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 리무진 버스가 또다시 출발했다.
첫 번째 장지에 본인의 차량을 가져오셨던 친척분들은 저마다의 자동차로 우리를 뒤를 따랐다. 새로운 장지로 가면 모든 것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이젠 걱정할 것이 없다. 두 번째 장지로 떠나는 버스 안에서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두 번째 장지는 아버지가 어린 시절을 보내셨던 마을과 더 가까웠고 할아버지, 할머니를 화장하기 전 산소가 있던 곳과 멀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나도 몇 번 이곳 인근을 방문한 적이 있었어서 이곳이 내겐 더 익숙했다. 다만 G납골묘 자체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어서 정확한 위치는 알지 못했다.
새로운 장지로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본인의 차량으로 먼저 출발했던 사촌 형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어. 형."
"어... 알아둬야 할거 같아서, G납골묘에 납골함 안치공간이 예상보다 좁다는데... 우리 유골함은 다른 것보다 크지 않나?"
"아... 그럼 혹시 안 들어가면 어떻게 해야 되는 거야?"
"정 안 들어가면... 새로운 유골함을 사다가 다시 부어야겠지... 일단은 가서 한번 깊이를 봐야 할거 같은데?"
우리는 납골묘 자체를 처음 방문하는 길이었기 때문에, 이곳에는 유골함을 어떠한 방식으로 안치하는지, 납골묘에 허용 가능한 유골함의 너비는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사전 지식 전무했다. 미리 방문하지 못했던 내 책임이 컸다. 만약 크기가 안되면... 유골함을 다시 열어야 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었다. 화장장에서의 유골함 질소처리 과정이 떠올랐다. 밀봉 과정 때문에 유골함이 열리지 않으면? 최악의 경우 유골함을 부셔야 할지도 몰랐다. 생각만 해도 너무 힘든 과정이었다. 등골이 스산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 (중략)...
집에 돌아왔다. 5월 4일 떠났던 여수 여행부터, 5월 9일 발인까지 계산하면 5박 6일 만에 돌아온 집이었다. 세종 집에는 두 딸아이와 장모님이 함께 계셨는데, 발인 과정 동안 같이 자리하지 못했던 어린 두 딸아이를 돌보기 위해 장모님께서 서울에서부터 아이들을 데리고 어렵게 세종행을 해 주셨다. 장모님은 내게 '고생했다.'는 말 이외에 다른 말을 건네지 못하셨다. 아마도 어떤 위로의 말도 그 당시는 건네기 어려우신 것 같았다.
집에 오자마자 일단 씻기 위해 화장실로 들어갔다. 장례식 기간 동안 샤워는커녕 속옷 한번 갈아입지 못했었다. 샤워부스 안에서 샤워기를 틀어 물줄기를 가만히 맞았다. 머리가 멍했다. 며칠간 내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가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저녁 10시쯤이 되어 아내는 둘째와 같이 안방으로, 어머니는 첫째와 같이 애들 방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나는 불 꺼진 거실에서 조용히 TV를 틀었다. 리모컨을 오랜만에 만졌다. 무언가 알지 못하는 방송이 TV를 통해 흘러나왔다. 눈으로 무언가를 보고, 귀로 듣고는 있었는데, 무엇을 보고 듣고 있는지는 인식이 되지 못했다. 눈, 귀, 머릿속이 서로 따로 놀았다. 한동한 멍하니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저녁 11시쯤 구석에 있는 애들 공부방 바닥에 매트리스를 깔고 누웠다. 장모님이 가끔 세종에 내려오시면 내 침실은 항상 구석에 있는 애들 공부방이었어서, 그날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몸과 마음이 너무 피곤하고 힘들었지만 잠에 쉽게 들지 못했다. 불 꺼진 방 가운데서 스마트폰을 켰다. 문득 내 스마트폰의 'T전화'어플의 자동 통화 녹음 기능이 떠올랐다. 어플을 켜고 녹음된 통화를 찾아봤다. 올해 2월부터 모든 통화가 녹음되어 있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그 전의 통화 녹음은 들을 수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5월 7일. 사망선고가 있던 그 2시 인근부터 통화 녹음을 듣기 시작했다. 아내에게 전했던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다시 듣자 그때의 감정으로 돌아간 듯 다시 눈물이 흘렀다. 통화 녹음을 점차 거꾸로 거슬러 올라갔다. 5월에 전해졌던 어머니의 다급한 목소리, 4월 매일매일의 아버지의 건강상태에 대한 통화, 3월과 2월에는 그나마 평온하게 전했던 목소리를 거치면서 그때의 내 감정들이 떠올랐다. 그렇게 울다 멈추었다를 반복하고 나니, 새벽 2시가 넘어 있었다.
