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아바나: 시티투어, 말레꼰 해변 - 2015/08/10(월)
저녁을 제대로 먹지 못한 우리는 아침이라도 제대로 먹을 요량으로 옆집 까사인 마리아 할머니네 집에 아침 식사를 예약했다. 셋이서 4.5 CUC(1 CUC=약 1 dollar, 1 MN=약 50원)을 내고 받아 든 식단은 너무도 소박했다. 과일 샐러드에 달걀프라이와 약간의 소시지가 전부인 아침 식사는 맛있었지만 양적으로 많이 부실했다. 부식거리를 살만한 곳도 없으니 이곳 말고는 달리 아침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이 없었으므로 우리는 아바나에 머무는 동안 매일 아침식사를 마리아 할머니네 집에서 해결하기로 했다.
공항의 환전소보다는 조금이라도 낫겠지 하는 기대를 품고 숙소 근처의 환전소에 갔으나 환율은 비슷했다. 워낙 공식 환율이 낮아서 조금 더 나은 환율을 받으려면 거리의 사설 환전상을 이용하라고 조언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위폐나 도난, 강도, 경찰의 단속을 무릅쓸 필요는 없다는 판단에 공식 환전소를 이용하기로 했다. 아침 이른 시각이었는데 환전소 앞에는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차례를 기다려 창구에 들어가니 여권 원본을 가져와야 한다고 했다. 분실의 위험 때문에 사본만 가지고 있었는데... 낭패다. 형주에게 숙소에서 여권을 가져오라고 시키고 다시 뒷줄로 돌아가 한참을 더 기다려 환전을 하고 보니 약 멕시코에서 150만 원 가치였던 현금이 110만 원 정도 가치의 현금으로 줄어들었다. CUC과 MN으로 각각 환전해서 들고 다녀야 하는 불편함은 감수하겠지만 현금의 가치가 순식간에 공중으로 날아가 사라져 버린 그 허탈함은 이루 다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허탈한 마음을 애써 지우며 아바나 리브레 호텔 근처에서 출발하는 시티투어 버스(1인당 5 CUC)를 타고 베다도 지역을 벗어나 말레꼰 해변을 달려 센뜨로 아바나로 갔다.
중앙공원(Parque Central)에서 내린 후 관광객들에게 시가를 파는 장사꾼들을 지나 길 건너 대성당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니 허름하고 낡은 고건축물들 사이로 이어진 좁은 골목길이 나왔다. 쿠바에서만 볼 수 있는 ‘낡음의 미학’이라 불리는 그 풍경이 좁은 골목길을 따라 이어졌다. 세월의 손때로 낡고 칙칙한 건물들, 그 안에서 소박한 삶을 이어가는 이들이 창밖으로 내건 형형색색의 빨래들, 베란다에 위태롭게 내놓은 초록색 화분들... 그 모든 것들이 한데 어울려 오묘한 조화를 이 루어고, 자전거와 손수레, 오토바이와 사람들이 뒤엉켜 그 거리를 흘렀다.
나무 그늘이 있는 작은 공원에서는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을 흉내 낸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귀에 익숙한 곡들을 연주하며 행인들의 동전을 모으고 있었고, 아르마스 광장 길가에서는 가판대에 고서적과 낡은 물건들,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현대적인 그림들이 함께 전시되어 판매되고 있었다.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고급식당들은 문을 열어 놓고 경쾌한 쿠바 음악을 연주하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사로잡았다. 아이들의 손을 잡고 길을 걷다가 경쾌한 음악에 이끌려 식당 건너편 벽에 바짝 붙어 서서 연주를 듣고 있자니, 식당 안의 연주자가 우리에게 눈을 맞추고 흥겹게 춤을 추며 장난스러운 눈웃음을 던졌다.
더위에 지치고 부족한 식사량으로 늘 배가 고팠던 아이들은 주전부리를 파는 손수레를 발견할 때 다 발길을 멈추고 먹어야 했다. 1 CUC 짜리 코코넛, 5 MN 짜리 아이스크림, 0.5 CUC 짜리 옥수수... 들쭉날쭉한 화폐 단위에 정신이 없었지만 싸고 맛있는 음식에 이내 마음이 누그러졌다.
아르마스 광장에서 대성당으로 발길을 옮겼으나 대성당은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문이 닫혀 있었다. 대성당 앞 광장에는 전통의상을 차려입고 사진을 함께 찍어주는 모델들이 있었다. 화려한 의상에 끌린 제나가 옷을 구경하러 다가갔더니 눈만 마주쳤는데도 돈을 달라며 다가왔다. 흠칫 놀라서 내게 달려오는 제나를 안고 나오니 그 골목 끝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사람들로 꽉 들어찬 바(Bar)가 있어서 호기심에 들어가 보니 그곳이 바로 헤밍웨이가 자주 들렀다던 술집(La Boel M)이란다.
