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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담 Jun 12. 2024

911 엠뷸런스에 실려갔다고요? 제가요

내가 교통사고 환자가 되다니

벌써 한 3주는 된 일이다. 

평생 나에게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이 일어나버렸다. 



엠뷸런스를 탔다. 그것도 뉴욕에서.



그날도 여느때와 다름없는 봄날의 평일 아침이었다. 코트를 안 입어도 되는 계절이 오면 나는 달리기 복장을 갖추고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준다. 아이를 학교에 들여보낸 후에는 그대로 달려서 공원을 한바퀴 빙 돌아 집에 돌아오는게 나의 아침 루틴이다. 



공원이 아닌 길에서 뛸때는 도중에 신호가 걸리기도 해서 뛰다 멈추다 해야하는걸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다. 러닝도 짬이 차기 시작하면 대충 도로를 보고 차가 없다 싶으면 후딱 뛰어서 건너기도 한다. 게다가 보행자가 "갑"인 뉴욕에서는 보행자는 언제든 무단횡단을 해도 된다는 인식이 있을 정도라서 대규모 인원으로 뛸때는 리더가 차량에게 수신호를 주면서 모든 인원이 한번에 건너갈 수 있도록 정리해주기도 한다. 생각보다 도로가 좁아서 금방 건너기도 하고, 시내 차량 주행속도가 느린데다가, 일방통행 지옥 뉴욕이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혈혈단신으로 혼자 뛸때도 그렇게 뛰어도 되느냐 하면, 무지하게 용감하거나, 아니면 차보다 빠른 러너라면 그러기도 하겠지만... 

나는 아무리 좁은 일방통행로라도, 심지어 차가 전혀 없더라도, 웬만해선 무단횡단을 하지 않는 모범시민이다. (사실은 쫄보라서...)

보행신호가 들어와도 절대 바로 건너지 않고 왼쪽 오른쪽을 확인 한 후 건너는 편이다. 요즘은 도로위의 무법자인 배달자전거와 전동스쿠터(!!!)가 역주행도 서슴치않기 때문이다. 




그날도 4th avenue에서 보행자 적신호가 들어와서 내심 기뻐하며 쉬었다. 4 애비뉴에서부터는 깎아지른듯한 오르막이기 때문에 일분 일초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쉬고, 보행신호가 들어온 후 늘 하던대로 좌우를 확인한 후 건너기 시작했다. 4 애비뉴는 브루클린에서도 손꼽히게 넓은 도로다. 아침시간이라 차가 많았지만 분명히 보행신호였고, 역주행이나 신호위반을 하는 자전거나 스쿠터도 없었기 때문에 마음놓고 길을 건너다가 반쯤 건넜을 때 살짝 뛰기 시작했다. 물론 내 뒤에도 보행자가 많았고 반대편에서 건너오는 사람도 있었다. 안전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던 그 순간. 

신호를 위반하고 오른쪽에서 횡단보도로 진입한 차에 치였다.




그 큰 사거리에서 신호위반을 하는 차가 있을거라곤 상상도 못한 그 순간, 사고는 그렇게 일어나는 거였다. 




동승자 증언에 의하면 운전자측 사이드미러가 내 팔에 스쳤을 뿐 직접적으로 "친"것은 아니라고 했지만, 차가 내 몸에 닿는 순간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 움직이고 있었고 나 역시도 약간 뛰기 시작한 상태라 갑자기 멈춰서지 못해 운전자측 문을 양손으로 세게 밀고 뒤로 나가떨어졌다. 그 찰나의 순간에 판단하기를, 내가 차에 너무 가까이 넘어지게 되면 뒷바퀴에 깔릴수도 있을거라는 느낌이 있었기 때문이다. 최대한 차에서 멀리 넘어지기 위해 있는힘껏 차를 밀고 공중제비를 세바퀴 반 도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화려하게 바닥에 굴러떨어진 나를 보고 뒤에 있던 보행자들이 기겁을 해 911을 부른건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놀라기도 했고, 오른쪽 몸으로 바닥에 세개 내동댕이 쳐진 충격이 있어서 제대로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큰 도로였기 때문에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보도로 올라갔다. 사실 거의 다 건넌 길이기 때문에 보도까지 몇발작 되지도 않았다. 길을 다 건너기 전 마지막 차선에서 치였기 때문이다.




놀라운 스피드로 소방차가 왔다. 


뉴욕에서는 무슨 상황이든 일단 급하면 911에 전화를 걸고 소방차가 가장 먼저 온다. 따로 경찰 신고 번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교통사고든 위급환자든간에 일단 소방차가 온다. 소방차에서 우루루 내린 소방관들에게 둘러싸여 신원 확인을 하고 상황 파악을 하다보니 바로 구급차가 따라왔다. 구급대원이 다시한번 신원 확인을 하고 어디가 아픈지를 물었다. 그때 혼자서 일어서지 못했기 때문에 미국 범죄 드라마에서나 보던 구급차 이동침대를 척척 펴서 가져오더니 나를 거기에 태웠다. 그 후에 경찰이 와서 다시한번 신원확인을 하고 (;;;) 목격자들의 증언을 들은 후 운전자를 조사하러 간 사이, 나는 아주 신속하게도 이미 구급차에 실려있었고 가장 대기시간이 짧은 병원으로 빠르게 이송되기 시작했다. 



