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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부초밥 Aug 22. 2023

기억의 재발

아버지의 엄마 05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아버지는 종종 꿈 이야기를 하셨다. 아버지의 꿈속에서 할머니는 부처처럼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 무언가를 말씀하고자 하셨다고 했다. 할머니의 등 뒤로 너무나 환한 빛이 비쳐 꿈속에서조차도 산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거실 소파 위에 앉아 햇빛을 뿜어내던 할머니의 풍채를 나는 떠올렸었다. 할머니는 내 꿈에 나오신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나는 할머니의 염주도, 할머니의 기일도 잊었다. 그저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본 뒤로 10년쯤 지난 어느 날 불현듯 깨달았을 뿐이다. 할머니는 글을 몰랐다는 사실을.

쬐깐한 손주가 고사리 손으로 연필을 쥐고 글자를 끄적일 수 있다는 사실이 부러웠을지도 모른다. 무뚝뚝한 성정으로 수십 명에 달하는 당신의 핏줄 중 가장 어린 나에게 ‘글자 좀 가르쳐 다오.’하고 말하기까지 많은 고민을 하셨을지도 모른다. 고민 끝에 결국 투박하게 내뱉은 말이 그저 짧은 한 마디, “함 써봐라.”였을지도 모른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손녀의 방에 굴러다니는 몽당연필을 소중하게 쥐고 당신의 이름을 끄적이면서 희미하게 웃었을지도, 남몰래 눈물을 훔쳤을지도 모른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15년쯤 지나자, 나는 더 이상 할머니의 제사에 가지 않게 되었다. 내가 결혼을 했기 때문이다. 할머니에 대한 생각을 갑작스럽게 맞닥뜨린 건 시할머님의 집에 방문했던 어느 날이었다. 남편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려 하는데 시할머님이 벌떡 일어서시더니 “너네 아직 차가 없지? 집까지 어떻게 가냐. 데려다줄게.”하시는 것이었다. 이미 여든에 접어드신 나이, 멋스럽게 머리가 하얗게 세신 시할머님이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차의 시동을 걸었을 때 나는 물었다. “운전하실 줄 아시는지 몰랐어요. 제 할머니는 운전 못 하시거든요. 그 시절에는…,” 할머님은 익숙한 동작으로 토시를 꺼내 양팔에 두르셨다. 뜨거운 여름, 운전대를 잡고 있을 양팔을 자외선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멋졌다. “여자가 운전하는 게 흔치는 않았잖아요.”

“그렇지. 내가 아마 거의 첫 타자일 거야. 나랑 같이 면허 딴 여자가 딱 한 명 있었어.”

“우와.”

거기에 대고 나는 차마 말하지 못했다. 그 시절에도 요즘처럼 필기시험이 있었나요? 그렇다면 우리 할머니가 면허를 따는 건 힘든 일이었겠네요. 우리 할머니는 글을 모르셨어요.


할머니가 검은 수첩에 당신의 이름을 써달라 했을 때, 내가 할머니의 말 못 할 사정을 알고 있었다면, 그 수첩에 정성스럽게 가나다를 쓸 수 있었을까. ‘그래도 당신의 이름 석 자를 쓰는 방법을 알게 되셔서 다행이다.’ 시할머님이 운전하시는 차량이 서울 시내 한복판을 가로지를 때 나는 생각했다.


2001년 아버지의 일기 중. 이 글을 쓸 때까지만 해도 나는 할머니 꿈을 꾼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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