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헤이, AI 비서야~
그림을 그리고 싶을 때가 종종 있다. 정작 나는 그림을 잘 그리지 못한다. 초등학교 3학년 때, 그림 그리는 것에 대해 크게 좌절한 적이 있다. 그때의 트라우마가 지금까지 나를 짓눌렀다.
도화지에 12색 크레파스로, 해, 나무, 꽃, 산 등을 곧잘 그렸다. 그래서 군에서 개최하는 사생 대회에 학교 대표로 참가했다. 무슨 그림이든지 그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대회 당일, 칠판에 큰 글씨로 된 제목이 떴다. 지금도 생생하다. 그 백묵 글씨가. <개에게 쫓기는 고양이>였다. 50년이나 지나버린 옛일이건만, 칠판에 나붙었던 그날의 제목이 나를 주눅 들게 한다.
그날 나는, 하얀 도화지를 백지로 출품했다. 단 한 번도 그려보지 않았던 개와 고양이를 도무지 그려낼 자신이 없었다. 내 인생에서 철저히 백기를 든 것은 그때뿐이었던 것 같다. 그날 이후로 그림 그리기를 포기했다. 그다음부터는 백일장에 참가했다. 그날의 상처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나는, 붓을 들고 멋지게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유명한 시,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 때때로 생각난다. 내 유년의 뜰에서 포기해 버렸던 그림 그리기, 그 가지 않은 길은 내가 눈을 감을 때까지 아련하게 떠오를 것 같다. 그림을 그리는 길로 가지 못한 아쉬움이 내 인생 여정에 안개처럼 깔려 있었다.
The Road Not Taken(Robert Frost)
TWO roads diverged in a yellow wood,
And sorry I could not travel both
And be one traveler, long I stood
And looked down one as far as I could
To where it bent in the undergrowth;
Then took the other, as just as fair,
And having perhaps the better claim,
Because it was grassy and wanted wear;
Though as for that the passing there
Had worn them really about the same,
And both that morning equally lay
In leaves no step had trodden black.
Oh, I kept the first for another day!
Yet knowing how way leads on to way,
I doubted if I should ever come back.
I shall be telling this with a sigh
Somewhere ages and ages hence:
Two roads diverged in a wood, and I—
I took the one less traveled by,
And tha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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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않은 길(피천득 역)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던 게지요.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그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출처: 나무위키)
아, 나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그림을 잘 그릴 수 있다면 제일 먼저, 유년 시절 지냈던 고향을 그려보고 싶다. 그 그림을 액자에 넣어 벽에 걸어두고도 싶기도 하다. 그래서 AI에게 말을 걸었다.
나: 시골 마을, 동구 밖에 커다란 버드나무 한 그루, 아이들이 그 밑에서 놀고 있다. 100여 가구의 초가집, 기와집이 있다. 앞에는 냇물이 흐르고 나지막한 뒷산이 있다. 앞산도 있다. 옆산도 있다. 산이 둘러 쌓인 마을이다. 어떤 집에서는 저녁연기가 피어오른다. 골목에는 사람들이 걸어 다니고 있다. 삽살개도 있다.
AI: ...
못하겠으면 못하겠다고 말을 하든지. 그 잘하던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고 내 말을 씹는다. AI가. 왜 묵묵부답일까? 인간인 내가 참아야지. AI와 무엇을 해내려면 상당한 인내심이 필요하다. AI는 긴말을 싫어한다. 그래서 말을 줄여서 부탁했다.
나: 동구 밖에 커다란 버드나무 한 그루 있는 60년대 한국 시골 마을 풍경을 그려주세요.
어? 앞에 묵묵부답이었던 것도 기억을 해두었던 모양이다. 그럴싸한 그림을 그려준다. 그런데 흑백그림이다. 컬러로 그려달라고 했더니 또 읽씹이다.
몇 가지 더 부탁해 봤지만 맘에 들지 않는 그림만 그려낸다. 내가 원하는 그림을 얻기는 글렀다.
(1) 나: 하늘, 구름, 해를 그리고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있는 모습을 8살 어린이가 크레파스로 그린 그림으로 표현해 주실래요?
(2) 나: 좋아요. 그런데 구름은 한 조각만 떠 있고 8살 아이가 크레파스로 그린 그림으로 표현해 주세요. 그림에 크레파스는 나오지 않게 해 주세요.
