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뜨리니다드에서 산따 끌라라로 이동 - 2015/08/18(화)
우리를 남미로 이끌었던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었겠으나, 그중 하나는 10년 전 여덟 살의 어린 형주와 함께 읽었던 ‘체 게바라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라는 책이었다. 한 때 젊고 멋진 혁명가의 이미지로 상품화된 그의 모습이 여기저기 티셔츠나 라이터, 모자 등 대부분 마초적 남성미를 분출하고픈 사람들을 겨냥한 남성용품 여기저기에 찍혀서 그가 마치 세상에 대해 반항하는 모든 젊은이들의 아이콘처럼 여겨지기도 했었다. 나도 어쩌면 그런 비슷한 이유로 그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었는지도 모른다. 젊은 혁명가, 지적이고 잘생긴 외모, 불꽃처럼 살다 간 뜨거운 삶... 그의 이름 앞에 붙은 수식어들이 가진 무게감이 결코 가볍지 않았는데, 책은 그의 혁명에 대한 것이 아니라 혁명가가 되기 이전 그의 청년 시절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스물세 살의 앳된 청년이었던 그는 그의 친구 알베르토 그라나도와 함께 했던 이 8개월 동안의 여행을 통해 라틴 아메리카에 만연한 민중의 불평등한 삶과 강대국들의 경제적 착취에 눈 뜨고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혁명가의 길로 들어섰다. 과연 그는 어떤 여행을 했던 것일까. 여행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그가 목숨 바쳐 뜨겁게 사랑한 라틴 아메리카는 대체 어떤 곳일까... 책을 읽고 나서 여러 가지 질문들이 한참 동안 머릿속을 맴돌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10여 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기적처럼 나는 아이들과 함께 라틴 아메리카를 여행하고 있고 그가 혁명가로써 치열하게 살았던 쿠바에 와 있다. 무슨 대단한 볼거리가 있는 곳도 아닌데 굳이 촉박한 일정 중 이곳 산따 끌라라를 끼워 넣은 것은 ‘체 게바라’라는 강력한 자기력에 끌린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다.
산따 끌라라에는 체 게바라를 만날 수 있는 두 가지 장소가 있다. 장갑열차 기념비와 체 게바라 기념관이다. 오전에 이 두 곳을 들렀다가 11시 30분에 아바나행 버스를 타야 하므로 서둘러 움직여야 했다.
까사에서 아침을 먹고 걸어서 장갑차 기념관으로 향했다. 이곳은 1958년 체 게바라가 이끄는 혁명군 스물네 명의 젊은 게릴라 군이 불도저로 철로를 끊고 300여 명의 정부군이 타고 있던 무장 열차를 습격해 승리한 기념비적인 전투의 현장이다. 이 전투의 승리에 고무된 혁명군은 이후 승리의 기세를 잡았고 이내 혁명 전투에서 승리해 정권을 잡는 데 성공한다.
당시 혁명군이 철로를 끊는 데 사용되었던 불도저는 생각보다 크기가 작았다. 게릴라 군이 끊었던 실제 철로도 녹슨 모습 그대로 전시되어 있었고, 당시 철로에서 이탈된 무기를 싣고 있던 짐칸 서너 량은 이탈된 모습을 재현하여 엇갈려 흐트러진 대열로 늘어서 있었다. 짐칸의 외부에는 총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고 짐칸의 내부에는 당시 게릴라 군이 사용했던 군용품과 무기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세월과 함께 녹슬어가고 있는 유물들과 흑백사진 속의 당시 모습들이 불과 60년도 채 안된 역사의 기록인데 마치 먼 옛날의 일처럼 느껴진다.
기념비가 있는 철로 주변에는 체 게바라가 그려진 티셔츠와 쿠바 국기로 만든 에코 백 등의 기념품을 걸어 놓고 파는 작고 허름한 가게가 하나 있을 뿐 그저 무심한 일상이 이어지고 있었다. 뜨거운 혁명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무심한 일상으로 남은 고요한 평화가 마음에 큰 울림으로 남는다.
이른 아침, 오가는 사람도 별로 없는 그 길에서 한참 기다린 끝에 말이 끄는 마차를 잡아타고 체 게바라 기념관으로 향했다. 관광지에서 타는 말이 아닌 진짜 교통수단으로 사용되는 말이 끄는 마차를 처음 타본 아이들은 처음에는 신나서 웃고 떠들다가 마부 할아버지가 달리는 말에게 채찍을 휘두르자 내 얼굴을 쳐다보며 불편한 마음을 드러냈다. 순수한 마음에 동화 속 마차에 대한 낭만을 기대했다가 치렁치렁 매단 줄에 눈가리개를 하고 채찍질을 당하는 말을 보고 충격을 받은 어린 마음들이 안쓰러웠으나 세상사가 알고 보면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니 너무 크게 상처받지 않길 바랄 뿐이다.
