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소개_나는 끝내, 엄마다.

by 곶감씨

안 그래도 요즘 나 자신을 뭐라 소개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차였다.


내 청춘은 기독교학을 공부하며 세상 속 기독교의 역할을 고민하던 인문학도, 시민단체와 대안학교에서 다음 세대 교육을 고민하던 교육 활동가로 기억된다.

청춘의 시간 어디 쯤에서 문득 모든 것이 무르익었다 느꼈던 것 같다. 배움과 활동과 성취, 관계 모든 것이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럽고 보드라웠다.

그 시간을 기념이라도 하듯 결혼을 했다. 첫 아이를 임신하고 부른 배는 스스로 얼마나 자랑스럽고 기특했던지, 봄 햇살에 빛나는 꽃잎 만큼이나 찬란한 때였다.

그리고 -너무나 진부하게도- 첫 출산과 육아의 시간을 호되게 겪었다. 마치 내 안에 모든 빛이 사그라드는 것만 같았다.

왜 이렇게 힘들다는 걸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을까, 대상없는 원망이 가장 위로가 되던 날들이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났다.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나니 머리가 훤해진 남편이 저 쪽 방 구석에서 자고 있고 큰 아들, 둘째 아들, 셋째 딸, 막내 딸이 저마다 내 사지에 붙어 옹기종기 잠들어 있었다.

꿈만 같았다. 아. '꿈만 같았다'라는 말이 이토록 실감되는 순간을 이렇게 맞이하고 있다.

이 꿈(이라 쓰고 현실이라 읽는다) 속에서 나는 5년 차 귀농인이요, 네 아이의 엄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곱씹던 시선 끝에 감나무가 걸렸다.

탐스럽던 감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던 감나무가 점차 가난해지는 모습을 유모차의 막내와 함께 하던 산책길에서 매일 같이 목도했다. 마음이 서운했다.

나도 저처럼 탐스럽게 나무 끝에 달려 원없이 햇살을 받던 때가 있었던 듯 한데 계절은 야속하게도 그 감을 떨구어 놓고 만다.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 감들이 처마 밑에 내달리기 시작했다. 나무에서는 떨어졌지만, 여전히 고운 가을의 햇살을 지나, 찬 바람과 서리도 의연하게 맞아낸다.

어찌나 작게 쪼그라드는지, 그리고 어찌나 깊이 달아지는지.

아 세상이 끝난 게 아니구나. 나는 감인게다. 지금은 곶감이 된 감인게다.

나는 오래도록 달고 달아져 진짜 감이 되어가고 있는게다.


그러면서 시작한 게 모교 사이버대학에서의 공부다.

내가 사는 지역엔 다문화가정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 국제 학교를 따로 갈 필요가 없다.

그 엄마들은 육아 뿐 아니라, 언어도, 나라도, 문화도 모든 게 처음이다. 그런데도 나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너무나 씩씩하다.

그들의 곁을 그럴듯한 핑계 삼아 꿈이라기엔 부끄럽지만, 밥벌이로는 부끄럽지 않은 나름의 그림을 그리며 시작한 공부다.

어떤 공부가 필요할지 모르겠으니 닥치는대로 한다. 한국어교육, 평생교육사, 사회복지학, 심지어 사물놀이까지.

이쪽에서 내가 필요없으면 저쪽에서라도 필요할 수 있게, 나름 애를 쓰고 있다.


귀농 5년 차, 가정의 소박해진 곳간을 채울 심산으로 지역 작은 건설 업체의 사무보조로 취업도 했다.

최저시급을 받으며 하는 일은 청소, 점심밥 준비, 다과준비부터 서류 정리까지 온갖 잡일이다.

대표님은 청소, 밥 준비까지 시켜 미안하다며 따로 봉투를 쥐어주기도 하는데 나는 의아하다.

내 집 청소하고, 내 집에 오는 분들에게 맛난 음식 대접하는 일이 과히 미안할 일인가 기분이 묘한 것이다.

그러다 깨달았다. 아 나는 뼛속까지 엄마가 되었구나. 다른 사람 먹이고 입히는 일이 자연스러워졌구나.

어디에서 무엇이 필요할지 몰라, 우선 닥치는 대로 하고 보는, 그러다 그것이 내 새끼(?) 입에 들어가면 한없이 행복한 엄마가 되고야 만 것이다.


그렇다면 된 거다. 내가 다른 이를 위하는 일이 이토록 자연스러워지고, 그에 대한 대가가 어색해졌다면, 그럼 내 청춘이 꿈꾸던 그 찬란한 날의 어느 일부분은 이루었다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혼자 생각하며 멋쩍게 웃는다.

지금의 공부가 끝나고, 내가 그리던 그림 언저리에라도 가게 되는 날, 그래서 새롭게 내 명함이 필요하게 되는 날이 온다면 그땐 직업에 ‘엄마’라고 쓰고 싶다. 내가 제일 잘하는 일이 ‘엄마’의 일이 되었으니, 엄마의 마음과 손길로, 여러 엄마들과 함께 엄마인 것을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으면, 그렇게 제대로 곶감이 되어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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