(3) 나: 크레파스화, 8살 정도의 여자 아이가 산과 하늘을 보고 있는 그림.
(4) 나: 아이가 그린 그림을 원해요.
그나마 3번 그림이 내가 원하는 스타일의 그림과 흡사하다.
만족스러운 이미지를 얻으려면, 대화형 AI와 쇼부를 볼 게 아니라 일전에 사용했던 AI 이미지 생성기(Bing의 이미지 크리에이터)를 활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앱은 프롬트를 넣으면 4가지 유형의 그림을 만들어 준다. 그중에서 내 맘에 드는 그림을 다운하면 된다. 맘에 들지 않으면 프롬트를 좀 더 수정한 후에 '만들기' 버튼을 누르면 된다. 짠, 이미지 크리에이터는 이렇게 한 방에 4가지 옵션의 그림을 만들어 냈다.
나: 60년대 시골 마을, 뒷산이 있고, 마을 앞에는 개울이 흐른다, 동구 밖에는 커다란 버드나무가 한 그루, 삽살개, 나무 밑에 노는 아이들,
, (컴머)를 찍으며 프롬트를 입력하는 것이 팁이다.
단순한 그림 형태를 원하는데 너무 대작이다. 그래서 위의 프롬트에 '크레파스화, 어린이가 그린 그림'이라고 몇 마디 더 추가했다. 그래도 생성된 그림은 이전 것과 대동소이했다. 프롬트를 더 단순화해야겠다.
'유치원생이 그린 크레파스화, 시골 마을, 동산'이라고 프롬트를 입력했다. 헉, 유치원생이 그린 그림 치고는 너무 과분하게 잘 그려졌다.
AI의 과유불급에 질리고 있다. 이렇게 맘에 드는 그림을 도출할 수 없다면 차라리 내가 그리고 싶다. AI와 함께 고향 그 옛 모습을 그려보고 싶었던 맘을 접어야겠다. 차라리 어린 조카 손주에게 용돈 좀 쥐어주며 그려달라고 하는 게 낫겠다. AI는 아동스럽지 않고 지나치게 전문적이다. 인간미 매력이 꽝이다. 단순한 그림을 원한다고 그렇게 말해도 완성된 그림 수준은 여전했다.
이제는 <개에게 쫓기는 고양이>를 그려낼 수 있을지 한 번 시도해봤다. 유화로 그려달라고 했다.
지나치게 잘 그렸다. 그림이 리얼하다 못해 마치 사진 같다. 이게 아닌데... 다시 프롬트를 수정해 봐야겠다. 수채화 기법을 추가로 주문했더니 아래와 같은 그림이 나왔다.
내친 김에 펜화 기법으로 그려보라고 했더니 흑백으로 된 그림 4장이 생성되었다.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만화 기법'으로 그려보라고 주문해 봤다. 이제 됐다. 이게 그중 제일 맘에 드는 그림이다. 자꾸 시켜서 그런지 '개에게 쫓기는 고양이'인데 이번에는 <개를 쫓는 고양이> 그림이 3점이나 나왔다. 아무튼 동물을 AI를 이용하여 그리려면 만화 기법이 제일 나을 것 같다.
내 고향 마을도 만화 기법으로 그린다면 좀 더 나을까? 시도해 봤다. 내가 넣은 프롬트는, '나무가 한 그루 서 있는 한국의 시골 마을, 만화'였다. 매우 단순했다. 그런데도 대작이 나온다. 영 맘에 들지 않았다.
만화기법으로 그린 <개를 쫓는 고양이> 그림 중에서 한 컷을 보고 직접 그림을 그려보기로 했다. 그림을 그리는데 눈물이 난다. 이게 뭐라고. 진작 그림을 그려볼걸. 맘이 따뜻해짐을 느꼈다. 이제는 '가지 않은 길'에 대해 연연하지 않을 것 같다.
다시 사생대회에 참가하여 그 제목을 만난다 해도 당황하지도 않을 것 같다. 또한 백지를 내지 않을 것 같다. 오늘 밤 꿈에, 아마 사생대회가 열릴 것만 같다. 나는 신들린 듯이 멋지게 그림을 그릴 것이다. 이미 그려본 깐이 있으니...
<가지 않은 길>의 시 구절을 읊조려본다.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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