아버지와의 병환과 관련한 통화는 어머니와의 통화가 대부분이었다. 문득 아버지의 전화번호를 눌러보았다. '3월 11일', '2월 24일'의 두 통화가 기록되어 있었다. 그 기간 동안 나는 어머니와는 수십 통의 전화를 주고받았지만, 아버지께는 단 두통의 전화만 걸었었다. 아버지의 병환을 아버지께 직접 전해 듣는 게 부담스러웠다는 게 그 당시의 핑계였었다. 아버지의 목소리를 이런 식으로 들을 줄 몰랐지만, 생각보다 적은 아버지와의 통화수에 나의 무심함을 잠시 질책했다.
아버지와의 통화 녹음을 누르기가 살짝 두려웠지만,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3월 11일 통화 녹음을 가만히 눌렀다. 3월 11일은 어머니가 아버지의 목소리가 너무 안 좋다고 전화를 한번 드려보라고 했던 날이었다.
나: "여보세요?"
아버지: "응..."
나: "지금 항암 하고 계세요?"
아버지: "응..."
나: "아니.. 목소리가 너무 안 좋다고 해서 엄마가.."
아버지: "목소리는 뭐... 약 먹으면 항상 그런 걸 뭐."
나: "목소리가 안 좋긴 하네... 몸이 좀 어때요?"
아버지: "괜찮아... 컨디션은 좋아..."
나: "컨디션이 좋은데, 목소리가 왜 그래~ 목소리가~ 아무튼, 잘하시고. 내일 퇴원하시는 거야?"
아버지: "어... 내일 아니면 모래지 뭐..."
나: "그래요. 알았어요. 우리가 1~2주 안으로 한번 갈 거야. 그때 봬요."
아버지: "어 그래.. 알았어."
나: "알았어요. 항암 잘 받으세요..."
아버지: "어... 어..."
그 통화는 항암주사를 받는 와중에 드렸던 전화였는데, 쩌렁쩌렁한 나의 목소리와 달리 아버지의 목소리는 누가 들어도 아픈 사람의 목소리였지만, 본인의 컨디션은 여전히 좋다며 힘을 내고 계셨었다. 2월 24일의 통화에서도 여전히 그 아픈 목소리는 계속되었다.
나: "여보세요?"
아버지: "응..."
나: "병원이시지? 입원했다고 이야기 들어서...
아버지: "응..."
나: "항암은 하셨어?
아버지: "이제 한병 맞았어..."
나: "한병? 지금 하시는 중이야? 아니지? 오늘은 그냥 누워있는 거 아닌가?"
아버지: "아니야. 지금 하고 있어..."
나: "지금 하고 있어??? 아... 알았어요. 잘하세요."
아버지: "링거 꼽고... 한병 더 맞아야 돼..."
나: "아. 알았어요. 몸조리 잘하세요."
아버지: "애들... 그 저기... 요즘 코로나가 심한가 보던데... 애들 조심시켜."
나: "알았어요. 아빠 몸조리나 잘하세요..."
아버지: "그래. 그래."
그 두 통화는 모두 아버지의 항암치료 중에 드렸던 전화였다. 멀쩡한 목소리는 하나도 없었다. 갑자기 어두운 산 중턱에 외롭게 놓여 있는 아버지의 유골함이 떠올랐다.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아버지를 잘 모셨다 생각했었는데 내 마음에서는 여전히 아버지를 놓지 못하고 있었다.
...
그날 새벽 3시가 넘도록 통화 녹음을 듣고 또 들었고,
그 통화 하나하나에 울고 또 울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2년이 흐른 뒤에, 지금에서야 이 글을 엮어 책으로 출간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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