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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향기와찬양Lim Mar 27. 2024

일단, 자동차를 없앴습니다

- 나의 퇴임에 맞추어 떠난 사람과 그의 애마

나는 운전을 늦게 시작했다. 별명은 '차가이버'인데 아이러니하게 운전하는 것은 싫었다. 나의 성씨가 차(車)이고 뭔가를 잘 고친다고 사람들이 붙여준 것이다. 좌우지간, 운전을 하지 않고 평생을 지내고 싶었다. 그냥 기사님 모시고 사는 사모님이고 싶었다.


나는 고작 4년 정도 운전했다. 

그즈음에 아들이 대학 내에서 자전거에 넘어져 엄청난 사고를 당했다. 그 사고로 남편은 몇 번이나 정신을 잃었다. 나도 처음에는 다리에 힘이 빠지고 앞이 캄캄했다. 그러나 마음을 단단히 먹고 정신을 차렸다.


아들이 당한 사고 때문에 내게 온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증상은 3가지였다.

방문을 닫을 수 없었다. 문을 닫으면 가슴이 답답하고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불을 켠 채 자야 했다. 컴컴하면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았다. 그리고 자동차에 시동을 걸 수가 없었다. 내가 운전을 하면 금방 사고가 날지도 모른다는 염려가 나를 꽁꽁 묶었다.


지금으로부터 12년 전 일이다. 그때부터 나는 운전을 하지 않았다. 불편해도 차를 집에 두고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그런데 마지막에 퇴임한 학교는 대중교통을 이용하기에 애매한 곳이었다. 그래도 나는 운전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대신에 아침마다 남편이 자동차로 나를 출근시켜 주었다. 아침마다 우리 부부는 함께 출근하는 모양새가 됐다. 그래서 내가 몰던 자동차는 없앴다. 슬슬 그 생활에 스며들기 시작하면서 더 이상 운전을 하지 않기로 결심을 굳혔다.


그런 와중이었다. 병원에 장기 입원해 있던 아들을 사정상 집으로 옮겨와야 했다. 집으로 돌아온 아들 간병 때문에 남편이 나의 출근을 도와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택시로 출, 퇴근했다. 다행히 학교는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었다. 택시로 기본요금 정도 나올 거리였다. 카카오 택시 앱을 이용하여 택시를 불러서 출, 퇴근하는 것은 할 만했다.




아들은 2018년에 집으로 돌아왔다. 아들의 운동 재활 치료에 대한 의료 보험 혜택이 만료되었기 때문이었다. 선택의 여지없이, 아들을 집에서 재활 운동시키기로 했다. 그때부터 집을 병원처럼 세팅하여 재택 간병이 시작됐다.


중증 환자가 병원을 떠나 집에서 재활 투병을 하면 국가에서 활동보조사를 지원해 주는 제도가 있다. 아들이 집으로 돌아온 지 보름 후부터 활보샘(활동 지원사) L을 만났다. 그분은 꽤 먼 곳에 살았다.  

L 샘은 아침에 우리 집으로 출근했다가 오후에 퇴근했다. 그분의 출근 시간이 나의 출근시간과 딱 맞아떨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L샘의 남편인 K샘이 우리에게 제안했다.


"차라리 제가 사모님 출, 퇴근을 도와 드리면 어떨까요?"


그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는 자동차 열쇠를 K샘에게 넘겼다. 그리고 출, 퇴근을 도와주시는 수고비도 매달 챙겨 드렸다. 그때부터 그 차는 K샘의 차가 되었다. 우리는 그 차를 출, 퇴근에 이용하는 것 외에는 1년에 서너 번 정도만 사용했을 뿐이었다. 기묘한 윈윈이 시작되었다. K샘은 L샘을 내려준 그 자리에서 나를 태웠다. 그날부터 나는 기사를 대동하고 출, 퇴근하는 '사모님'이 되었다.


처음에는 학교 후문에서 내렸다. 어느 날 비가 와서 학교 안 주차장에서 나를 내려 준 적이 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아예 학교 안 주차장에 나를 내려 주었다. 그리고 퇴근 무렵에도 칼처럼 그 자리에서, 그 시간에 K 샘이 나를 기다렸다. 혹시 퇴근 무렵에 우리 차가 보이지 않으면,


"어, 오늘은 차가 안 왔네요?"


동료교사들이 먼저 알 정도였다. K샘도 우리 학교 일정을 다 알게 됐다. 개학은 언제며, 축제는 언제 하는지, 등등...


K 샘은 4년 넘도록 나의 출, 퇴근을 도와주셨다. 혹시 우리가 차를 이용할 일이 생기면 그냥 렌터카를 불렀다. 그 외에는 주로 택시를 이용했다. 자동차를 사용해야 할 일이 생겼다고 미주알고주알 말하기가 거북했다. 그러다 보니 결국 그 자동차는 K샘의 차가 되었다.


https://brunch.co.kr/@mrschas/268



런데 K 샘 내외가 지난 2월에 갑자기 전주로 이사를 가게 됐다. K샘 내외는 아들 간병의 2/3를 도맡아 하고 있었다. 여러 가지 사정상 피치 못하여 내린 결정인 듯했다. 5년 동안 내 아들을 돌보던 활동지원사 일을 내려놓게 됐다.


그분들은 내가 퇴임하는 때를 맞추어 이사를 결정했다고 했다. 그분들이 떠 날부터 우리 자동차는 지하 주차장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그 차는 주인 잃은 모습, 딱 그것이었다. K 샘이 운전 석에 앉으면 어울리는 차였다.


게다가 남편은 11인승인 그 차가 뭔가 부담스럽다고 했다. 점점 운전을 하지 않게 되니 더 그랬을 것 같았다. 후진 주차가 쉽지 않다고 했다. 그래서 9인승으로 바꾸자고 했다. 그러면 자주 나들이도 가고 그럴 것 같다고 했다.


아무튼 두 달 동안 우리는 차를 주차장에 세워두고 사용하지 않았다. 일주일에 한 번쯤 내려가서 시동만 걸어줄 뿐이었다. 남편은 차를 세워두고도 그냥 택시를 이용했다. 오랫동안 남의 손에 차가 넘어가 있었으니 남편에게는 남의 차 같은 기분이 드는 모양이었다. 그 차는 아마도 K 샘과의 인연이었던 것 같다.


"의논할 일이 있어."

"뭔데요?"

"우리, 차라리 저 차를 없애요."

"그러면, 차 없이 어떻게?"

"그냥 좀 있다가 9인승으로 바꿉시다. 그래야 편안하게 어디로 나다닐 수 있지."


그래서 우리는 정들었던 애마, 아니 K 샘의 애마를 없앴다. 내가 퇴임을 하게 되니 그 차도 우리와의 인연이 끝난 것 같았다. K샘도 떠났고 K샘의 애마였던 그 차도 함께 떠난 셈이다.


학교를 떠나게 되니 다양한 이별을 하게 됐다. 정든 학생들과 이별했고, 꽃과 나무와도 이별했다. 게다가 정든 애마, 우리의 자동차와도 이별했다.


퇴임을 하면서 동시에 여러 가지 이별 연습을 했다.
이별이란 것은 해도 해도 안타깝고 서운하다.

#애마 #자동차 #이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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