그가 주고 마셨던 술은 독한 다이끼리(Daiquiri)였다는데, 나는 바텐더 바로 앞에 간신히 자리 잡고 앉아 모히또(5 CUC)를 한잔 시켜 마셨다. 럼주에 민트 잎을 찧어 넣고 얼음을 띄워 마시는 모히또는 더운 날씨에 시원한 청량감으로 온몸을 씻겨내주는 듯했다. 영화에서 자주 나왔던 술 이름이라서 그 맛이 궁금했던 형주는 모히또를 한 모금 마셔보더니 개운하고 맛있다며 한국에 돌아갈 때 쿠바 럼주 한 병을 꼭 사 가자고 했다.
사람들로 왁자지껄한 바의 한 구석에서는 젊은 연주자들이 연주하며 노래하고 있었다. 그들의 음악이 사람들의 유쾌한 소음과 한데 어우러져서 분위기는 한층 더 밝고 즐거워졌다.
그렇게 센뜨로를 돌아보고 중앙공원으로 나와 다시 시티투어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화교의 묘지가 있는 지역을 지나 체 게바라의 얼굴이 벽면에 새겨진 혁명광장을 지나 아바나 시내의 주요 명소를 돌아 다시 베다도로 돌아왔다.
숙소로 돌아와 식당 탐색에 나섰다.
숙소에 장기 투숙 중인 벨기에 아가씨 리나가 소개해준 식당에 가봤더니 음식값이 너무 비싸서 메뉴와 가격만 확인하고 밖으로 나왔다. 운 좋게 그 식당 옆에 있는 현지인들이 가는 작은 식당(La Favorite)을 발견했다. 일단 저렴한 가격이 마음에 들어서 메뉴판에 있는 음식을 다섯 가지 주문했는데 다행히 모두 먹을 만했다. 야채 볶음밥, 돼지고기찜 콩밥 등 식사류는 대부분 30 MN(약 1,500원) 정도였고 음료는 3 MN(약 150원)이었다. 현지인만을 상대했왔던 식당 직원들은 음식 이름을 잘 알지 못하는 낯선 동양인 손님이 달갑지 않았던지 내내 퉁명스러운 태도로 우리를 대했지만, 4개월 남짓 남미 여행을 하며 웬만한 눈칫밥에도 끄덕 없을 정도의 맷집을 키운 우리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싸고 양 많고 먹을만하면 그걸로 됐다.
오랜만에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치고 도보로 40분 거리에 있는 마트에 가 부식거리를 사기로 했다. 길을 물어물어 어렵사리 도착한 마트에는 정말 실망스럽게도 살만한 것이 거의 없었다. 도대체 여기 사는 사람들은 어디서 식재료를 구해다 식사를 만들어 먹고 사는지 궁금할 지경이다. 물자 부족이 정말 심각했다.
고생한 보람도 없이 그냥 숙소로 돌아가기는 아쉬워서 근처에 있는 말레꼰 해변으로 향했다.
영화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을 보면 바람 부는 해변도로를 체 게바라식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는 장면과 올드카들이 도로를 질주하는 모습, 그리고 그 도로로 파도가 쏟아져 들어오는 장면이 나온다. 계절이 그때와 달라서 영화에서 처럼 파도가 높이 치지 않았지만, 이곳은 잊혀진 거장들이 다시 한 곳에 모여 연주하고 노래하는 감격스러운 음악이 흐르던 그 영화의 배경이었던 말레꼰 해변이 맞다.
바닷가에 5미터 높이로 반듯하게 쌓아 올린 방파제 너머로 푸르고 투명한 대서양이 펼쳐져 있었고, 고개를 해변도로 쪽으로 돌리면 1940년대 잡지책 커버에나 나올 법한 올드카들의 질주가 이어졌다. 아이들은 좁은 방파제 위를 따라 아슬아슬하게 걷기도 하고 거기에 걸터앉아 온 몸으로 바닷바람을 맞으며 서로에게 장난치며 깔깔거리고 웃었다.
아이들이 장난치는 모습이 귀여웠던지, 간식을 싸들고 소풍 나온 노부부가 다가와서는 아이들의 나이와 이름을 묻고는 예쁘다며 한참을 들여다보셨다. 치아가 빠지고 초라한 행색을 한 그들이었지만, 다정하게 마주 보고 앉아 담소를 나누는 모습은, 험한 쿠바의 역사를 함께 살아낸 시간들을 담고 있었기에 아름답고 숭고하다. 두 분 모두 부디 건강하셔서 오래도록 이 아름다운 해변에서의 소풍을 계속 이어가시길.
젊은 혁명가들의 이름과 거친 바다를 동경한 마초 작가, 쿠바인들의 뜨거우면서도 낙천적인 감성을 노래한 전설의 음악가들, 낡은 건축물 사이로 비집고 나오는 고단한 삶의 흔적들, 대서양에서 불어오는 익숙한 듯 낯선 바람,... 그 모든 것들이 한데 섞여 바람결에 춤추며,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짓는 경계가 허물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