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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담 Feb 14. 2023

호박 한개 생쥐 두마리, 러닝슈즈 Let's go

뉴욕시티 마라톤까지 D-268 

내가 속해있는 런클럽은 그냥 "동네모임"이다. 일단 이름부터가 동네이름이고, 연령대도 다양해서 어떻게 저 사람들이 같은 그룹인지 알수가 없는 그런 모임이다. 요즘 유행하는 "크루"니 "세션"이니 하는 그런 팬시한 모임과는 거리가 먼, 그냥 자다 일어나 뻗친 머리 그대로 모여 대강 뛰고 대강 헤어지는 모임이다. 달릴때 말고는 만난적도 없어서 그야말로 난닝구차림으로만 만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미국사람들 실용주의라더니 정말 그러네. 그리고 순수하다고 할까..? 운동 하러 가는데 굳이 꾸미고 뭐하고, 어쩔땐 목적 그 자체보다 보여지는 모습에 신경이 쓰이게 마련인데, 그런 체면치레 따위 개나줘버리라는 태도로 일주일 내내 똑같은 옷만 입고 나오는 사람이 있질않나 (물론 그 사이에 빨래도 안하고) 또 누가 그렇게 입고 나오거나 말거나 신경 쓰는 사람도 없고... 그런 문화가 처음에는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사람이 '편한것'을 이기는건 없어서 어느샌가 나도 눈썹을 안 그리고 나가기 시작했다 ;; 


그렇게 나름 즐겁고 편안한 달리기 생활을 하던 어느날. 갑자기 메일 알림이 분주하게 울리기 시작하였으니, 해마다 하는 연례행사인 "시상식"을 한다고. 나는 달리기 자체를 코로나 때문에 시작한 사람으로써 런클럽 활동도 코로나때 시작해서 진짜로 달리는 모임 말고는 행사가 거의 없었다. 뉴욕은 특히나 코로나 피해가 심했던 도시라서 실내 모임이 아예 금지되었던 시기도 있고 해서 더욱 그랬다. 그리고 2023년. 코로나가 언제적 일이냐는 듯 모든것이 원래대로 돌아가기 시작하자 이 파티에 죽고사는 민족이 드디어 파티를 하기 시작했다. 


주말 그룹런에서도 만나는 사람들마다 시상식 파티에 가냐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나는 가본적이 없다고 하니 오랜 멤버들(코로나 이전의 시절을 아는 멤버들)이 꼭 가봐야한다고 진짜 재미있다고 적극 추천했다. 게다가 나는 어쩌다보니 "올해의 신인 멤버" 후보에 올랐기 때문에, 수상 여부를 떠나 2000명이나 되는 멤버중에 5명에 뽑힌것이 큰 영광이니 반드시 가야한다고들 부추겼다. 나는 우리 런클럽 멤버가 2천명이나 되는지 몰랐다. 주말에 달리기 하러 가면 30명도 없더만... 


하여간 하도 부추김을 당하다보니 나도 내심 '그럼 한번 가볼까..?' 하는 생각에 파티 초대 메일을 자세히 보니 이게 그냥 모여서 술이나 조금 찌끄리고 핑거푸드 좀 집어먹는 그런게 아니라 바 하나를 통전세 잡아서 하는 제대로 각 잡은 레드카펫 이벤트였던 것이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드아.... 역대 수상자들 사진을 보니 진짜로 남자는 턱시도 여자는 드레스 차림이다(!!!) 아니 맨날 뻗친 머리에 어디서 공짜로 받은 마라톤 기념티셔츠만 입고 나오던 사람들인데, 드레스도 갖고있는거였어?? 다들 턱시도 한 벌 쯤은 집에 있는거였어??? 


그냥 블랙 드레스라면 다른 상황에서도 입을 일이 많을테니 그러려니 할텐데 빨간 드레스 (우리 팀 상징 컬러)라니! 이 파티를 위해 따로 드레스를 살 정도로 진심이라고????





옷장을 열고 샅샅히 뒤져보아도 격식있는 드레스같은건 없었다. 빨간색 비스무리한것도 없었다. 남편이랑 둘이서 수트케이스 두개씩 들고 건너와 침대하나 책상 하나 식탁 하나 놓고나면 발 디딜 틈도 없었던 쪽방에서 시작한 미국살이. 뉴욕 하면 다 섹스앤더시티처럼 매일밤 하이힐에 드레스 입고 샴페인잔을 부딪히는 삶을 사는줄 알았더니 11년째 그런날은 단 한번도 오지 않았다. ㅋㅋㅋ 그리고 드디어 그 날이 오려고 하는데 하이힐도 없고 드레스도 없다. 