아니요 제가 아는데
어디가 부러지고 그런건 아닌거 같아요 ㅜㅜ 


일이 커지니 아픈것보다 걱정이 앞섰다. 어디서 피가 나는 것도 아니고, 부러진것도 아닌것 같은데 사설 구급차도 아닌 911 엠뷸런스에 실려가고 있는 상황이 너무 겁났던 것이다. 

구급대원에게 나는 괜찮은것 같다고 말하니 그럼 집까지 걸어갈 수 있느냐고 묻는다. 물론 집까지 걸어갈 상태는 아니었다. 어떻게 해야되나 걱정하고 있으니 "당신의 안전을 확인하는것이 우리의 임무고, 당신의 권리이니 병원에는 가보는게 좋을것이다" 라고 한다. 

세상에! 

사랑에 빠져버릴뻔했네.




그렇게 병원에 도착해 이제 내려서 들어가면 되나 했더니 웬걸! 구급차는 병원에 들어가는 통로가 따로 있었던 것이다!!

철컥 철컥 엠뷸런스 뒷문을 열더니 침대채로 나를 끌고 병원으로 들어간다. 들어가자마자 이런저런 바이탈 체크 기계를 주렁주렁 매달더니 의사 두명이 후다닥 달려왔다. 




나는 10년 전에 임신 중 맹장이 터지는 사건(!)을 겪어 그때도 응급실에 가봤지만, 그때는 미국에서 엠뷸런스같은건 불렀다간 큰일나는건줄 알고(의료비 지옥인 미국에서 엠뷸런스라니...) 택시를 타고 가서 그랬는지 전혀 이렇게 긴박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아픈것도 아픈건데 그 분위기에 놀라서 혈압이 190가까이 오르는 진귀한 경험도 했다. 



응급실에는 구급차를 타고 왔기 때문에 따로 신원확인은 하지 않고 자동으로 데이터가 넘어갔다. 의사들도 이미 상황을 알고 온 터라 여기저기를 눌러보고 구부려보더니 다리 엑스레이를 찍을거라고 했다.




다리라고요????

다리 엑스레이라고요!!!!

제가 다리를 다쳤나요?? 심각한가요????? ㅜㅜㅜㅜ 

달리기 동호회에 돌아다니는 유머 짤에 나오는, 온몸에 붕대를 칭칭 감고 의사에게 "그래서 얼마나 심각한가요? 이번 주말에 저 달리기 할 수 있을까요? 라고 묻는 그 그림처럼

엑스레이는 아직 찍지도 않았는데 저 혹시 다시는 못 달리게 되는건가요?? 라고 애절하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엑스레이 결과 다행히 부러지거나 금이 간 곳은 없으나, 근육이나 인대 손상, 내부 출혈은 있을수도 있으니 당분간 쉬라며 아프면 애드빌을 먹으라고 했다. 미국은 웬만큼 아파서 병원에 가도 딱히 약이나 주사를 주지 않는게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애드빌은 약국에서 그냥 사는 약인데 그 중에서 가장 센 것으로 하루 최대 용량까지 먹으라고 했고, 내부 출혈이 있을 수 있으니 아스피린은 절대 먹지 말라는 지시를 들은 후, 엄청나게 많은 서류에 사인을 하고 아직도 후들거리는 다리를 절룩대며 택시를 타고 집에 왔다. 




차 또는 오토바이, 자전거, 전동 스쿠터에 치이는 일은 러너들에게 심심찮게 일어나는 사건인지라 주기적으로 런클럽에서 화제가 되곤 했지만 절대로 나에겐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는 근거없는 확신이 있었다. 집에와서 침대에 누우니 갑자기 눈물이 왈칵 난다. 내가 차에 치였다고???!!! 보는 사람이 없어도 신호 위반을 안 하는 내가!! 왜 내가!!!! 




다행히 어디가 부러지진 않았지만 엠뷸런스는 이미 탔고, 종합병원 응급실에 실려가 엑스레이도 찍었으니 의료비 폭탄 맞을 일만 남았네 생각하니 몸은 하나도 안 아픈 것 같았다. 바로 변호사 친구에게 연락해서 이럴땐 어떻게 처리해야하는건지 물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미국의 절차를 모르는 이방인이고, 한국이었어도 당황스러웠을 교통사고를 당했으니 앞으로 뭘 어떻게 해야할지 막막해서였다.




친구는 지적재산권 전문 변호사라서 교통사고는 다뤄본적도 없고 겪어본적도 없다고 했지만 한가지 확실하고 강력한 조언을 해 주었다.



이런건 니가 직접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상해전문 변호사를 써야해.



하나도 안 아프다고, 엠뷸런스 괜히 탔다고 자다가 남의 다리 긁는 소리를 하던 나였지만, 많은 사람들의 예언대로 하룻밤 자고 일어나니 온몸이 부서질듯 아파왔다.



그렇게 나는 교통사고 환자가 되었고, 

무려 미국에서 변호사님을(!!!) 고용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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