를 하셨다. 그 뒤로 몇몇 분들도 자신항렬과 아버지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셨다. 모두들 아버지뻘의 어르신이셨지만 대부분 K자와 H자가 많았으니 항렬로는 꿇릴 게 없었다. 나는 여전히 가라앉지 않은 분노를 잠시 억누르고 표면적으로나마 그분들께 죄송하다고 말씀을 드렸다.


그렇게 제사를 다 마친 뒤에도 납골함의 유리문은 열리지 않았다. 이제는 그 납골함이 열린다 하더라도 이곳에 있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 나는 어머니께 다가가 이야기했다.


"옮깁시다!!! 여긴 안될 거 같아. 'G납골묘'로 가요."


당초 아버지께서 원하셨던 그곳, 'G납골묘'. 그곳도 여기서 멀지 않았다. 차로 20여분이면 도착할 거리였다. 당초 결정과는 다르게 진행되는 모양새였지만 이곳은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았다. 어머니는 한참 동안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시다가 계속 종용하는 내 성화를 못 이기시고 G납골묘로 이동하는 것에 동의하셨다. 결국 아버지가 원하셨던 곳으로 결정되어버린 이 상황을 우리 모두는 오히려 '전화위복'의 기회라 생각했다.


"아빠가 G납골묘에 가시려고 이곳에서 훼방을 놓으셨나 봐요."


새로운 장지로의 이동이 결정되자, 다시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사촌 형에게는 G납골묘의 담당자분께 연락을 부탁드렸다. G납골묘의 담당자 역시 K자를 쓰시는 나와 같은 항렬의 6촌 형님이셨다. 갑자기 계획을 변경한 우리를 그 형님께서 못 마땅하실 수도 있으셨을 것 같았지만, 그 형님은 우리에게 선뜻 자리를 내어 주시겠다고 이야기하셨다. 나는 기사분께 전화를 드려 현재의 사정을 말씀드리고 죄송하지만, 한 번 더 이동을 해야 할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기사분께서도 추가적인 일을 해야 하는 불편한 심정이셨겠지만, 우리의 상황을 이해해 주시려고 하셨다. 나는 제단 위에 놓인 아버지의 유골함을 다시 포장했고 동생은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다시 안아 들었다. 여전히 따듯한 아버지의 유골함에 대고 내가 속삭였다.  


"죄송해요. 더 좋은 곳으로 가려고 하는 거니까, 이해해 주세요..."


이곳에 왔던 순서의 역순으로 우리는 그곳을 떠나 다시 장례 리무진 버스로 향했다. 마음이 참담했다. M납골당에서 대기하셨던 다른 식구들까지 다 함께 장례 리무진 버스에 탑승하고 나니 처음 내려왔을 때 보다 더 많은 식구들이 함께 자리하게 되었다. 기사분께는 거듭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새롭게 변경된 G납골묘의 주소를 찍어드렸다. 그렇게 우리는 오후 5시 30분이 되어 다시 두 번째 장지로 출발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2년이 흐른 뒤에, 지금에서야 이 글을 엮어 책으로 출간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드립니다.

https://bookk.co.kr/bookStore/66332918fc0d5301c78a2ed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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