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재업고튀어, 브리저튼3
드라마 <선재 업고 튀어>가 장안의 화제다. 대한민국 여성들의 영상 알고리즘을 다 차지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넷플릭스 시리즈 <브리저튼3> 역시 공개 직후 이전 시즌의 기록을 다 갈아치우며 역대급 화제성을 기록하고 있다. 재밌는 건, 이 드라마들 사이에 완벽한 평행이론을 관찰할 수 있다는 것인데 - 바로 ‘과몰입’이다.
요즘 2030세대는 직접 UGC를 만들며 드라마 시청을 간증(?)하는 방법으로 과몰입한다. 시청자들은 <선재 업고 튀어> 본방송을 TV나 아이패드로 시청하는 장면을 찍어올리거나, 본인이 과몰입하고 있는 모습까지 올리기도 한다. <브리저튼3> 시청자들은 한 술 더 떠 드라마 속 고전 의상을 직접 입고 사극 말투를 따라한다. 인스타그램&틱톡을 합산한 게시물 수는 <선재 업고 튀어> 53만 건, <브리저튼3> 300만 건을 기록하고 있다.
드라마 과몰입이 과거에 없었던 것은 아니다. '99년 방영된 MBC 드라마 <허준>은 월요일 오후 10시마다 도로는 일찍 귀가한 사람들로 한산했고, 택시기사들조차 <허준>을 보러 집에 가야 한다며 승차거부했다. SBS 드라마 <파리의 연인> 은 시청률 4~50%를 기록하며 미처 집에 가지 못한 사람들이 길거리 TV에서 삼삼오오 모여 드라마를 시청하는 모습을 연출했다. 요즘 사람들은 각자의 디바이스로 시청하기 때문에, 오히려 과거와 같이 선명한 구심점을 갖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_aTJHkvQF0E
하지만 지금은 그 어느때보다 시청자의 모습이 전면에 드러난다. 우리는 <선재 업고 튀어> 시청자들이 직접 안방에 누워 OTT를 감상하며 올리는 영상을 통해 그들이 누구이며, 어떤 상황에서 드라마를 시청하고 또 무슨 생각과 감정을 느끼는지 안다. <허준>을 봐야한다며 승차 거부하는 택시기사들이나, <파리의 연인>을 보기 위해 길거리 상점 앞 TV에 모여있던 사람들은 익명성 뒤에 숨겨진 사람들이었다.
그때와 달리, 지금은 크리에이터 승헌쓰, 찰스엔터 등이 <선재 업고 튀어> 한 회차를 다 보고난 후 tvN과 인스타그램 DM을 주고받으며 그것을 자신의 스토리에 박제하고, 팝업스토어와 단관 이벤트에 응모하는 영상, 트래픽 폭발로 인해 응모에 실패하여 좌절하는 자신의 모습을 올리고 있다. 우리는 드라마를 보는 동시에 드라마를 보는 이들 시청자들을 보고, 우리와 비슷한 이들의 모습에 공감하며 드라마의 이야깃거리 영역을 끝없이 확장해나간다.
영어권 사용자를 중심으로 UGC가 쏟아지고 있는 <브리저튼3>은 한 발 더 나아간다. 이들에게 드라마는 사실상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위한 재료다. 일례로 시각장애인 틱톡 크리에이터는 <브리저튼3> 주인공의 목소리만 듣고 어떻게 생겼을지 유추하며 AI를 통해 시각화해보는 콘텐츠를 찍어 올렸다. 다른 크리에이터는 드라마 속 생리 장면을 토대로 당시의 여성혐오적인 시대 분위기를 짚어내며 젠더 이슈를 설명한다. 이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본편에 구애 받지 않는 2차 창작을 한다. 콘텐츠 소비자가 동시에 공급자가 되며, 원래의 콘텐츠에 맥락과 의미를 추가하며 세계관을 확장시킨다.
SNS, 특히 숏폼의 시대는 드라마 소비 패턴 및 공급자-시청자의 위계를 무너뜨렸다. 평범한 사람이 1시간 정도면 만들 수 있는 숏폼의 범대중성, 편의성은 시청자들로 하여금 셀카를 찍어 '나'의 일상을 기록하는 것처럼, 드라마를 보는 '나'의 모습, 드라마에 대한 '나'의 감정과 생각을 기록하도록 변화시켰다. 시청자들은 나아가 '나'와 공통 관심사를 가진 '우리'를 찾아나서며 소통한다.
과거에는 드라마가 소비의 대상이자 최종 목적이었다면, 이제 소비의 대상은 드라마 뿐 아니라 드라마를 보는 우리로 그 범위가 보다 넓어졌다. 소비의 최종 목적 역시 드라마 뿐 아니라, 그를 매개로 공통의 관심사를 향유하는 사람들과의 소통으로 확장되었다.
숏폼이 없던 시절, 우리의 이야깃거리는 드라마에 대한 내용이 전부 다였다. 하지만 이제는 드라마를 보는 나의 모습,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과 그에 대한 나의 반응, 팝업스토어 대기줄은 너무 길어서 촬영장을 대신 다녀온 나의 하루. 드라마는 재료가 되었고 콘텐츠의 주체는 나 자신이 된다. 숏폼은 수동적이던 시청자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권력을 건네주었고, 공급자의 오리지널리티는 저변이 넓어지는 대신 점차 희석되고 있다.