마차는 큰 도로가 아닌 좁은 주택가 골목길로 달렸다. 아침 햇살 속에 각자 일터와 학교로 서둘러 길을 나서는 사람들로 분주한 큰길의 도로와 달리 사람들이 빠져나간 빈껍데기 같은 골목에는 벌써 나른해진 동네 개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서둘러 도착한 체 게바라 기념관에서는 내부에서 무슨 행사가 있다고 방문자들의 입장을 허가하지 않고 있었다. 예약된 버스시간 때문에 시간이 촉박한 상황인데 산따 끌라라까지 와서 기념관에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가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한 마음으로 대기줄에 서서 30분을 기다린 후에야 입장할 수 있었다.
첫 번째로 방문한 곳에는 혁명 게릴라로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체 게바라와 그의 동지 17인의 영정이 전시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방문객들이 손에 꽃을 들고 와서 그의 영정 앞에 놓아두고 묵념하는 모습에서 쿠바인들의 그를 향한 존경심 얼마나 두터운지 가늠할 수 있다.
두 번째 방에는 체 게바라의 출생부터 시작해서 삶을 마감하기까지의 자료와 사진, 그리고 그의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체에 관련해서는 워낙 관심이 있었던 터라 그동안 그와 관련된 많은 사진들을 접해왔었는데 이곳 기념관에서는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았던 많은 사진들과 자료들을 만날 수 있었다.(전시실 내부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마음속 기억장치에 그의 모습들을 기록해야만 했다.)
두 전시실의 사이에는 전 세계에서 혁명가라고 추앙받는 영웅들의 사진과 유품, 글귀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 한편에 전태일의 사진과 그와 관련된 한글 글귀가 전시되어있어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노동자의 비참한 노동현실을 고발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불살랐던 전태일이 기억돼야 할 혁명가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아 지구 반대편인 이곳 쿠바의 산따 끌라라에서 체 게바라와 함께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아이들과 함께 전태일의 발자취를 찾아보고 그의 정신에 대해 공부해야겠다. 정작 우리가 가진 혁명가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자신이 부끄러웠으나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 공부의 시작이니 너무 늦었다고 자책하지는 말자.
기념관 밖에는 무장한 게릴라의 모습인 체 게바라의 동상을 가운데 두고 왼편에 혁명군의 전투 모습이 새겨진 부조와 오른편에 체가 피델 카스트로에게 썼다는 마지막 편지를 새겨 넣은 부조가 광장을 향해 서있다. 그리고 반대편 양지바른 곳에는 혁명군의 묘소가 있다.
쿠바 혁명에 성공한 후 정치인으로 남아 권력을 잡지 않고 실패할 전투지인 줄 알면서도 콩고와 볼리비아로 가서 싸우다가 서른아홉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 그의 유해는 사후 30년이 지난 1997년에야 발굴되어 이곳 기념관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천천히 기념관을 돌아보고 기념관을 나서면서 그의 순수한 꿈과 열정, 그리고 그것을 행동에 옮긴 그의 용기로 인해 변화된 세상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을 살고 있는 나는 어떤 꿈을 꾸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물레방아를 향해 질주하는 돈키호테처럼
나는 녹슬지 않는 창을 가슴에 지닌 채,
자유를 얻는 그날까지 앞으로만 달려갈 것이다.‘ -체 게바라
기념관에서 나와 숙소에서 짐을 찾아 아바나행 버스를 타러 가야 하는 우리의 마음은 다급했다. 비달 광장으로 가는 이동수단을 잡기 위해 큰 길에 서서 목을 길게 빼고 있었으나 도로에는 택시도 버스도 다니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물어 가며 비달 광장으로 걸어가다가 어렵사리 마을버스 격인 마차를 잡아탔다. 마차에는 사람들이 가득 타고 있어서 더 앉을자리도 없었는데 동승객들은 웃는 얼굴로 아이들을 데리고 올라탄 내게 자리를 만들어 주느라 애를 썼다.
버스 시간을 맞추느라 바쁘게 움직여 비아술 터미널에 도착했건만, 버스의 첫 출발지인 산띠아고에서 버스가 늦게 출발했다며 언제 올지 기약도 없는 버스를 기다려야만 했다. 늘 있었던 일이었는지 택시 기사들은 버스를 기다리는 승객들에게 계속 택시를 타고 갈 것을 권했고, 아이들은 터미널에 붙은 간이식당에서 샌드위치와 음료를 사 먹느라 오가며 그렇게 한 시간 반을 기다린 끝에 버스가 도착했다.
다시 아바나에 도착한 우리는 전에 묵었던 까사(Casa Magda)에 짐을 풀었다.
기념품으로 쿠바산 커피를 사려고 아바나 리브레 호텔에 가는 길에 뜨리니다드의 살사 공연장에서 저녁에 만났던 일본인 여성 요시코와 그녀의 딸을 만났다. 어찌나 반가웠던지 서로 손을 부여잡고 재회의 인사를 나누었다. 제나와 요시코의 딸도 서로를 알아보고는 깡총거리며 좋아했다. 그들은 이제 여행을 마치고 일본 오사카로 돌아간다고 했다. 서로 일본이나 한국에 오면 연락하자며 서로의 연락처를 주고받고는 헤어졌다. 우연이 겹쳐 이렇게 인연이 되었으니 우린 어쩌면 꼭 다시 만날 것만 같다. 일본에서든 한국에서든 또 다른 어디에서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