처음엔 미국 살이가 먹고 살기 빠듯해서, 나중엔 애 낳고 키우느라 바빠서... 참새같은 아기 입에 뭐 하나라도 더 넣어주려고 안 먹고 안 입고 살았는데 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안 먹었는데도 살이 쪘다. 아주 많이 쪘다. 자가용에 고급 유모차 싣고 가서 백화점 매끈한 대리석 바닥에서 살살 굴리기만 하면 되는 그런 육아는 언감생심이고, 접이식 유모차 접어 등에 짊어지고 애는 안고 엘리베이터도 없는 뉴욕 지하철을 오르락 내리락하며 놀이터며 박물관이며 막노동같은 육아를 했건만 오히려 살은 점점 더 쪘다 (!!!) 


"안 먹고 안 입었다"를 완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옷을 사 입어봐야 몸둥이가 이러니 예쁘지도 않고 불편해서 고무줄 바지와 후드티만 늘어나는 나날... 그러다가 달리기를 시작해서 살은 빠졌으나 고무줄 바지가 레깅스로, 후드티가 드라이핏 셔츠로 바뀌었을 뿐 격식있는 옷은 여전히 없고 애초에 격식있는 자리에 갈 일이 없는 "그냥 아줌마"가 되어버린 거였다.


그래도 나도 말이야! 한때는 말이야! 정장에 구두 신고 한손에 스타벅스 커피도 들고 테헤란로변을 멋지게 걷는 커리어 우먼이었다고!! 라고 말해봐야 이제는 누구도 믿지도 않을만큼 모든것이 변해버렸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고리타분한 곰팡내나는 옛말이라고만 생각한다면 아직 젊다는 증거다. 10년전에, 20년 전에 여전히 추억이 머물러있는 아줌마가 되어보면 강산이 뭐야 내 골격은 왜 변했냐며 어디다 하소연이라도 하고싶다. 


뭐 하여간 강산이 변했고 내 골격도 변했고, 한때는 옷좀 입었으나 (이놈의 라떼 토크를 멈출수가 없다) 이제는 변변한 옷 한벌이 없는 옷장을 문을 냅다 후려치고는, 드러워서 안간다 그놈의 파티. 해버린 어느날....



딸(만8세)이 친구랑 인형극을 보러 간다고 해서 따라갔다. 사실 우리 동네에는 꽤 유서깊은 인형극장이 있는데 우리 애가 그다지 인형극에 관심이 없었고, 한동안 또 코로나때문에 휴업을 하는 사이에 애가 훌쩍 커버려서 인형극 보기엔 애매한 나이가 되어서 한번도 간적이 없었다. 그래도 애들은 애들이라서 친구가 같이 가자고 하니 웬일로 자기도 간다고 해서 가게 되었다. 그런데! 

하필 오늘 공연이 신데렐라네???




저는 입고 갈 옷이 없어요 요정님

왐마! 내얘기잖아! 


그렇다고 이 스토리 전개가 제가 이렇게 힘든 교포살이를 하고있습니다, 애 키우기가 이렇게 힘들어요, 남편과 아이를 위해 이렇게까지 희생하며 뭐 찢어지게 가난한 생활을 버티는 의지의 재미교포가 여차저차해서 파티에 가서 여차저차 상을 받고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로 끝날거라고 생각하지는 마시라. 


호박 한개와 생쥐 두마리를 잡아다가 요정님의 마법으로 드레스를 입고 궁전으로 향하는 신데렐라에 과몰입한 나는 생각했다. 과연 내가 파티에 못 가는게 옷이 없어서인가... 





내가 드레스가 없는것인가, 가오가 없는 것인가


나에게 없었던건 '가오'였다. 파티라니 그런건 젊은사람들이나 가는거 아니야? 보석 막 엄청 달고 화려하게 가야되는거 아니야? 아니 애초에 호박마차 안 타고 지하철 타고 가도 되는거야? 애엄마가 다 저녁때 파티 왔다고 주책이라고 하는거 아니야? 


그런데 저 먼지투성이 누더기옷을 입은 신데렐라는 새엄마에게 당당히 말하지 않는가? 다락방에 우리 엄마가 입던 드레스가 있으니 내가 그걸 입고 가겠다. 나도 가게 해달라. 


드레스는 핑계고 나는 파티에 가고싶지 않았다. 한번도 가본적이 없는 자리, 처음 와본 티를 팍팍 내며 뚝딱거리며 있을 내가 부끄럽고 싫었다. 내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던 말은 완전히 반대였다. 내가 가오가 없어... 





출발을 안 하면 어떻게 도착을 해?

