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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터 권도 Aug 17. 2015

파리의 신호등

파리의 거리를 걷다가 횡단보도에 멈춰서서 보면, 신호등을 볼 수가 있다. 당연한걸... 근데, 이게 좀 낮게 매달려 있고 보행자용 신호등과 운전자용 신호등이 위, 아래로 사이좋게 매달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아, 보행자와 운전자의 시선을 고려해서 이런 높이에 달아놨구나. 괜찮다."


여기까지는, 내가 보행자로써의 시선에서 생각하고 느꼈던 신호등이었다. 마지막 파리에 갔을 때에는 직접 운전을 할 기회가 있어서 운전자로써 그 신호등을 보면서 뒤통수를 살짝 얻어맞은 듯한 기분을 느낄 수가 있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파리의 신호등은 "보기 편하게" 뿐만 아니라, 운전자가 자연스럽게 보행자의 "안전까지 생각할 수 있게끔" 만들어져 있던 것이었다.


파리는 기본적으로 좁은 도로가 많다. 

개선문을 중심으로 뻗어나가는 몇 개의 도로와 간선도로를 제외하면 대로라고 해도 고작 왕복 4차로 정도이다. 그 외 대부분의 도로는 왕복 2차로 내지는 부분 3차로 정도이다. 그래서 신호등은 보행신호와 대기신호로 자주 바뀌고, 그 시간 또한 짧다. 그러다보니 신호가 바뀐 뒤에도 사람들은 멈추지 않고 급하게 길을 건너려고 시도한다. 마치 차량들이 주황색 신호에 멈추지 않고 급하게 액셀러레이터를 밟는 것처럼. 사실 이렇게 신호가 전환되는 시점에 갑자기 사람이 튀어나오는 경우는 횡단보도에서 가장 빈번하게 일어나는 사고 중에 하나일 것이다. 어느 나라, 어느 도시를 막론하고.


Q. 그렇다면, 파리의 신호등은 이런 사고를 방지할 수 있게끔 디자인 되어 있단 말인가?

A. 그렇다.

Q. 신호등에 어떤 신기술이 적용되어 있다는건가?

A. 아니다. 그렇지는 않다.

Q. 아니 그럼 어떻게.?!

A. 사용자 경험 디자인이 그 해답이다.

이상. 자문자답 인터뷰였습니다. ;)


장난같지만, 정말 그렇게 느껴졌다. 지금까지 신호등은 단순히 일종의 싸인이라고만 생각해왔다. 운전자, 보행자 모두에게 건너가라. 서라 등을 알려주는 싸인 이상의 기능을 요구하지도 기대하지도 않았었던 것이 사실이다. 최소한 기능적으로는. 아래 그림을 보자. (그림으로 웃기기 고수임.)



파리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횡단보도를 그린 것이다.

편도 2차로, 왕복 4차로의 도로가 있다. 그리고, 횡단보도가 있고, 신호등은 양쪽 도로변에 하나씩, 그리고, 중앙분리선에 각각 하나씩 모두 네 개가 설치되어 있다. 중요한건, 각각의 신호등이 설치되어 있는 위치이다. 신호등은 모두 차량정지선에 가까운 쪽에 설치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차량 정지선의 먼 쪽 즉, 운전자가 신호등을 보려면 반드시 보행자가 대기하고 있는 횡단보도의 시작부분을 주시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운전자는 주행 신호로 바뀌는 것을 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보행자의 흐름을 볼 수 밖에 없게 된다. 신호등은 도로변과 중앙분리선에 모두 있기 때문에 정지해 있는 차로가 1차로이든, 2차로이든 마찬가지이다. 정지해 있을 때 뿐만 아니라, 운전자가 출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의 차량과 가까운 쪽의 횡단보도 시작점을 볼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즉, 보도측에서의 돌발상황에도 자연스럽게 대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간혹 그렇지 않은 신호등을 만나기도 한다. 위의 사진처럼. 이 도로의 경우는, 완전 짧은 1차로이고, 좌측에 주도로가 있고, 우측에는 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 아주 작은 도로였다.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신호등은 양쪽에 모두 있었다.


반면 우리나라의 경우,

횡단보도의 양쪽 끝에는 거의 대부분 보행자용 신호등만 세워져 있어서 운전자는 굳이 오른쪽,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가며 보행자나 횡단보도의 상황을 살필 이유는 없게 된다. 오히려, 대부분의 운전자용 신호등은 차량 정면의 상단에 위치해 있어서 좌우에서의 돌발상황을 대비하기는 여간 쉽지 않다. 그리고 또 한가지, 운전자의 정면 상단에 있는 신호등의 경우, 모든 운전자가 예비신호(주황색)를 잘 지켜서 미리 속도를 줄이면 참 좋겠지만, 많은 운전자들이 멀리서 그 신호를 확인하고 오히려 속도를 올리는 경우가 많아서 종종 사고를 일으키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물론, 파리의 도로와 서울의 도로는 많이 다르다.

당연히 파리보다는 최근의 도시계획에 의해 형성된 서울의 경우, 차량의 흐름 등을 더 많이 고려해서 도로도 넓고, 작은 골목 보다는 대로 위주로 설계되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파리의 신호등을 무조건 도입하자는 주장은 맞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은 한다. 하지만, 아무리 도시화가 진행되고 차량이 많아진다고 해도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도시의 모든 시스템은, 도시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용자의 경험이 잘 반영되어 디자인된 시스템은,

꼭 기능적이나 심미적인 요소로만 그 가치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위의 사례와 같이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부분에서 우리의 생활에 직/간접적으로 그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이 글을 쓰면서 보행자와 차량 사고의 유형 통계, 좀 더 상세히는 횡단보도에서 돌발적인 상황에서의 파리와 대한민국에서의 사고 확률을 비교해보는 통계가 있었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개인적인 느낌이 아닌, 통계에 의한 효과를 보여줄 수 있었으면 해서 말이다. 안타깝게도 통계를 찾지는 못했지만, 이 글이 어느정도의 설득력을 갖기를 희망해본다.



세상에 많은 바람이 닥쳐오고 지나가지만 '사람'은 빠져있는 일이 다반사다.
'내 곁에 있는 사람' 중에서, 이병률

사용자 경험 디자인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진지하게 사용자의 입장에서, 아니 사람의 입장에서 한 번만 다시 생각해보는 것. 그리고 그 생각에 공감해보는 것. 그것이 더 잘 디자인된 결과물 혹은 해결책을 찾아내는 첫 걸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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