시간은 흘러 며칠 후, 또한번 메일함이 들끓기 시작했는데 이번에는 뉴욕시티 마라톤이 화두였다. 2월이 되고 뉴욕시티 마라톤 주최측인 NYRR이 참가접수를 시작했다. 2월에는 추첨, 인증기록 보유자, 그리고 참가보장권 보유자(2022년에 9+1 챌린지를 끝낸 사람들)가 접수를 하는데 우리같은 거주자들은 대부분 9+1을 하기때문에 접수와 동시에 참가가 확정된다. (추첨은 2월 말에 개별 통보된다) 

뉴욕시티 마라톤 총 참가인원인 5만명의 의 70%정도가 추첨+참가보장권 보유자이기 때문에 엄청난 접속 전쟁이었다. 여차저차 접수를 하고 sns에 친구들의 인증샷이 속속 올라왔다. 나도 접수화면을 캡쳐해서 "나의 첫 뉴욕시티 마라톤"이라고 글을 써서 올리는데 갑자기 머리가 띵 했다. 출발을 안 하면 도착을 영원히 못하지... 첫발을 안 뗐는데 두번째발은 어떻게 떼? 


나는 올해 인생 처음으로 마라톤을 뛴다. 작년에는 인생 최초로 하프 마라톤을 뛰었다. 내가 하프 마라톤을 뛰기 전날까지만 해도 나의 최장거리 달리기는 16km였다. 16km를 넘어가는 순간 한걸음 한걸음이 나에겐 기록이었다. 뛰어본적이 없는 거리를 한걸음 한걸음 뛰어 21km를 완주했다. 



해본적이 없는것, 가본적이 없는 곳을 피하다보면 영원히 못해본것, 영원히 못가본곳으로 남는다. 



당장 호박 한개와 생쥐 두마리 대신 신용카드를 잡아다가 아마존에게 주고 익일배송 마법으로 드레스를 받았다. 어떻게든 수수한걸로 골라서 평상시에도 좀 입어보려는 알뜰한 마음일랑 버리고 화끈하게 빨간색으로 골랐다. 이왕 빨간색인거 어깨도 훤히 드러내는 과감한 디자인으로 골랐다. 드레스를 입어보는게 웨딩촬영 이후 처음이고, 하이힐을 신는게 임신 후 처음이다. 어쩌면 영원히 다시 오지 않을수도 있었던 일의 첫발을 뗀다.

막상 첫발을 떼려고 하니 근원 모를 자신감이 솟아난다. 어쩌면 내가 가장 주목받는 올해의 신인 멤버일지도... 어쩌면 나는 39세 아줌마 중 가장 빠른 러너일지도... 




중요한건 가겠다는 마음

그렇다고 내가 화려하게 파티에 등장해서 프린스 차밍을 꼬시는데 성공하고 파티퀸으로 핵인싸 등극을 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여전히 나는 뚝딱거렸고, 파티는 커녕 바에 가본것도 손에 꼽을지경이라 가뜩이나 밤눈이 어두운 나는 친구들 얼굴도 못알아볼 지경이었다. 


상을 받으면 주는 골든 카우벨

게다가 상도 못 받았다. 이래서야 불굴의 재미교포가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파티에 갔다가 상을 받고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스토리에 비벼볼수조차 없게 되었다. 그런데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좋았다. 왜냐면 나는 벌써 빨간 드레스를 샀고, 의욕이 과해서 향수까지 뿌리고 입고 나왔으니 환불하기도 글렀고 이 드레스를 갖고있는 이상 뽕을 뽑으러 내년에도 파티는 올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내년엔 이미 "신인 멤버"가 아니게 되었지만 다른 부문, 예를 들면 "베스트 30대 여성 러너"라던가 (언감생심) "베스트 자원봉사자"라던가(좀 비벼볼만 함) 그런 상을 타는 꿈을 꾸어본다. 


해본적이 없는것, 가본적이 없는 곳을 피하다보면 영원히 못해본것, 영원히 못가본곳으로 남는다. 

하지만 한발을 떼고 두발을 떼고, 그것을 착실히 반복하다보면 언젠가 닿는다.

마라토너인 우리들은 누구나 이걸 알고있다. 


그래서 나의 신데렐라 스토리는 "왕자님과 결혼해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하는 훈훈한 결말이 아니라

"올해는 상을 받지 못했지만 내년엔 꼭 받을것입니다" 의욕이 활활 타는 결말을 맞이했다.






올해의 신인멤버로 후보에 올랐으나 수상은 실패.

하지만 [평소와 파티에서 가장 큰 갭차이]멤버 1위로

비공식 선정되는 영예(?)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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